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먹보요 술꾼 (루카 7,31-35)

2018. 9. 19. 오전 7:4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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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먹보요 술꾼 (루카 7,31-35)


바오로 사도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이라고 한다. (1코린12,31─13,13)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한다고 하신다. (루카 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1코린12,31-13,13)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2)


코린토 전서 12장 11절과 12절은 10절의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에 대한 예언이며, <사랑의 영원성> 에 대한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주어진 구절이다. 본절에서 바오로는 '지금은'(arti ; 아르티)'그때'(tote ; 토테)란 상반된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를 통해, <은사의 현재성>과 대비되는 <사랑의 영원성>을 매우 명확하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코린토 교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적 실존>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체험하게 될 <미래적 실존> 사이에는 분명히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거울의 비유를 통해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거울'로 번역된 '에솦트루'(esoptru)의 원형 '에솦트론'(esoptron)'~안에' 란 뜻의 전치사 '에이스'(eis)와  '보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옵타노마이'(optanomai)의 합성어에서 파생하며, '안에 보이는 것' 이란 문자적 뜻을 가진다.


이것은 오늘날의 유리와 수은으로 만든 거울(mirror ; glass)과는 달리, 청동에 광을 낸 거울을 뜻한다. 이것은 코린토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이었으나 고가품이었으므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거울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코린토 지방의 거울이 다른 지방의 거울보다 질이 좋은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것 역시 오늘날과 같이 잘 비치는 거울이 아니었다. 따라서 거울이 희미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식적인 지적일 뿐이다.


'희미하다', '어렴풋하다' 라고 번역된 '아이니그마티'(ainigmati)의 원형 '아이니그마'(ainigma)에서, '수수께끼', '불가사의한 일' 을 뜻하는 '에니그마'(enigma)라는 말이 파생되었다는 것은 당시에 거울을 보는 것이 얼마나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반면에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다' 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때에는 완전하게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2코린5,7) 이러한 비유의 결론으로서, 바오로가 현재는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과 같이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 알지만' 으로 번역된 '기노스코'(ginosko)현재형인 반면에,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로 번역된 '에피그노소마이'(epignosomai)는 생각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i)와 '기노스코'(ginosko)의 합성어인 '에피기노스코'(epiginosko)부정(不定) 과거형이다. 여기서 접두어로 사용된 '에피'(epi)가 강조적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 행동을 나타낼 때 쓰이는 부정 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온전히 아시며, 하느님께서 아시는 지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지 않는 온전하며 절대적인 지식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의 지식 또한 종말의 때에 그처럼 분명해 질 것이라는 뜻을 드러낸다. (Now I know in part ;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also I am fully known.)


그런데 본문에는 종말의 때에 성도가 확실하게 알게 되는 대상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음으로 인해, 성도가 알게 되는 대상이 더욱 넓고 크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규명할 필요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13장 2절에 나와 있는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 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전지하심(omniscience)이 포괄하는 앎의 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업의 진리를 말한다고 봄이 좋다. 즉 종말의 때가 되면 그때까지는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던 구원사업의 진리에 대하여 확연히 알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3)


본절은 <사랑의 찬가> 로 불리워지는 13장 전체의 최종적 결론으로서 <사랑의 영원성과 우월성>에 대한 선언이다. 바오로의 서간 어디에서도 본절과 같이 이렇게 분명하게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표현을 결합시킨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오로의 전반적인 사상에서는 이 세가지를 한데 묶는 경향이 농후하고, 이 세 가지를 그리스도교의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들로 여기는 경향이 드러난다.(콜로1,4.5 ; 1테살1,3 ; 5,8)


한편 바오로는 '그러므로 이제' 로 번역된 '뉘니 데'(nini de)로 본절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강조점은 시간적 의미의 현재에 있다기 보다는 논리적인 결론의 도출에 있다.

즉 바오로는 13장 8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예언, 신령한 언어, 지식 등의 여러 개별적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지만, 이와 반대로 믿음, 희망, 사랑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계속됩니다' 로 번역된 '메네이'(menei ; remain)'남아 있다', '머물다' 라는 뜻을 지닌 '메노'(meno)의 현재형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현재의 사실과 더불어 지속되는 사실을 나타낼 때도 쓰이므로 본문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현 세대 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에서도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공통적으로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될 하느님 나라와 밀접하게 관계되는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계속 된다'(항상 있다) 라는 것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오로는 시간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계속됩니다' 란 표현은 극복된 시간, 곧 영원을 언급한 것이다.


영원은 결코 시간의 범주에 포괄되지 않는 영역이다. 영원은 끝없이 계속 연장된 시간의 지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묵시록 10장 6절에서 '영원무궁토록' 이란 말로 언급하고 있듯이,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분을 두고,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 에게만 적용되는 신의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은 시간과 반대되는 영역이다.


한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모두 종말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바오로는 왜 유독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셋중에서 사랑이 으뜸이라고 말하는가? 여기서 '으뜸은'으로 번역된 '메이존'(meizon ; the greatest)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뜻이다.

사랑은 믿음과 희망을 산출하는 근거와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과 희망의 근거가 없어지며, 더 이상 믿음과 희망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랑의  우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믿음과 희망은 자신을 위한 것이나, 사랑은 타인을 위한 덕목이라는 데서도 사랑의 우월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이 하느님의 속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교적 삶을 시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지속하게 하는 필수 조건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 자체는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 될 수 없다. 즉 그것은 하느님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속성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은 희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의 희망이 하느님의 영원하심과 그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 스스로는 희망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이시지만, 그 자신 스스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으신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 스스로가 희망하신다면, 그는 더 이상 우리들이 믿는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더 이상 우리들의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이다.(갈라5,5.6) 사랑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으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닮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4,7.8)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요한4,12)

사도 요한은 사랑이 믿음과 희망에 비해 독보적인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7,31-35)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1-32)


원문은 결과 접속사 '운'(un; then)으로 시작되어 '그러므로(그렇다면) 무엇에 비유할까?'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결과 접속사 '운'(un)루카 복음 7장 31절이 29절과 30절에 이어 계속되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써, 7장 29절과 30절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와 세례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거절하고 저버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31절부터 34절까지 장터에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완고함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비기랴?'로 번역된 '호모이오소'(homoioso; I can compare)원형 '호모이오오'(homoioo)형태나 성질 면에서 유사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이다.


보통 '비유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파라발로'(paraballo) 동사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다'라는 뜻으로서, 하나와 다른 하나를 견주어 비교하여 어떤 현상을 쉽게 설명해 주는데, '호모이오오'(homoioo)'파라발로'(paraballo)에 비해 매우 직설적 표현이다.'호모이오오'(homoioo) 역시 어떤 두 대상을 놓고 비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비유'라는 말보다는 '~와 같다'라는 직설적인 표현에 더 가깝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춤추어야 할 자리에 춤추지 않고, 애곡해야 할 자리에서 애곡하지 않는, 상황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아이들과 같았던 것이다.

 

또한, '이 세대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며, 더 넓게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저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한편, 루카 복음 7장 32절아이들이 어른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흉내내어 노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피리와 애곡으로 상징된 결혼식과 장례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기쁨과 슬픔을 대표하는 날이다.


이것은 당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에 연관지어져 있다. 세례자 요한이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을 외치는 것은, 그의 금욕적인 생활과 더불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비난과 무시를 받는 것이었다.

마땅히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슬퍼하며 죄사함의 세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면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로부터 천국 복음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비난과 냉담의 태도로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그들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될 회개와 천국의 복음을 듣고도 무관심한 그들의 태도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장터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비유로 들어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 9월 20일 가해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어깃장을 놓지 마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어 걱정입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것은 어깃장을 놓는 행위입니다. 사실 ‘제가 하는 일에 장단을 맞춰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비딱 선을 탄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에 처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 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리고는 사람들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6,14-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 9월18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무관심한 태도를 통탄하십니다. 기쁜 일을 맞아 피리를 불어도 함께 춤추지 않고, 반대로 슬픔에 겨워 곡을 하여도 동참하지 않는 무관심은 상대방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으로 연결됩니다.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이 단식하니 마귀가 들렸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시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런 태도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요.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많이 하면 채신머리가 없다 하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너무 권위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지요. 옷도 모처럼 격식에 맞춰 입으면 형식적이라 비난하고, 간소하게 입으면 예의가 없다고 비난합니다. 이처럼 남이 하는 행동은 무엇이건 비난만 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이의 비위를 맞출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이에 호응하는 이도, 비난하는 이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의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오로지 주 하느님의 평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확신입니다. 확신하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확신이 때로 흔들리거나 잘못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우리의 판단이 흐려지지 않도록, 또 어려운 때마다 가장 좋은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느님의 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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