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1일 목요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나의 길 (루카13,31-35)
제1독서<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에페6,10-20)
10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11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12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13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14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16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18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
19 그리고 내가 입을 열면 말씀이 주어져 복음의 신비를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도 간구해 주십시오.
20 이 복음을 전하는 사절인 내가 비록 사슬에 매여 있어도, 말을 해야 할 때에 이 복음에 힘입어 담대해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화답송>시편144,1.2.9-10(◎1ㄱ)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
○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민족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 ◎
○ 하느님, 당신께 새로운 노래 부르오리다.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당신은 임금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종 다윗을 구하시나이다. ◎
복음<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루카13,31-35)
31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35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에페6,10~20)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대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12)
에페소서 6장 12절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hoti; for)로 시작된다. 따라서 6장 12절은 앞선 11절에 나오는 것, 즉 하느님의 백성들이 왜 하느님의 무기 <'전신갑주'(全身甲胄); the full armor of God>로 무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보여준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의 싸움이 연약한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하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투'에 해당하는 '팔레'(pale; wrestle; struggle; fighting)는 '진동하다', '던지다'라는 뜻의 동사 '팔로'(pallo)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이것은 단순한 씨름이 아니라 몸을 던져 맞붙어 겨루는 '레슬링'(wrestle) 혹은 생사(生死)를 가르는 치열한 '싸움'(fighting)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에 해당하는 '하이마 카이 사르카마'(haima kai sarka)는 '혈과 육'으로 번역되는데,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 자체를 가리킨다(히브2,14; 갈라1,16).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처럼 연약한 본성(성품과 감정)을 가진 동료 인간들을 싸움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인간들은 사랑의 대상이요 복음화의 대상이지,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
에페소서 6장 12절의 후반절은 '그러나'라는 뜻을 지닌 '알라'(alla; but)라는 접속사로 시작되는데, 상반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표현이 이이서 등장함을 나타낸다.
즉 '알라'(alla) 이하에 나오는 네 가지 존재들은 앞서 나온 연약한 존재를 가리키는 '인간'( 혈과 육)에 대조되는 존재로서, 모두 인간 세상에서는 그 형체를 볼 수 없는 악한 영들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이 네 가지 영적 존재들 앞에 전치사 '프로스'(pros; against)를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이 네 가지 존재들에 대해 각각 대항해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
먼저 '권세와 권력들'은 거의 함께 언급되는 관용어이다(콜로2,15).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아르케'(arche)는 '통치자'(the prinsipalities)라는 의미이며, '권력들'에 해당하는 '엑수시아'(eksusia)는 말 그대로 '권력'(the powers)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이 표현들은 영적 존재 중에서 특정 계급에 속한 영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반드시 악한 천사들만을 가리키지 않고 선한 천사들도 포함되는데, 여기서는 악한 천사들을 말한다.
또한 '권세와 권력들'은 위격적(位格的)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에페1,21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한편,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에 해당하는 '코스모크라토라스'(kosmokratoras)의 원형 '코스모크라토르'(kosmokrator)가 '세상'(마태5,14), '세계'를 뜻하는 '코스모스'(kosmos)와 '권력'(1베드5,11), '힘'(루카1,51)을 가리키는 '크라토스'(krat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세계의 지배자들'('세상의 주관자들'; the world rulers of this present darkness)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여기서 세상은 하느님을 불신하는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세상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어두움에 속한 세상이,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묘사하였다(요한1,4.5). 세상을 어두움에 속한 것으로 말한 것은 세상이 어두움의 세상 지배자(주관자)의 권세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하늘에 있는 악령들'(the spiritual hosts of wickedness in the heavenly places)은 영적인 세계에서 하느님을 대항하여 사탄의 편에 선 졸개들인 마귀들을 총칭하는 표현들이다.
이들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 묘사되는 사탄의 부하들로서, 세상에 대한 제한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당시 사람들이 영적 세력을 묘사하는데 사용한 이와 같은 용어로써, 하느님의 백성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 바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하수인인 마귀들임을 보여주고 있다.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에페소서’의 마지막 권고 단락입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들의 여정을 악의 세력과 전투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할 것을 주문합니다.
우리 몸에 갖추어야 할 무장을 조목조목 나열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갖출 요소들이 허리띠, 갑옷, 신발, 방패, 투구, 칼과 같이 당대에 실제로 쓰였던 전쟁 도구에 비유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허리띠는 허리 주변의 옷을 동여맴으로써 전투 과정에서 신속하고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가르침으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영적 전투에 참여할 태세를 갖춥니다.
하느님을 닮아 정의롭게 되려는 노력, 곧 일상에서 “의로움”을 실천하려는 자세는 악의 공격에서 우리 몸을 보호하는 갑옷을 입음에 비길 수 있습니다(이사 59,17 참조).
발에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라 함은 악한 세력의 방해에 굴복하지 말고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정을 언제나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니는 굳건한 “믿음”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 곧 악의 세력이 던지는 거센 유혹을 막아 내는 튼튼한 방패 구실을 합니다.
투구는 우리 몸에서 매우 중요한 부위인 머리를 보호하는 구실을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라” 함은(이사 59,17; 1테살 5,8 참조) 우리의 머릿속 모든 생각을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하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칼을 언급하시는데, 앞선 도구들이 방어하는 수단이었다면 칼은 공격에 쓰이는 도구입니다.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유일한 공격 수단은 성령의 칼로, 이는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을 통해서 마치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비장한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여정 안에서 상대해야 할 적은 매우 강한 세력들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죄악으로 유혹하며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간계를 꾸밉니다.
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진리와 의로움,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굳건한 믿음,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무장해야겠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3,31-35)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어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32ㄴ~34)
헤로데의 살해 음모를 전해들은 예수님께서는 헤로데에 대해 공식적으로 책망하시며, 루카 복음 13장 32절과 35절에서 헤로데가 당신의 사명을 막을 수 없음을 예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헤로데의 간교함 때문에 그를 '여우'라고 표현하신다. 아마도 루카 복음 13장 31절에서 바리사이들을 사주하거나 합세하여 예수님을 쫓아내기 위해 위협하는 자가 바로 헤로데라고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헤로데는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 (Herod Antipas; B.C.4~A.D.39)를 가리킨다.그는 한때 세례자 요한이 죽은 후 예수님을 보고 싶어한 적도 있었지만(루카9,7~9), 이제는 예수님의 선하신 행동과 명성에 부담을 느끼고서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13장 32절의 '오늘', '내일'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구속 사업을 완성하시는 때를 가리킨다. 그리고 13장 32절의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는 예수님의 전형적인 사목의 모습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한편, '마친다'에 해당하는 '텔레이우마이'(teleiumai; I will reach my goal; I shall be perfected)는 '텔레이오오'(teleioo)의 현재형으로서 여기서는 미래적 의미를 갖는다.말하자면, 미래에 반드시 성취될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결국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확실성을 보여 준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완성이 예루살렘에서의 죽음과 사흘 후의 부활로 성취될 것임을 예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그래서 루카 복음 13장 33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플렌'(plen; nevertheless; in any case)은 13장 32절의 후반부에서 말하고 있는 구속 사업의 완성에 앞서서, 반드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함을 가리킨다.또한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필연성을 묘사하기 위해 '~해야 한다'는 뜻의 동사 '데이'(dei; must)를 사용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고 번역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예루살렘에 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성부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인류 구속 사업을 완성하심으로써, 이 땅에 오신 당신의 사명을 성취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13장 33절에서 '예언자'에 해당하는 '프로페텐'(propheten; a prophet)은 단수인데,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한 많은 예언자들을 전제한 상태에서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일반적인 법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을 죽이기 때문에 예언자로서 예수님 역시 거기서 죽는 것이 타당하다는 당위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본다.'예루살렘아 ~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카 복음 13장 34절과 35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13장 31절~33절에 이어 당신 자신의 구속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대하고 죽이고 말 예루살렘의 멸망을 매우 애통스러운 어조로 예언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문장이 마태오 복음 23장 37절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책망하는 문맥에서 말하고 있고,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구속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말하고 있다.
13장 34절은 죄악으로 가득차서 심판을 눈앞에 둔 예루살렘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달해 줌과 동시에, 예수님 당신의 죽음에 대해 예루살렘 도성이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루살렘아'에 해당하는 '이에루살렘'(Ierusalem; O Jerusalem)은 예수님께서 도시를 마치 사람인 것처럼 의인화하여 표현하신 것이다.
이런 표현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대표적 표현이다.예수님께서는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면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고통을 보셨기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반복해서 부르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둥지 위를 맴도는 새들처럼 만군의 주님이 예루살렘을 지켜 주리라. 지키고 건져 주며 감싸고 구원해 주리라'(이사31,5)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가 둥지를 공격해 올 때, 어미새가 날개를 크게 벌려 그 새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께서 택하신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 본문의 주체는 예수님 자신이다. 육화(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환난에 처한 예루살렘을 실제로 보호하신 적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영원으로부터 선재(先在)하신 성자 하느님으로서 육화하시기 이전부터(요한1,1~4; 17,5) 예루살렘을 계속해서 보호해 오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본다.
여기서 '날개'로 번역된 '프테뤼가스'(pterygas; her wings)의 원형 '프테뤽스'(pteryks)는 '새의 날개'를 의미하며,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안전한 피난처와 보호의 그늘을 상징한다.
그리고 '암탉'으로 번역된 '오르니스'(ornis; a hen)는 '새'(bird)를 의미하는 단어이다.구약에서 이 두 단어는 모두 당신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시편17,8; 91,4; 이사31,5).
또한 '모으다'에 해당하는 '에피쉬나게이'(episynagei; gathers)는 현재 시제 동사인데, 이것은 어미새가 그 본성상 습관적으로 그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는 생태를 묘사한다.
하느님 역시 당신 백성들을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불문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보호하시는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여기서 '내가 ~ 하였던가?'로 번역된 '에텔레사'(ethelesa; I would; I have longed)의 원형 '텔로'(thelo)는 '원하다', '바라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로서 여기서는 직설법 부정과거로 쓰였다.이 동사는 여기서 부정사로 쓰인 '모으려고'에 해당하는 '에피쉬나가게인'(episynagagein; to gether)을 목적어로 받고 있다.
따라서 '에텔레사 에피쉬나가게인'(ethelesa episynagagein)은 '내가 모으는 것을 원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몇 번이나'에 해당하는 '포사키스'(posakis; how often)는 '얼마나 자주', '몇 번이나'라는 뜻을 지닌 부사로서, 여기서는 ‘상당히 자주'라는 의미를 강조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은 그 보호하심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더욱 가중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표현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고 예언자들을 통해 회개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하셨던 하느님의 실제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날도 변함없이 당신 백성들을 그 안전한 날개 아래 모으려고 애쓰신다.
2024년 10월 31일 목요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의 묵상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계속 가면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계속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루카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의 의미는 뚜렷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은 이미 죽음과 부활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도 그러한 맥락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며, 복음을 선포하시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아십니다.
헤로데가 교활하지만 막상 힘은 없어 여우와 같다고 하시면서도, 예언자가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은 여우 같은 헤로데 한 사람의 탓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예언자의 운명임을 받아들이십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박해와 거부를 피하여 도망가는 것이고,
제1독서에서도 나온 표현을 빌린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에페 6,19) 선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6,19-20 참조).
이 ‘담대함’은 드러내 놓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 비유를 쓰거나 모호하게 돌려 말하지 않고 숨김없이 밝히는 것,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뜻하며,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4,13.29.31 참조), 바오로(9,27.28 참조), 바오로와 바르나바(13,46; 14,3 참조) 등에게 적용됩니다.
특히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바오로가 로마에 잡혀가서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28,31)라고 말합니다.
죽음도 막지 못하는 담대함, 반대를 받는 것은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사도들도 망설임 없이 죽음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살아야 할 때, 우리에게도 이러한 담대함을 주시기를 청하여 봅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
2024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죽으셔야한다.
독서(에페6,10-11) 10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11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 악마의 유혹으로 만든 나의 강한 힘을 죽이라는 말씀이다. 곧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느님의 뜻, 말씀을 선악의 법으로 받아 지킨 그 자신을 하느님의 무기인 성령의 갈로, 진리의 말씀으로 부인시키는, 죽이는 영적전쟁을 하라는 것이다. 암 덩어리 같이 영혼을 죽이는 그 어둠의 힘을 잘라 내심으로 살리시려 하심이다.
복음(루카13,31-35)
31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마귀(뱀)의 유혹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의 법으로 먹어 심판으로 모두 죄인이라는 질병에 걸려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선악의 행위가 죄인임을 모르고 있다. (로마3,20 10,3)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밝히 드러내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 계약대로 그들의 죄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심으로 그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는 구원자 그리스도의 일, 곧 진리를 다 이루시는 마침이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예루살렘, 곧 율법에 의해 죽으셔야한다. (마태6,21)
율법, 그 선악의 옛 계약으로 드러난 모든 죄를 예수님 당신께서 대속으로 없애시고 하느님의 용서, 구원의 새 계약을 이루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율법, 그 옛 계약을 완성하여 치우셔야 했기 때문이다.(히브10,9)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 날개 밑으로 모으듯 - ‘라히프’
(창세1,2)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 감돌고 있었다. - ‘라하프’ 곧 비어있어 어둠인 땅을 하느님의 영이 감돌며 품어 생명을 주셨듯이, 예수님께서 죄인(땅)들을 품어 당신과 하나되어 살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 어둠, 곧 인간의 힘을 지키려 예수님 품안에 들지 않으면~
35 보라, 너희 집(율법의 성전, 신앙)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말씀)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 ‘복(바라크)’ - 창조(바라)에서 파생된 단어다. ‘나’- 예수님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진리, 하느님의 말슴이다.(요한1,1-5. 9-14 참조) 곧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 복(생명)이심을 깨달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요한14,9)
비어있어(처녀) 어둠인 땅, 쓴물(마리아)들이 말씀을 진리로 먹는 것, 받아 들이는 것이 복되신 예수를 잉태하는 것이며 그 예수로 복이 된다.
(루가1,42)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당신, 그 안에 반드시 내가 들어가야 한다.(묵시21,27) 복(바라크), 창조(바라), 복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복이 된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먼저 말씀을 받아(잉태) 예수(구원)를 깨닫고(낳고) 그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내 죄로 죽으시고 사흗날에 부활, 승천하시고 하느님 오른편(진리)에 앉으셨다가 다시 진리의 성령으로 오셔서 내 안에 함께 하심, 그것이 옛 것이 사라진 새로운 피조물, 새 것이 되는 이루심이다.
복(福)이신 예수님으로 마리아(쓴물)께서 은총(단물)이 가득하셨듯이 쓴물들인 우리(나)들도 예수님으로 단물(은총)이 가득한 하느님의 자녀(딸, 아들)가 된다.
곧 비어있는 땅의 본질인 어둠의 힘, 그래서 말씀을 율법, 선악의 법으로 받아 지킨 인간의 의(義), 욕망, 그 쓴물들이 그 쓴물에 빠지는 하나의 희생, 십자나무를 구원, 진리의 나무로 받아들여 단물이 된다. 그것이 하느님의 법규, 규정, 계명이다.(탈출15,23-26)
보호자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마음, 귀를 열어주시어 오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믿음으로 자라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