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제25주간목요일]소문 (루카9,7~9)

2018. 9. 27. 오전 5: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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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제25주간목요일]소문 (루카9,7~9)

코헬렛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하고 말한다. (코헬 1,2-11)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 (루카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코헬렛1,2-11)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2)

 

코헬렛은 질고에 휩싸인 인간의 구원이라는 성경 본래의 근본 주제를 태양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와 그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설파한 책이다. 

본서에는 인생의 허무그 극복에 대한 문제가 크게는 세 부분에서 거론되고 있다.

본문 부분인 1장 12절에서 12장 7절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네 가지 주제로 다룬다.

그리고 이러한 본론 부분의 전후에 서론(1장 1절~11절)결론(12장 8~14절)부분이 있다.


코헬렛 1장 1절은 표제로서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라고 시작한다.

원문은 이러한 표제가 '코헬렛(코헬레트)의 말'(the words of preacher)번역된 '띠브레 코헬레트'(dibre qohelleth)로 시작된다. 

구약 성경의 각권의 이름은 때때로 첫 부분에 나오는 단어로 정해지는데, 본서도 그렇다.

즉 히브리어 성경의 본서 제목이 '코헬렛'(코헬레트) 이다.


본서의 영역본 이름인 'ecclesiates'70인역(lxx; 구약 성경의 희랍어 번역본)에서 사용한 본서의 제목인 '엑클레시아스테스'(ekklesiastes)에서 나온 것인데, 이 역시 본문에서 '설교자'(전도자)에 해당하는 '코헬렛'(코헬레트)의 번역이다.


'엑클레시아스테스''모임'(히브2,12),'집회'(사도19,32)라는 뜻을 가진 '엑클레시아'(ekkleisia)에서 유래하였다. 

'코헬렛'(코헬레트)'설교자'라는 의미로 수정되는 '엑클레시아스테스'로 번역한 것은 각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희랍어의 어원으로 볼 때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허무로다. 허무!' (habel haballim; '하벨 하발림')


'코헬렛이 말한다' 라는 문장 앞에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허무로다. 허무'를 서두에 배치하여 강조하는 것은 '허무로다'에 해당하는 '하벨'(habel)의 원형인 '헤벨'(hebel)이 나타내는 개념을 강렬하게 표현하고자 함이다.

'헤벨'(hebel)은 본래 '증기'(vapor),'호흡'(breath)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유래하여 '실체가 없는', '덧없음', '허무함',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함' 등을 표현하는 단어로, 인간 존재의 헛됨과 인생의 무상함(욥기7,16),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는 우상의 무능함과 무익함(신명32,36; 1열왕16,13)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희랍어 70인역(lxx)에서는 '허무'(vanity)를 의미하는 '마타이오테스'(mataiotes)로, 라틴어 vulgata에서는 '바니타스'(vanitas)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것을 'vanity'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부조리', '불합리함'을 표함하여 인간의 삶의 총체적 허무기술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본절(2절)에는 '헤벨'(hebel)을 원형으로 하는 단어가 단수로 세 번, 복수로 두 번, 도합 다섯 번 사용되었다. 

본문의 '허무로다'에 해당하는 '하벨' '헤벨'의 연계형이고, '허무'에 해당하는 '하발림''헤벨'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vanity of vanities)이 된다. 이러한 구조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최상급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창세기 9장 25절에서 '종들의 종'으로 번역된 '에베드 아바딤'(ebed abadim)'가장 천한 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본문은 최상급의 표현으로 상대적인 허무나 헛됨이 아닌 절대적 의미에서의 허무와 헛됨을 표현하고 있다.


태양 아래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이 직면하고 있는 바, 어떤 방법으로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허무와 헛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본질적 허무함에 대한 진술과 고백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도 반복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역경 속에 있었던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저는 싫습니다. 제가 영원히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살 날은 한낱 입김일 뿐 입니다" (욥기7,16) 라고 절규했다. 바로 이 욥의 고백에서 '입김'에 해당하는 단어가 '헤벨'(hebel)이다.


또한 다윗은 범죄로 인한 하느님의 징계로 그 모든 영화로움을 잃게 되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 형편을 묘사하며, "당신께서는 죗값으로 인간을 벌하시어 좀 벌레처럼 그의 보배를 사그라뜨리시니 사람은 모두 한낱 입김일 따름입니다" (시편39,12) 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입김일 따름입니다'로 번역된 표현 역시 '헤벨'(hebel)이다.


이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인생 자체를 숨결보다 가벼운 것으로(시편62,10),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시편144,4), 잠깐 나타났나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안개)(야고4,14)로 묘사하며 그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욥이 고백한 인생에 대한 비관적 선언이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다윗의 고백은 범죄하는 인간의 실존을 직시하고 그 허무함과 무의미함 등을 절감한 이후 내뱉은 고백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고백된 '헤벨'(hebel)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토로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드러나는 설교자의 진술은 인생의 모든 것들을 누린 자에게서 나온다는 점에서 더욱 더 절망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쾌락과 즐거움, 그리고 모든 부귀 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인생을 정리하며 얻은 체험적 결론이기에, 본문의 진술은 더욱 더 충격적이며어떤 인간도 이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염세주의나 비관론자의 푸념으로 매도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하지 못한 것들을 지향하는 인간의 온갖 자의적 수고와 하느님을 떠나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인생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직시한 것에 따른 것이다.

결국 하느님 안에서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만 인생이 참된 의미를 가진다는 긍정적 결론을 위한 신앙적 실존에 근거한 방법론적(기술적) 염세주의라 할 수 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habel haballim hakkol habel; '하벨 하발림 학콜 하벨')


'허무로다. 허무'에 해당하는 '하벨 하발림'(habel haballim)본절 서두에 이미 기술되었으나 후반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문장 서두에 언급된 표현이 다시 반복되어 인간의 삶의 헛됨을 보다 강렬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이 허무로다'로 번역된 '학콜 하벨'(hakkol habel)을 덧붙여 태양 아래 모든 것이 헛됨을 더욱 강조하여 드러내고 있다.

'모든 것이'에 해당하는 '학콜'(hakkol)'모든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명사 '콜'(kol)과 정관사 '하'(ha)가 결합된 형태이다.

따라서 '학콜 하벨''그 모든 것이 헛되도다'(the whole is vanity)로 번역될 수 있다.


본절에서 '학콜 하벨' 선행하여 '헤벨'(habel)을 원형으로 하는 단어가 네 번 사용되었다. 이 네 개의 단어는 동일한 형태로 두 개의 어구를 형성하여 감탄의 의미 전달한다.

그런데 태양 아래 인간의 삶의 헛됨을 탄식하는 이 표현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본문의 '학콜 하벨'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주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바로 '그 모든 것'이다.  

여기서 '그 모든 것'이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세상과 인생 의미한다.


결국 솔로몬은 단수, 복수로 제시된 허무에 해당하는 표현을 거듭 사용하여 진한 탄식을 내뱉은 후에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것'을 주어로 제시함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바라는 독자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도무지 아무런 희망과 참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인간의 비극적 실존을 강렬하게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1장 3절에 그 허무의 범위를 '태양 아래에서'제시하듯, '그 모든 것'의 영역에는 하느님과, 하느님과 궁극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대상이 제외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9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불러 갈릴래아 여러 고을로 파견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열두 제자들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어서 그들의 복음 선포는 많은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그 당시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통치하던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 (b.c.4~a.d.39)에게 까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미치면서, 헤로데 안티파스 영주는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모른다'풍문으로 인해 예수님을 한번 보고 싶어 한다.


여기서 '영주' 해당하는 '테트라르케스'(tetrarches; tetrarch; the fourth-chief)분봉왕으로서 4분 영주(고대 로마의 한 주(州)의 4분의 1을 다스린 영주)나 작은 나라의 왕을 말한다.

헤로데 대왕이 10명의 부인이 있어서 자신의 배다른 왕자들에게 이스라엘의통치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루카 복음 사가는 9장 7~9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복음 선포가 왕궁 안에서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두루 퍼져 나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한다.

동시에 그 당시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면, 먼저 엘리야 예언자나 다른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 온다는 사상이 퍼져 있으므로,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께 대해서 이러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자신이 예전에 죽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복 동기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세례자 요한의 진언 때문에 그를 죽였으므로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일말의 양심이 있어 불안해졌고, 그래서 더욱더 예수님을 확인하고 싶어했다고 본다.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어느 순간에 생겼다가 또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재물도 명예도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코헬렛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겪게 되는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은 이런 무상하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에, 그 앞날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가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불안에 떱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고, 병을 낫게 해 주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소문은 꼬리를 뭅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헤로데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호기심에 못 이겨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는 결코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면 나도 믿겠다.”라는 식의 말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헤로데처럼 결코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지요. 예수님께서 붙잡혀 빌라도에게 넘겨졌을 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징이라도 보려고 이것저것 캐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루카 23,9 참조). 예수님과 참된 만남을 이루려면 믿음으로 다가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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