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수요일]나를 따라라(루카 9,57-62)

욥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며, 누가 그분과 겨루겠냐고 한다. (욥기 9,1-12.14-16)
욥이 친구들의 1 말을 받았다.
2 “물론 나도 그런 줄은 알고 있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3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
4 지혜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
누가 그분과 겨루어서 무사하리오?
5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산들을
옮기시고 분노하시어 그것들을 뒤엎으시는 분.
6 땅을 바닥째 뒤흔드시어 그 기둥들을 요동치게 하시는 분.
7 해에게 솟지 말라 명령하시고 별들을 봉해 버리시는 분.
8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
9 큰곰자리와 오리온자리, 묘성과 남녘의 별자리들을 만드신 분.
10 측량할 수 없는 위업들과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을 이루시는 분.
11 그분께서 내 앞을 지나가셔도 나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셔도 나는 그분을 알아채지 못하네.
12 그분께서 잡아채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누가 그분께 ‘왜 그러십니까?’ 할 수 있겠나?
14 그런데 내가 어찌 그분께 답변할 수 있으며 그분께 대꾸할 말을 고를 수
있겠나?
15 내가 의롭다 하여도 답변할 말이 없어 내 고소인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네.
16 내가 불러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해도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리라고는 믿지
않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시며,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다. (루카 9,57-62)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욥기9,1-12.14-16)
"그분께서 내 앞을 지나가셔도 나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셔도 나는 그분을 알아뵙지 못하네." (11)
앞선 5-10절은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우주적 주권과 위엄에 대한 욥의 고백이었다. 이제 11-14절에서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스런 재난과 관련해,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그분의 역사하심에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자신의 답답한 상황을 서술한다.
새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은 이 새로운 단락을 '보라' 란 뜻을 가진 감탄사 '헨'(hen)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헨'(hen)은 앞으로 말할 하느님의 절대 주권에 대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시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런데 '헨'(hen)은 문맥에 따라 '만일'(if)이란 조건 접속사로서의 역할도 한다.(욥기40,23 ; 이사54,15 ; 예레3,1 ; 다니2,5.6 ; 3,15.18)
본문의 '헨'은 이 두가지의 의미를 다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감안하면, 먼저 본절은 자신 앞에서 절대자이신 하느님이 무언가를 행하시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여기서 '그분께서 지나가셔도', '지나치셔도' 란 표현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루어진 모든 비극적인 일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즉 자신에게 이루어진 이 모든 재난의 원인이 하느님께 있으며, 거기에 특별한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나타내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만일' 의 의미도 포함된다. 즉 만일 하느님께서 자신의 앞을 지나가시며 지나치신다 해도, 자신은 그것을 감지할 수 없으며, 더 구체적으로 지금 자신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에 대해서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답답한 탄식의 말을 내뱉는 것이다.
이것은 본절에서 '나는 알아채지' 에 해당하는 '아빈'(abin)이 지닌 의미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단어의 원형인 '삔'(bin)은 '이해하다', '지각하다', '식별하다' 란 뜻을 지니며, '이해로 이끄는 분별력' 의 개념을 포함한다.
그래서 이 동사는 단순한 자료 수집을 넘어선 종합적이고 체계화된 '지식'(knowledge)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성경에서 대개 '알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동사는 '야다으'(yadah)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얻어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삔'(bin)은 이때 얻은 지식의 진위를 기리는 판단 능력과 예민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욥이 '삔'(bin)을 사용한 것은 그가 하느님의 자기 현현 곧 그분의 계시를 감지할 만한 판단 능력이 부족함을 고백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본문에서 욥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오셔서 그가 당한 고난에 대한 비밀을 계시하려고 하실지라도, 자신에게는 그 계시를 받아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한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욥이 하느님의 현현을 말하며, 그 계시에 관심을 두는 것은 자신이 왜 이같은 극심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음을 한탄하는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친구들 역시 욥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당시 욥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재산의 상실이나 육체적 고통, 더 나아가 친구들의 몰이해가 아니었다. 사실 욥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욥은 설혹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찾아오신다고 하더라도 깨달을 수 조차 없다는 표현을 통해, 자신에게 이러한 재난을 내리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이지 모르는 자신의 답답한 상황을 친구들 앞에 호소하며, 그들이 자신을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합당치 못함을 증거하고 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결혼을 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서원을 하고 수품을 받는 것은 하느님께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고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항구하게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에게서 얻지 못하는 것을 다른 무엇에서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불행을 맛보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는데 차마 한 가지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매달리다 둘 다를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는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할 것도 없고, 그저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걸으면 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자꾸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더더욱 되씹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일에 묶이면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가 중요합니다. 오늘 순간을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최선으로 다하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음에도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수품 때의 마음으로 기쁨이 넘쳐 나야 하지만 그 마음은 꼭 숨어버렸습니다. 저는 가시밭길을 걷기 원하지 않았고 세상의 것을 더 많이 즐기고 세상 것을 더 달콤해 했습니다. 또 거기에 끌려 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천상의 것을 더 찾는 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뻔뻔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있는 저에게 그래도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두 마음품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저는 당신밖에 없습니다.”하는 제 마음을 당신이 아오니 부족함을 꾸짖어 주시고 당신께 대한 한결 같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강복해 주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영원한 행복을 위한 선택과 몰입
- 기 프란치스코 신부 -
인생은 길입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집을 나서 귀가할 때까지 길을 걷지요. 그렇게 우리는 늘 길 위에 있습니다. 길은 의미와 정서를 발생시키고 만남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무대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살기 위해, 버리기 위해, 나를 찾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하기 위해 길을 걷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고 계십니다.
길 위의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만나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부르심에 응답하여 함께 걷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길이 어떤 길이며 왜 가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자발적으로 따르겠다고 했으나 어떤 길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9,57-58).
예수님께서 길을 걷다가 만난 사람 중에는 그분께서 부르시자 자기 일을 더 중요시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미루는 사람도 있었습니다(9,59-60). 또 따를 의지도 있고, 따르기 위해 애착을 두는 것들에서 떠날 의지도 확고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고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 얼마나 긴박한 일인지 알아차리고 못한 채 안일한 태도를 보인 사람도 만나셨습니다(9,61).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요?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않고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길이나 공연히 헛수고를 하며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 알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자꾸만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행복하게 길을 걸어야 할까요?
진정 행복을 원한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과는 달라야하지 않을까요? 눈에 보이는 것, 나만을 위한 만족을 찾는 자세를 버리고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가치 있는 것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와 소중한 것들을 추구하며,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하느님의 손길을 읽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가난의 길이요, 비움의 길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9,58) 예수님의 길, 곧 운명과 처지를 받아들여 그분과 함께 걸을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낭만적인 풍경도 아니요 일시적인 감각의 자극으로 맛보는 감상적 충족감도 아닙니다. 행복은 고통과 어둠을 겪어냄으로써 만나는 선물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버리고 떠나는 길입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하느님의 미래를 향해 과감히 자신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애착이 많아 버리지 못하고 생각과 행동이 묶여있다면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는 자유롭게 행복 자체이신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애착이 있는 길은 폐쇄되고 말 것입니다. 영(靈)의 숨결이 막혀버리지요.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내 인생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소중한 것을 위해 '즉각적으로' 찾아나서고 '뒤를 돌아봄 없이' 몰입하며 항구히 투신해야겠지요. 주님께서 먼저 부르셨든, 주님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시어 내가 자발적으로 따라나섰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사랑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을 선택하고 망설임없이 걸어갔으면 합니다. 거기에 참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