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화요일]일어나라 (루카 7,11-17)

2018. 9. 18. 오전 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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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간 화요일]일어나라 (루카 7,11-17)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고 한다. (1코린 12,12-14.27-31ㄱ)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내시자, 사람들은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며 하느님을 찬양한다. (루카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1코린12,12-14.27-31ㄱ)


"하느님께서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 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 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8)


코린토 전서 12장 12-27절에서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한 교회의 유기체적 일치성과 다양성에 대해 교훈한 바오로는, 이제 28절-31절까지는 다양한 은사에 따른 교회의 공적, 봉사적 직무들을 소개하고, 더욱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는 권면을 준다.(에페4,11)

 

한편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본절 서두에 등위절을 이끄는 접속사 '카이'(kai)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더욱이' 란 말을 첨가해 번역하는 것이 문맥의 흐름에 부합한다. 그럴 경우 본절 28절이 27절과의 관련성 속에서 다양한 은사에 따른 교회의 공적 직무들을 소개한다는 점이 보다 잘 드러나게 된다.

 

바오로는 27절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라고 언급하며, 성도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각 성도는 몸의 지체임을 은유적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 이라고 언급하며, 앞에 서술한 '그리스도의 몸' 바로 '교회'(ekklesia ;에클레시아)를 의미함을 직접적으로 밝힌다.

 

이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공적인 직무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사도들 ; '사도'로 번역된 '아포스톨루스'(apostolus)는 본래 '보내다' 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파생한 명사로,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에 동참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의 위임을 맡은 사람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 증인들을 말한다.(사도1,21-22)  초대 교회 당시 이 칭호는 주로 12제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직분을 직접 위임받았기 때문이다.(루카6,13) 

그러나 본서 저자인 바오로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도였다. 따라서 바오로는 복음을 전파하고 변호하는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의심하고  공박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갈라1,1.11-24)


② 예언자들 ; '예언자'로 번역된 '프로페타스'(prophetas)'대변자', '대리자'를 뜻하는 말로,  사람들 앞에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들 이란 뜻이다. 이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받은 말씀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정해진 곳,  정해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예'자는 '미리 예'(豫) 가 아니라 '맡길 예'(預) 이며,  전하는 내용은 과거, 현재, 미래를 총망라한 것들이다. 이들은 각 지역 교회에서 사도들에 의해 권위를 위임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앙의 자리로 이끌던 사람들이다.(1코린14,24.25) 코린토 전서 12장 8,9절에 제시된 은사 목록 가운데서 이들은 예언의 은사를 지닌 이들을 지칭한다.


③ 교사들 ;  '교사' 로 번역된 '디다스칼루스'(didaskalus)는 구약 성경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설명하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전승된 그리스도교의 교훈을 가르치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이렇게 제시된 사도와 예언자, 그리고 교사들은 주로 말씀의 봉사를 담당하던 자들로서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는 일에 관계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제시되는 봉사는 은사 자체가 부각되는 일들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기적의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는 <치유의 은사>, 여러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는 <기도의 은사>에 관한 <피앗 사랑> 카페 화면에 공지된 <성령께서 주시는 9가지 봉사> 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어 나오는 '도와주는 은사'로 번역된 '안틸렘프세이스'(antillempseis)높은 권력자로부터 받는 보호나 원조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종류의 도움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마도 초대 교회의 주요한 임무, 즉 교회의 보조로 궁핍한 자를 돌보는 청지기(집사)들의 역할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지도하는 은사'로 번역된 '퀴베르네세이스'(kyberneseis)'배를  조정하는 조타수' 라는 의미로서 배가 항해하기에 위험한 모래톱 해안을 통과할 수 있도록 조종해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는 공적으로 교회 일을 관장하는 본당 신부와 그의 사목을 협력하는 사목 협의회의 임무를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로마12,8), 그 당시 젊은 사람들 및 여자들도 이 은사를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본절의 기술 순서 및 뉘앙스로는 ④ 기적의 은사, ⑤ 치유의 은사, ⑥ 도와주는 은사, ⑦ 지도하는 은사, ⑧ 여러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기도의 은사는 사도들이나 예언자들, 교사들이 행하는 말씀의 봉사와 비교해 볼때 이차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은사 자체가 중심적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로마서 12장 6절-8절까지의 은사 목록을 감안할 경우, 이 또한 교회 내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는 귀중한 은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제기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바오로는 어떤 의도로 이러한 세 가지 은사와 다섯 가지 은사를 구별하고 있는것일까? 그것은 코린토 교회가 가장 우월시했던 여러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은사 목록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을 통해서 암시받을 수 있다.

여기서 바오로는 교회의 건설과 성장에 유용한 것이 황홀경이나 무아경에 빠져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나 기타 외적으로 두드러지는 능력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오히려 사도들이나 예언자들, 그리고 교사들이 행하는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가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간다는 사실을 암시하고자 한 것이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31)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그러나'(but)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접속사 '데'(de)로 시작하는 문장임을 알아야 한다. 본절에서 '더 큰 은사'로 번역된 '타 카리스마타 타 메이조나'(ta charismata ta meizona ; the greater gift)는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더욱 탁월한 은사' 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은사에도 서열이 있고, 우월과 열등감이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본절은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며, 하느님께서 교회의 선의를 위해 봉사하라고 주신 최상의 은혜라는 바오로의 주장과 모순을 이루고 있는 내용인가?


그렇지 않고, 당시 코린토 교인들이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은사를 탁월한 은사와 열등한 은사로 나누었기 때문에, 바오로는 여기서 '탁월한 은사' 라는 그들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들의 왜곡된 생각을 수정하고자 했던 것 뿐이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라는 바오로의 충고가 합당한 것은, 바오로가 교회의 유익(선익)적 차원에서, 개인적 차원의 은사요,  비교적 낮은 차원의 은사인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코린토 교인들은 가장 높이 평가하고 좋아했기 때문이다.(1코린13,1)


코린토 교인들이 더욱 열렬히 구하고 좋아해야 할 것은외적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신령한 언어의 은사' 보다, 교회의 영신적 선익과 덕을 세우는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로 드러나는 '말씀의 은사'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라는 바오로의 명령은 나열된 은사의 가치를 '교회의 건설과 성장과 유익'이라는 차원에서 판단하고, 또한 그러한 기준 하에서 더욱 큰 은사를 좋아하고 구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신령한 언어의 기도 은사'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 공동체의 영신적 선익의 차원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가톨릭 교회안의 성령 운동이나 성령 기도회에서 은사를 다룰 때, 참고해야 할 말씀이다.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7,11-17)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3~14)


루카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직접 예수님께 대해 '주님', 곧 '퀴리오스'(kyrios)를 사용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그 전에 사용된 '퀴리오스'(kyrios)다른 이들의 고백이나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사용한(루카6,5) 것들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 7장 11~17절에 이르는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그전까지 행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절정에 달한 것이며,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처음으로 '퀴리오스'(kyrios)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주권자요,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분임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여기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he had compassion)의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번역은 '그의 마음이 동정으로 흔들렸다', '가슴앓이를 했다'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한 과부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 과부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7장 13절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진 예수님께서 과부로서의 고달픈 삶을 살아온 한 여인이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뼛속 깊이 동감하시고 계시는 장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사건루카 복음에만 나오는데, 루카 복음사가는 이것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2위 천주 성자이심과 동시에 불완전하며 연약한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친히 겪고 이해하실 분이심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회당장 아이로의 딸이나 라자로의 소생 사건에서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단 하나의 희망이었던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과부를 보시며, 창자까지 뒤틀려질 정도로 깊게 공감하시며 먼저 다가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의 인간적인 감정, 특히 소외되고 불쌍한 자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인간애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관에 손을 대시자'


상여를 멘 자들이나 과부가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몸소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가셨다. 그리고 죽은 젊은이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에 손을 대셨다. 하지만 유대인의 정결법에 있어서, 죽은 시체나 무덤 또는 주검에 관계된 것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다(레위22,4; 민수19,11.16).


유대인의 관념으로는,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에 죽은 이에게 손을 대는 것 자체만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소 그 부정한 것에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기에 딱하고 안쓰럽게 여기신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미 율법에 대하여 초월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말의 '관'시체가 들어있는 사방이 닫혀 있는 나무 상자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에 해당하는 '소루'(soru; bier; coffin)의 원형 '소로스'(soros)시체를 지탱하는 '들것'(bier)이나 작은 버들가지로 만든 뚜껑이 없는 '위가 뚫린 관'(open coffin)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을 때 사람이 따로 관 뚜껑을 열 필요가 없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4)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12절에 '죽은 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는 '테트네코스' (tethnekos)라는 완료 분사로 쓰인 이미 '죽은 이'와 이야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이미 죽은 시체를 향해 '젊은이야'(네아니스케; neaniske; young man)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시체를 향해 '너에게'('소이'; soi; to you), 곧 살아있는 인격체에게 쓰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 죽은 이에게까지도 생명의 주님의 되신 예수님의 말씀의 신적 능력이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017년 9월 19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한 청년의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외아들을 잃은 홀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시어 관에 손을 대고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 한마디 말씀에 죽었던 젊은이가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얼마나 측은히 여기시는지 잘 알게 해 줍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어려움에 놓인 사람이나 좌절에 빠진 사람들의 아픔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현실 세계에서 이미 구원의 의미를 느끼도록 해 주셨지요. 구원은 이 현세에서 시작되어 초월적 생명을 얻음으로써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배고픈 이들과는 먹을 것을 함께 나누며, 아픈 이들은 낫게 해 주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정의롭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실 내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관심에 더 익숙해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일깨우십니다. “일어나라, 무관심과 무표정에서 깨어 일어나라.”

따라서 이웃들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힘이 되도록 그들의 구체적인 아픔에 다가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가엾은 마음으로 다가가 생명을 불어넣는 손길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 성문 가까이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메고 나오는 것을 보십니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힘겹게 살아온 그녀에게 하나 뿐인 아들은 ‘희망’ 자체였을 것입니다. 외아들의 죽음은 희망을 절망으로 바꿔버렸고, 깊이를 모르는 슬픔과 고통은 삶의 의지마저 꺾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십니다. 그렇게 자비이신 하느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슬픔에 다가오시어 울음을 멈추게 해주십니다. 이어 그분께서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십니다." 생명이신 분께서 죽음으로 다가가시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십니다. 

생명이신 분께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죽은 이를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생명이신 분께서 죽음의 터를 생명으로 바꾸시고,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그 과부가 잃어버린 희망을 되돌려주고, 생명을 되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죽은 외아들은 생명을 되찾고, 과부는 슬픔의 늪을 벗어나 희망의 정원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죽음의 행렬에 함께 하던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제 주님께서 살아 움직이시는 삶의 터로 되돌아갑니다. 

모였던 군중 가운데 누구 하나 반문하거나 의문을 품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로써 죽은 자를 살리는 하느님의 권능이 예수의 인격 안에서 명확히 드러났고, 그 소식은 삽시간에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갑니다.”(7,17) 슬픔도 죽음도 모두 사라지고 기쁨과 생명이 온 세상, 모두에게 퍼져나간 것이지요. 

누구나 살아가면서 고통을 겪고 절망하기도 하며,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세상의 부조리와 아무리 봐도 악인들이 더 잘 사는 것 같아 좌절하고 분노하기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경험하며 신앙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픔과 고통, 죽음, 불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늘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를 눈여겨보시고, 우리 삶에 개입하시어 슬픔과 절망을 멈추게 해주시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주십니다. 죽음보다 더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생명의 몸짓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엾은 마음을 지니고, 사랑과 생명을 되돌리기 위해 움직여야겠지요. 그렇게 할 때 그 누구의 죽음, 슬픔과 고통도 나와 무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외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진 과부와 함께 했던 제자들과 나인 고을의 사람들처럼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가엾은 마음을 지니고 서로에게 다가가 고통과 슬픔을 멈추게 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주며, 죽음 가운데서 생명을 호흡할 수 있도록 함께하는 ‘거룩한 공생’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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