2026년 06월 04일 목요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사랑의 계명 (마르12,28ㄱㄷ-34)
제1독서<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2,8-15)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15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화답송>시편25,4-5ㄱㄴ.8-9.10과14(◎4ㄱ)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소서.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 주님의 계약과 법규를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모든 길은 자애와 진실이라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와 사귀시고, 당신의 계약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 ◎
복음<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28ㄱㄷ-34)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제1독서 (2티모2,8-15)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8-9)
티모테오 후서 2장 8절부터 13절까지는 말씀의 봉사자가 본받아야 할 인내의 모범 및 인내한 말씀 봉사자가 누릴 장래의 영광에 대해 제시한다. 원문에는 '기억하시오'에 해당하는 '므네모뉴에'(mnemoneue)가 문장 서두에 등장한다. 이 단어는 원래 '기억'을 뜻하는 명사 '므네메'(mneme)에서 파생하여 '기억하다', '마음에 간직하다' 라는 뜻을 지닌 '므네모뉴오'(mnemoneuo)의 현재 명령형으로서, 티모테오가 계속해서 기억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티모테오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오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 자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오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매우 간결하게 언급한다. 이것은 로마서 1장 3절과 4절에 언급된 것과 매우 유사한데, '초대 교회당시의 신앙 고백문'과 같은 것이다.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티모테오에게 전해 준 복음이요, 또한 그 요체로 다윗의 혈통에서 난 자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짧은 진술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활 및 승천 등이 압축되어 있다.
우선 '다윗의 후손'으로 번역된 '스페르마토스 다위드'(spermatos Dayid ; the son of David)는 '다윗의 씨' 란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한 진술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혈통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성왕으로 칭송되는 위대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란 사실을 함축한다(이사11,10).
나아가, 그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다. 여기서 '되살아 나셨다' 로 번역된 '에게게르메논'(egegermenon)은 '다시 살다' 곧 '부활하다' 라는 뜻을 지닌 '에게이로'(egeiro)의 현재 완료형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완료형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의 결과와 효력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코린토 전서 15장 4절, 12-20절에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에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 나시고, 현재 계속 살아계심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불려지고 확인되셨다(로마1,4). 그러므로 이러한 언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8절에서 말씀 봉사자가 본받아야 할 인내의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 바오로는, 이제 9절에서는 그 모범으로 자기 자신을 제시한다. 즉 바오로는 복음으로 인해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기까지 고통을 받았다. 여기서 '죄인'으로 번역된 '카쿠르고스'(kakurgos)는 '악'을 뜻하는 명사 '카콘'(kakon)과 '행하다' 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에르고'(erg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직역하면 '악을 행하는 자', '범죄자'(범인)에 해당된다.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적대자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이례적으로 예수님께 호감을 보이는 율법 학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모습도 그러하고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오늘 복음에서 생략된 구절]), 예수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습도 그러합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께서 이례적으로 율법 학자에게 보내는 찬사의 말씀도 듣게 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많은 율법 학자가 예수님을 불편하게 여기고 적개심을 보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분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촌뜨기 나자렛 사람이 감히 전문가들인 자기들 앞에서 율법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모습이 그들은 영 못마땅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교육을 결코 받았을 리 없는 자가 그토록 중요한 안식일 법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도무지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학자는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마주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비범함을 알아본 그는 율법 학자로서 평소 품고 있던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 질문은 당대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논의되던 주제였습니다.
따라서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한 셈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율법의 밑바탕에 놓인 핵심을 짚어 주시는 예수님의 대답에 그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수긍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결국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편견은 우리에게도 많습니다.
그 자체로 좋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일지라도 잘못된 선입견을 거치게 되면 나쁘고 추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다가가려면 먼저 그것을 가로막는 장막을 걷어 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찬사를 얻어 낸 율법 학자처럼, 그 장막을 과감히 걷어 낸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속한 좋고 귀한 것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복음(마르12,28ㄱㄷ~34)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3)
원래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은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우베콜 나프셰카 우베콜 메오데카'(bekol lebobka wubekol naphscheka wubekol meodeka)에서 3번이나 나오는 전치사 '뻬'(be)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 가지고'란 뜻이다.
또한 각각의 '뻬'(be)에 붙어 있는 '모든'이란 뜻의 '콜'(kol)은 수단이 될 수 있는 대상의 최상 혹은 최대의 상태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말 위에는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수단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사자의 것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입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목숨을 다하고 너희 최선의 힘을 가지고'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카르디아'(kardia)는 히브리어 '레바브'(lebab)를 번역한 단어인데, 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란 뜻이며, '마음을 다하고'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는 '너의 모든 중심을 다하여'라고 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된다(with all your heart).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知,意,情)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한마디로 '(한 사람의)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부분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진실하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psche; sou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셰카'(naphsheka)의 원형 '네페쉬'(nepesh)는 일반적으로 '영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뻬콜 나프셰카'(bekol naphscheka)는 '너의 온 영혼을 다해' (with all your soul)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정신'으로 번역된 '디아노이아'(dianoia; mind)는 신명기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영혼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 정신성과 정신력을 의미하기에 '목숨을 다하고'를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마태22,37참조)로 세분하여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코 복음 12장 33절에는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가 '생각을 다하고'로 대치되고 있다. 여기서 '생각'에 해당하는 '쉬네시스'(synesis; understanding)는 '지혜', '총명', '깨달은 것', '이해' 등으로 번역된다.전체적인 의미에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자기 영혼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한4,24).
끝으로 '힘'으로 번역된 '이스퀴스'(ischys; strength)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오데카'(meodeka)의 원형 '메오드'(meod)는 '넘치는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를 '힘'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with all your strength(might)>, '그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넘치는 활동력'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즉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관념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 등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은 각각으로도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표현을 중복시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태도와 그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우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본문의 이러한 표현을 볼 때,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 가운데 결코 자신의 것이라고 하느님 대전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되, '전심(全心), 전영(全靈), 전력(全力)'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을 향한 전인격적인 절대적 사랑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십계명의 첫 부분인 1~3계명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레위기 19장 18절의 인용으로서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자연적 결과로서의 둘째 계명인 이웃 사랑을 말하는데, 이것은 십계명의 4~10계명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의 연장선상에 두어 율법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웃'에 해당하는 '플레시온'(plesion; neighbour)은 인종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우리와 함께 살거나 혹은 우연히 만나는 사람까지도 모두 포함한다(루카10,25~37).
이제 이 두 가지 계명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 '번제물'에 해단하는 '홀로카우토마'(holokautoma; whole burnt offerings)는 '전부 불태우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홀로카우토오'(holokautoo)에서 유래된 명사이다.
그리고 '희생 제물'에 해당하는 '튀시온'(thysion; sacrifices)의 기본형 '튀시아'(thysia)는 '희생 제물' 또는 '제사'를 뜻한다. 여기서 '홀로카우토마'(holokautoma)는 번제를, '튀시아'(thysia)는 번제 이외의 다른 제사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사무엘 1권 15장 22절의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라고 사울을 책망하는 사무엘의 교훈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과 순종이 없는 형식적 제사와 제물은 하느님을 결코 기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026년 06월 04일 목요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이 사람은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 사두가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적대감을 가지는 대신 존중하며 경청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모습을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마르 12,28)라고 묘사합니다.
“듣고”, “보고”, “다가와”라는 동사를 잇따라 쓰며, 한 인간이 진리 앞에서 천천히 마음을 여는 장면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라삐들이 613개의 계명을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으로 나누어 논쟁하던 시대, 그는 율법 전체를 떠받치는 중심을 묻습니다.
무엇을 붙들어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지, 무엇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계명만으로 답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신명기 6장 4절의 고백을 꺼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라면, 사랑도 둘로 갈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 인간의 온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삶의 방향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 삶 전체를 돌려놓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가져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2,31).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인간을 향한 책임으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결국 형제적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이에 율법 학자는 더 나아가 이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12,33)라고 고백하며, 성전의 제도보다 더 깊고 넓은 곳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짚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12,34).
아직 문턱이지만, 이미 빛은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사랑은 그 빛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제도와 그 제도가 만들어 놓은 숱한 형식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율법은 제도와 사상과 규범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완성을 이루어 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사랑(信仰)의 出發點은 하느님이시다.
(마르12,28-34)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둘째는 이것이다. 병행복음- 마태33,39에도 ‘둘째도 *이와 같다’.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같은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야고2,8-9) 8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9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
= 인간의 사랑을 차별적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먼저 ‘차별이 없으시고 원수(죄인)까지 사랑하신, 그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죄인들을 위해 당신 외아들 예수를 속죄 제물로 내주신 하느님, 그 사랑을 알아야(받아야)한다. 그랬을 때 우리의 마음, 목숨, 정신, 힘을 다해 하느님을 나의 주님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사랑하는 것이다. 곧 우리 구원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는 것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한 계명인 것이다. 인간의 지각(知覺)으로 깨달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성령의 이끄심으로 깨달아, 내가 먼저 받고, 그 하늘의 사랑(아가페)을 이웃과 나누는 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시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나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 받기 위하여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하느님께서 흙 먼지로 손수 빚어 만드시고, 숨과 영을 불어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출발점,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상-
=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 흙의 먼지에 불과한 그 없음의 존재가 하느님의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된 것, 소중한 존재 맞다. 그러나 그 생명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 흙, 땅의 존재들을 하늘의 존재, 곧 당신의 영원한 자녀로 재창조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님을 이 흙(어둠)의 세상의 빛(생명)으로 보내신 것이다.
빛, 하늘의 존재 예수께서 어둠인 이 세상에 육을 입고 오심, 그 자체가 신의 죽음의 시작이다. 그 어둠, 그 없음의 존재들을 빛, 있음의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희생하신, 그것이 십자가의 희생, 대속, 죽음, 사랑인 것이다.
(요한1,9-12)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실 속죄 제물로 보내신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피(죽음)로 모든 죄,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하게 씻기게 하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히브10,10.22참조) 그 하느님의 뜻, 그분의 약속,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땅의 욕망으로 가득찬 나를 부인하는(비우는)것,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모르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사랑)의 출발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시작하심을 알아야 한다.(제가 말씀 묵상을 드리는 것이 여러분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 = 제사 행위보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기특한 말은 했다. 그러한 율법학자에게 아직 하느님 나라가 들어오지 못했다. 아직 사랑의 계명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죽으러 오신, 곧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그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명 하러 오신, 그래서 이웃인 율법학자 구원을 위해, 그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 번 제물과 희생 제사로 죽으러 오신 구원자 그리스도를 몰라보고 훌륭한 선생님 정도로 보고 있으니 그가 어찌 깨달았다고, 하느님 나라가 들어 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 하신 말씀은 “너는 아직 하느님 나라 밖에 있다” 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루가4,21)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마태12,28) 28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골로3,1-2) 1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게 해 주소서 의탁하나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저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종합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이 두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본성과도 같아 이겨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를 사랑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하는 사랑이 섞여 있습니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조차도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애(自己愛)와, 그로 말미암아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원죄’로 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일 수 없게 하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바로 원죄입니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47-48면 참조).
자기애를 이겨 내려면 끊임없이 하느님을 중심에 두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배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을 때 그 누구도 결코 도구화 되거나 소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향하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번째 계명이 자연스럽게 실현됩니다.
이러한 삶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는 인간은,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할 때 본모습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잘 돌보려면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시선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할 때,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