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금요일]그리스도 (루카가 9,18-22)
코헬렛은,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코헬 3,1-11)
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3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5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10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 (루카가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코헬렛3,1-1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1-2)
태양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태양 위의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허무 극복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본서는 네 가지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제1설교인 1장 12절-3장 22절은 태양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를 제시하는 1장 12절-2장 23절과 극복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2장 24절-3장 22절로 나누어진다.
3장 1절이하 15절까지는 허무의 극복 가능성을 제시하는 부분의 두번째 단락으로서 태양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의지함으로써, 태양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가 극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3장 1절 이하 15절까지는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신본주의적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2장 24절-26절 부분과 내용면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장 24절에서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나는 보았다" 라고 하면서 인간의 즐거움이 하느님의 손에서 나오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본 단락에서는 모든 일에 때와 시기가 있고, 하느님께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시고 인간에게 영원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신, 영원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는 삶이, 인생의 절대 허무를 극복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 중에서 1절이하 8절에서 설교자는 먼저 반복과 열거를 통하여, 모든 것의 기한과 목적이 이루어지는 때를 정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예증한다. 그리고 서두에 나오는 1절은 2-8절에 전개된 인간의 만사가 정해진 때가 있음을 다루는 반어법의 대구 구문들의 서론적 성격을 갖는다.
원문은 '모든 것에는'(to everything)에 해당하는 '락콜'(lakkol)로 시작된다. 본서에 91회나 사용된 이 용어는 하느님의 창조 세계의 모든 일을 가리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2-9절 내용과 관련지어 볼 때, 인간사에서 하느님의 뜻과 섭리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일, 총체적인 현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2-8절에 나오는 일곱 구절로 된 14쌍의 구체적인 진술은 사람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것을 묘사한 것으로 '락콜'(lakkol)이란 한 단어로 표현된다.
또한 설교가는 '모든 것에는' 라는 말을 앞세움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을 하느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강조적으로 드러낸다. 즉 이것은 피조물로서의 겸손과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단어는 '시기가 있고 ~(이룰) 때가 있다' 에 해당하는 '제만 웨에트'(zeman weeth)이다. 이것은 삶의 모든 양상이 시간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시기'(기한)란 의미로 사용된 '제만'(zeman ; season)이나 '때'란 의미로 사용된 '에트'(eth ; time)는 모두 '시간', '기회'를 표현하는 동의적 표현이다.
여기서 전자는 '기한'의 의미가 강하고, 후자는 '시점'의 의미가 강한 단어로 볼 수 있으며, 성경에서 두 단어의 연결이 흔히 나타난다.(다니7,12 ; 사도1,7 ; 1테살5,1) 희랍어 구약 성경인 70인역(LXX)에서는 전자를 '크로노스'(chronos)로 번역하고, 후자를 '카이로스'(kairos)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전자를 일반적인 기한을 말하는 것으로, 후자를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경험적인 어떤 순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는 때에는,그 섭리를 성취시키기 위한 시간의 질서가 있다..
한편 설교가는 어떤 특정한 시점으로서의 '때'를 모든 일(목적)을 이루시는 것과 관련시킨다. 여기서 '일에는' 에 해당하는 '헤페츠'(hephets ; purpose)는 '모든' 이란 의미의 '콜'(kol)과 함께 사용되어 '이루어지면 즐겁겠다고 여겨지는 모든 소원' 이란 의미를 전달한다.
특히 설교가는 하느님의 허락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정해진 때가 있음을 말하기 위하여 '헤페츠'(hephets)와 더불어 '콜'(kol)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일들과 모든 소원들이 하느님의 섭리하게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설교가는 2-8절에서 이 모든 것에 포함되는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그 모든 일들이 각각 이루어지는 때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다만 사람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에 그 정해 놓으신 사건을 경험하게 될 뿐이다. 이처럼 사람은 현재만을 보고 알게 되므로, 자기 운명을 미리 알고자 하거나 거기서 탈출하려는 노력 따위는 허무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2)
앞선 1절에서 설교가는 하느님 섭리의 엄정성을 제시한 바 있다. 이제 본절이하 8절에서 설교가는 7의 배수인 14쌍의 각각 반대되는 일들을 대조시킴으로써 인간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하느님의 완전하신 섭리를 부각시킨다.
여기서 일곱의 배수가 사용된 것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기간과도 관련되는 일곱을 총체성이나 완전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레위16,15.19 ; 즈카4,10)
그리고 '둘'은 법정에서 증언을 확증하는 증인의 숫자이기도 하며, 사실이 확정적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수이기도 하다.(탈출31,18 ; 신명17,6)
여기서는 모든 일이 확정적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달려 있음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이러한 반복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설교가는 여기서 이 세상과 인간의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씩 짝을 지어 제시하면서,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에 달려 있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전하고 있다.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복음(루카9,18~22)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루카 복음 9장 18절부터 21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베드로의 최초의 신앙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 16장 13~20절과 마르코 복음 8장 27~30절과 병행을 이루는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제3차 갈릴래아 활동의 후반부를 새롭게 여는 역할을 한다.
제3차 갈릴래아 활동의 후반부의 특징은 앞에서의 활동의 주요 대상이 다수의 군중들이었다면, 이제 소수의 제자들에게로 옮겨간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을 약 1년 정도 남겨 놓은 시점에서 제자들의 훈련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혼자 기도하였고, 후에 제자들이 기도를 끝내신 예수님과 함께 합류하게 되었을 때에, 중요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신다.
루카 복음 9장 18절에서 '군중'에 해당하는 '호이 오클로이'(hoi ochloi; the eople;
the crowds), 즉 '무리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이 질문의 의도는 그 답변의 형태로 보아 지금까지 당신의 능력을 지켜보아 온 사람들의 칭송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의 고백과 제자들의 고백을 확실히 구분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에 해당하는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이'(hymeis de tina me legete einai; who do you say I am?')에서 '그러면'으로 번역된 '데'(de; but)라는 접속사와 '너희'를 의미하는 '휘메이스' (hymeis)를 문장의 맨 앞에 위치시킨 것에 주목을 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제 내가 중요한 것을 묻겠다. 그렇다면 바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다.
루카 복음 9장 19절의 '어떤 이들'에 해당하는 '알로이'(alloi; some; others)의 수군거림과 구분되는 제자들 자신의 진실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한다.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이 가장 자세하게 원형에 가깝고, 마르코 복음 8장 29절은 주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특히 강조했다.
반면에 루카 복음 9장 20절의 '톤 크리스톤 투 테우'(Ton Christon tu theu; The Christ of God)에서 희랍어의 속격 형태인 '투 테우'(tu theu;'하느님의')는 다양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고, 한글의 문법 형태에는 없는 것으로, 라틴어 문법에서 독립적으로 취급하는 제5격에 해당하는 '탈격'(the Ablative)의 의미로서
'~로 부터' 또는 '~로 말미암은'이라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하느님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크리스톤'(Christon)의 원형 '크리스토스'(Christos)는 '기름을 붓다'를 뜻하는 '크리오'(chrio)라는 동사에서 명사의 형태로 굳어진 단어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나타내므로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또한 '크리스토스'(christos),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명칭은 유대 전통에서는 임금, 예언자, 사제를 가리키지만, 이 문맥에서는 특히 위임받은 임금(왕)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사실은 이 단어가 70인역(LXX)에서 '톤 크리스톤 퀴리우'(ton christon Kyriu) 라는 표현으로 임금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2사무1,14).
그리고 당시 메시야 사상에 있어서도 메시야는 예언자인 동시에 사제라는 사실을 거부하지 않지만, 특히 다윗 왕국의 영화를 재건하는 임금의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 온 세상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적 권위에 대한 절대적 타당성을 부여하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베드로, 바오로, 마리아, 데레사 등등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다.
우리 믿는 자들도 루카 복음 9장 19절에 나오듯이 다른 사람들의 신앙 증거라는
간접적 지식만을 가졌지, 정작 자신 안에는 아무런 신앙 고백이 없는 경우가 있다.
또한 루카 복음 9장 19절의 군중들의 반응에서 대단한 인물들이 죽음을 물리치고 다시 살아났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신앙 증거보다 더 크고 충격적인 무언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9장 20절의 질문을 통해 제자들의 이러한 의존적 신앙을 올바르게 붙잡아 주시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의 입으로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신앙을 세울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를 원하신 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은 '역사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원과 정체 의식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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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분명하게 대답하지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른다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평화와 생명이 넘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체험하고, 평화와 생명을 얻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변하려면 먼저 내 안에 깃든 온갖 종류의 어두움과 악의 기운, 이기심들을 없애야 합니다. 반면 생명의 기운, 선한 마음, 남을 위하는 마음들을 살려야 하지요. 미래에 대한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고, 증오와 의심을 사랑과 신뢰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놀라운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새롭게 보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바로 ‘나’부터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변화되면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직장과 사회마저 서서히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라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내 생활에서 얼마만큼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뜻에 맞도록 변화하고자,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