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실행하는 사람 (루카 8,19-21)

2018. 9. 25. 오전 6:3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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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실행하는 사람 (루카 8,19-21)


잠언의 저자는,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고 한다. (잠언 21,1-6.10-13)
1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2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3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4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5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6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10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11 빈정꾼이 벌받으면 어수룩한 자가 지혜로워지고  지혜로운 이가 지도를 받으면 지식을 얻는다.
12 의인은 악인의 집을 살피고 악인을 불행에 빠지게 한다.
13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라고 하신다. (루카 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연중 제 25주간 화요일(잠언21,1-6.10-13)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1)

 

본절부터 3절까지는 주님의 절대 주권과 공의에 관한 말씀을 소개한다. 그 가운데서 본절은 주님이 세상 모든 일의 주관자이심을 강조하는 구절로서,주님은 지혜와 힘이 인간 중에 가장 높고 크다고 생각되는 임금들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솔로몬은 임금의 마음이 주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물이 담긴 보(洑; 나루 보)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둑을 쌓아 냇물을 막아 두는 곳' 의미하는 '보'(洑)로 번역된 '팔르게'(phallge)의 원형 '펠레그'(phelleg)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해 놓는 규모가 작은 물웅덩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강우량이 적은 팔레스티나 지방의 농사에서 필수적인 관개시설이다.


솔로몬은 농부가 이곳에 물을 저장해 놓았다가 물이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마음대로 끌어다 쓸 수 있는 점에 착안하여 하느님께서 임금의 마음을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섭리하고 주관하심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서 '주님 손' 다양한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주님 손' 우주와 인간에 대한 권능(2역대20,6)이나 섭리(시편31,15)를 나타내거나 혹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보호(이사51,16)와 도우심(시편145,16)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그러나 때때로 악인에 대한 심판(시편75,8)이나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나 형벌(이사50,11)과 같은 부정적 의미로도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임금의 마음을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섭리하고 주관하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본절 후반절에 '~대로'(임의로)로 번역된 '알 콜'(al kol)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위에' 의미를 지닌 전치사 '알'(al)'모두','전부' 의미하는 명사 '콜'(kol)이 결합된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주권적인 행사와 섭리가 모든 것 위에 미치며, 완전한 것임을 함축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본절 자체의 의미를 감안할 때, 임금의 마음과 생각, 행사 모든 것이 하느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의미 전달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하느님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함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2)

 

본절은 사람의 판단이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반면, 하느님의 판단은 완전하고 공의로우심을 대조적으로 기술함으로써, 하느님을 의존하고 그 인도에 따라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하느님의 판단이 완전한 이유는 사람은 가시적이고 외적인 행동이나 일의 결과만 보는 반면, 하느님께서는 드러나지 않는 내적 동기와 목적까지도 깊이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조는 특히 상반절의 '제 눈에는' 해당하는 '베에나이우'(beenaiu)에 들어있는 '눈'이란 의미의 '아인'(ain)과 후반절의 '마음을' 해당하는 '립보트'(libboth)의 원형 '레브'(leb; 마음)의 대조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즉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근거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의 판단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할 수 밖에 없으나,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그의 판단은 완전하고 공의로우신 것이다(1사무16,7).


한편 '살피시는'에 해당하는 '웨토켄'(wethoken)의 원형 '타칸'(thakan)원래 '무게를 재다'(weigh), '시험하다'(examine)라는 의미를 지니며, 문자적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무게를 잰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있는 동기와 목적들까지도 훤히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복음(루카8,19-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21)


루카 복음 8장 19~21절의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12장 46~50절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형제들이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하고 계실 때 찾아온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찾아온 이유예수님의 가르침과 영적이 군중들에게 영향을 끼쳐 단순히 소문과 명성 때문에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베에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마태12,22~32)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소문 때문에 걱정이 되어 찾아왔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회당에서 가르침을 하는 도중에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 라고 말하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마태12,49)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당신 구원 사업의 협력자로 불리움을 받은 제자들도 이러한 공적(公的)인 가르침 중에 사적(私的)인 육정(肉情)을 쓰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교육적인 차원에서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루카 복음 8장 21절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로 나오는 마태오 복음 12장 50절과 병행 구절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혈육적이고 혈연적인 관계보다도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에 해당하는 '메테르 무 카이 아델포이 무'(meter mu kai adelphoi mu)에서 '형제들'에 해당하는 '아델포이'(adelphoi)의 단수는 '아델포스'(adelphos)이다.

여기 복음에 나오는 '형제'라는 뜻의 '아델포스'(adelphos)라는 희랍어 단어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촌 형제들도 그렇게 불렀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요셉 양부의 형제, 자매의 자녀들인 고종 사촌들이나 마리아의 형제, 자매의 자녀들인 이종 사촌들이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 친형제들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에 자신의 어머니를 친형제들에게 맡기지, 왜 이종사촌인 제자에게 맡겼겠는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출산하기 전(前)이나 출산시(時), 그리고 출산 후(後)에도 평생동정(平生童貞)이시라는 교리 신덕 도리 이천년 동안 가르쳐오고 믿어온 가톨릭을 반대하며, 자신들의 대처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부정하는 개신교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외에도 여러 명의 아들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말씀 절대 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이렇게 성경적 무지로 오류을 범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대처주의를 성경을 근거로 해서 합리화시키려고 하니까 터무니 없는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듣고'에 해당하는 '아쿠온테스'(akuontes; hearing)의 원형은 '듣다',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쿠오'(akuo)인데, 이것은 자식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 권위의 대리자들인 부모에게 순종하듯이, 인간들의 삶을 다스리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권위이신 하느님께 대해 자녀로서의 순종은 당연한 도리요 의무라는 뉘앙스를 주는 말이다



<예수님의 참 가족>(루가 8,19-21)

  -유광수 신부-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등불을 켠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오늘 복음은 바로 말씀을 정성껏 듣고 받아들일 때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까지 변화될 수 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가족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만일 예수님이 혈연관계로 맺은 이들을 당신의 가족이 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가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은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혈연 관계만으로는 안되고 혈연관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우리가 에수님의 어머니, 형제 자매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찾는 열성과  원의"가 있어야 한다. 루가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사용한 동사는 "찾다.""보다."라는 동사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은 갈망과 원의로 가득차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런 원의가 있는가? 모든 영성은 이 원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원의는 점 점 더 깊어지고 성숙되어 예수님의 가족으로 될 때까지 성숙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그들은 흡족하리니."(마태5,6)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배고픔과 목마름만이 우리를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하고 예수님을 찾게 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복음 묵상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이는 복음 묵상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신앙인이라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때만이 예수님의 가족으로까지 승화 될 수 있고 성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분이 혈연관계로 맺어진 분들과의 형제 자매들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의 어머니요 형제들로 바뀌어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들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들의 위치는 밖에 서 있었다.

밖은 하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늘 밖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더 깊이 더 가까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밖에 서 있는 자세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가능하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말씀을 잉태하고 말씀을 낳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성모님이시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사랑으로 낳으신 분이 아니시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천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을 낳으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을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낳는 어머니가 될 때 형제가 될 수 있다. 즉 같은 일을 하는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형제는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가 아니라 다 같이 하느님의 생명을 낳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형제가 되는 것이다. 즉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족이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가 6,35)가 되어  모두 한 형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행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두 번째는 들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행은 항상 들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에서 이루워 진다. 그렇기 때문에 루가는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고 들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우리가 말씀을 잘 들으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아서"(18절)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까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종한 것이다.

 

한 마디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8절)는 말씀으로 시작한 8장의 결론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는 말씀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성모님이시다. 루가가 제시한 마리아의 모습을 요약해보면

 첫째.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이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첫 번째 자세를 말한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걸음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1,45)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임을 선언하고 그 대표적인 모델이 마리아이다. 즉 우리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받아들인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받아들인 말씀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가꾸고 노력하고 돌봄으로서 말씀이 점차적으로 꽃이 피도록 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세 번째.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20) 아이를 잉태한 엄마는 태아의 양육을 위해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항상 그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작업" 즉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네 번째.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2,51) 성모님의 마음에는 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서 힘을 얻고 빛을 받는다. 즉 좋은 땅이다. 즉 마리아의 삶은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삶이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께서 친척 형제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반가워하기는커녕 서운하게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물론 이 말씀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를 부인하는 말씀은 아니지요. 다만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더 중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회 에서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많은 사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때로는 윤활유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폐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인위적인 관계에 얽매이다 보면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하지 못할 때가 있고, 반대로 혈연이나 지연, 학연에 얽힌 굴레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마저 거절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이 지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시켜야만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어 갈 것입니다. 아울러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형제자매들, 곧 새로운 가족들도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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