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토요일]씨,말씀(루카 8,4-15)

2018. 9. 22. 오전 7: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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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간 토요일]씨,말씀(루카 8,4-15)


바오로 사도는,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난다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설명한다.(1코린15,35-37.42-49)
형제 여러분, 35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37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42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3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4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5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며 비유의 뜻을 알려 주신다. (루카 8,4-15)
그때에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1코린15,35-37.42-49)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42-44)

 

코린토 전서 15장 42-44절은 36-38절에 나오는 씨의 사례 염두에 두면서 이 땅에 사는 인간은 썩어 없어질 것에 매여 있으나, 부활을 통해 마침내 썩지 않는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논증한다.(2코린5,1-5)


여기서 '썩지 않는 것'으로 번역된 '압타르시아'(aptharsia)부정 접두어 '아'(a)와 '썩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프테이로'(ptheiro)합성어이다. 특히 '프테이로'(ptheiro)시신이 부패하는 것 뜻한다.


일부 코린토 교인들을 포함한 당대 그리스인들이 일체의 부활 교리를 부정한 것 역시 현실에서 드러나는 육체의 죽음과 그로 인한 시신의 부패를 관찰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는 본질상 썩어 소멸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런 점을 보아서도 영혼이 육체보다 고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인들은 죽음의 과정을 통해 영혼이 자신의 감옥을 탈출하는 것이니, 사후에 다시 영혼이 자신의 감옥인 육체와 결합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오로는 육신이 죽음의 과정을 거쳐 부패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죽어 이 지상에서 틀림없이 부패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의 철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을 갖고 있다. 그는 육체가 죽음을 거쳐 새로운 부활의 몫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소망하고 믿는다.


바오로는 그리스의 영육이원론 철학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에서의 영육 이원론과 바오로의 신학 사상은 그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특히 몸과 관련하여 그리스인들이 몸을 영혼에 비해 비천한 것으로 간주한 반면, 바오로는 여기서 그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새로운 몸을 입는 것으로 언급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과 자신의 사상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몸을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새 창조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오로는 육신의 죽음과 부패를 씨를 뿌리는(심는) 과정과 비교하고, 부패를 넘어선 새로운 변형의 부활할 몸을, 씨가 죽어 성장할 나무에 비교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자연스럽게 썩어질 육체에 '묻히고'(뿌리고; 심고)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라고 언급된 36절의 내용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즉 바오로는 '뿌리고'(심고)로 번역된 '스페이레타이'(speiretai)36절에서는 씨가 땅 속에 심겨지는 것에 대해 사용한 반면, 42-44절에서는 인간의 죽은 몸이 땅 속에 묻히는 것에 대해 사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죽은 몸이 땅 속에 뿌려진다는(심겨진다는) 것은 죽은 몸이 묻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오로는 여기서 씨앗이 땅 속에 심겨지는 하나의 그림과 시신이 무덤속에 묻히는 하나의 그림을 의도적으로 오버랩(overlap)시키고 있다.

이것을 통해 바오로는 새로운 영적 몸을 입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3)

 

바오로는 본절에서 '비천한 것' '영광스러운 것', '그리고 '약한 것' '강한 것'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비천한 것'이나 '약한 것'이란 표현은,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타락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로마3,23) 본질적으로 질병이나 고난, 그리고 환난에 빠질 수 밖에 없고, 선한 것은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로마7,19)


그런데 바오로는 42절에 이어 여기서도 '묻히고'(뿌리고, 심고) 라는 뜻을 지닌 '스페이레타이'(speiretai)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죽음과 부패를 여전히 식물의 씨앗이 땅에 뿌려지는 것과의 유비 속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비천한 것으로 묻힌다는 것은 도대체 식물의 씨앗이 땅에 뿌려지는 것과 어떤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가?


제아무리 죽은 자를 위해 좋은 옷을 입히고, 그 관을 아름답게 치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신 자체는 산 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땅 속에 묻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씨앗이 뿌려질 때 그 알갱이가 어두운 땅 속으로 감추어지는 것과 같기에 시신이 비천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이란, 지금의 육체와 다른 면모로서의 부활할 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리신 하느님의 강력한 힘이(로마1,4) 부활할 몸을 통해서도 구현됨을 뜻한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 육체가 갖는 '비천한 것'과 '약한 것'에 반대되는 것이란 점에서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먼저 이것은 더 이상 죄악과 관계 없으며, 하느님의 모상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죄에 오염됨으로 인해 육체적 허약함에 시달릴 뿐 아니라 마귀와의 싸움에서 패할 가능성이 많은 이 세상에서의 육체와 달리, 허약함이 없을 뿐 아니라 더 이상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한 것' 이다.


이러한 '영광스럽고', '강한', 부활할 몸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살아있는 몸 안에 있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의 지력과 능력을 초월한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덧입게 된다. 현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지력으로는 이것을 결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44)


바오로는 본절에서 몸의 두 가지 형태를 대조하고 있는데, '물질적인 몸' '영적인 몸'이 바로 그것이다. 바오로의 인간관에서 독특한 것은 인간을 물질적인 부분과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구분하고, 비물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프쉬케'(psche; 영혼 혹은 혼) '프뉴마'(pneuma;심령 혹은 영)번갈아 사용해서 나타낸다는 점이다.


'프쉬케'(psche) '프뉴마'(pneuma)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구분되어 쓰일 때에는 사람의 육체적 생명(육신)과 관계된 비물질적 부분(영혼)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이고,  '프뉴마'(pneuma)는 하느님의 생명(하느님의 초자연적 사랑인 성령)의 영향을 받은 영적 생명과 관계된 비물질적 부분(심령;영혼의 핵으로서,세례와 견진때 받은 성령을 담는 그릇) 가리킬 때 주로 쓰인다.


따라서 '물질적인 몸'으로 번역된 '소마 프쉬키콘'(soma psychikon ; a natural body)'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덧입은 육체적 생명력을 갖는 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프튜마티콘'(pneumatikon)이 본래 '하느님의 영'(성령)을 주로 뜻하는 '프뉴마'(pneuma)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경우, '소마 프뉴마티콘'(soma pneumatikon ; a spiritual body)'영적인 몸' 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 되살아난 새 몸', '부활을 통해 장차 오는 세대에 덧입게 될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2코린5,1)


'영적인 몸'은 마치 어리석은 코린토 교인들이 가정했을 법한 논리, 즉 죽은 자들이 '부패한 시신의 재조직'을 통해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신령한 몸' '다른 몸'을 입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부활할 몸의 근본적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몸은 '자기 정체성'에 있어서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으나, '몸의 존재 양식'에 있어서는 불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매우 독특한 몸이다.


우리는 이 '영적인 몸' 대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육신이 무덤의 부패에 썩지 않고 영혼과 함께 몽소승천(피승천)한 성모님의 몸 생각하면 된다. 죽은 육신과 부활한 육신은 겉 모습으로는 똑같은 육신이다. 그러나 죽기 전의 육신과는 차원과 상태가 다른 육신이다.


예수님은 천주 성자 위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그 영혼과 천주성은 죽을 수 없는 분이시지만, 육신은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자연적으로는 영혼의 요소를 지닌 육신, 사기지은(四奇之恩)을 입으셔서, 몸이 빛나고, 무손상, 신속, 투철하시다.

여기 H2O물(액체)이 있는데, 물을 끓이면 기체(수증기)가 되고, 얼리면 고체(얼음)가 되지만, 다같이 실체와 본질은 H2O이고, 다만 새로운 조건하에 새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을 뿐인 것과 같다.


우리의 '영적인 몸'도 자연적으로는 영혼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사기지은(四奇之恩)을 입어서 몸이 빛나고, 더 이상 손상(고통)이 없는 무손상, 가고자 하는 곳에 이미 가 있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신속함, 문을 닫고 있는데도 뚫고 들어가는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투철함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새로운 존재 양식인 것이다.



감미로운 하느님 말씀이 봄비처럼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이스라엘은 아시아에 속해있지만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기에 지중해성 기후가 강합니다.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기후인데 우선 1년 중 우기(10월~3월)와 건기(4월~9월)의 구분이 명확합니다. 우기와 건기가 명확히 구분됩니다.

우기는 또 세 시즌으로 나누어지는데, 10월~11월에 내리는 이른 비, 12월~2월 사이에 내리는 겨울 비, 그리고 3월 전후에 내리는 봄비로 구분됩니다.

 

 이스라엘 지방의 농부들은 11월 경 이른 비가 내리고 나면 적당한 때를 골라 파종을 합니다. 그 사람들의 파종은 우리의 방식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처럼 비료를 뿌리고, 땅을 갈아엎고, 이랑을 만들어 골을 파서, 골 사이에 씨를 묻고 흙을 덮는 방식이 아닙니다.

 밭으로 나가기 전 농부들은 씨앗이 가득 담긴 주머니를 허리에 찹니다. 우리처럼 갖은 정성을 다해 일구고 잘 준비된 밭에 세심하게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적당히 대충 씨앗을 흩뿌립니다. 그러고 나서 쟁기질을 하여 씨가 땅에 묻히게 했습니다.

 

씨앗 입장에서 보면 생명을 건 하나의 도박 같은 파종방식이었습니다. 운이 좋아 좋은 땅에 떨어지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재수 없는 돌밭이나 길바닥,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지면 인생 종치는 방식의 파종이었습니다.

 이런 특별한 파종 방식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씨는 오늘도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각자에게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미사 중 사제의 강론을 통해, 우연히 펼친 성경 속 한 구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동료 인간의 입을 통해, 오늘 하루 내가 겪은 다양한 사건 사고를 통해 말씀의 씨는 지속적으로 내게 뿌려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길이나 바위나 가시덤불 위로 떨어지진 씨가 아니라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되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토양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 영혼의 텃밭에 뿌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데 저절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씨앗이 발아되기까지 적당한 수분이며, 햇볕이며, 자기 죽음이 요구되듯이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싹트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의 태도,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는 자세, 끈기와 용기, 말씀에 대한 개방과 환대, 선포된 말씀을 삶 가운데 실천하려는 적극성, 선포되는 말씀에 따른 지속적인 자기 성찰...

 

가끔씩 그런 사람들 만납니다. 아무리 외쳐보아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정말 그게 아닌데, 빨리 진실을 깨달아야 하는데, 귀가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듯합니다. 마음으로 들으면 좋을 텐데, 진지하게 마음에 새겨 삶이 변화되면 좋을 텐데, 타성에 빠져, 아집에 빠져, 깊은 늪에 빠져 헤어날 줄 모릅니다. 아마도 당대 유다인들 앞에 서 계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다시금 첫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순간입니다. 완고하고 무뎌진 우리 마음의 텃밭을 갈아엎어 부드럽게 만들 순간입니다. 감미로운 하느님 말씀이 봄비처럼 우리 내면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도록 내면을 비울 순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앗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보듯이 씨가 어디에 뿌려졌는지에 따라, 그 결실이 엄청나게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서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먼저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신앙의 여정을 잘 걸어가다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땅이 되려면 형식적인 종교 생활에서 탈피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기도보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뜻을 찾는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우선시하여야 합니다.

개인적인 신앙, 나만을 위하는 신앙 형태에서 벗어나 이웃과 공동선을 생각하며 사회적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아울러 이에 못지않게 영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도 추구해야만 합니다.
더불어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과 함께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는 굳은 신앙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참된 하느님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느님을 바로 알아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기복 신앙 위에 형성된 하느님의 모습을 정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더불어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께서 관리하도록 맡기신 자연과도 화해해야만 합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우리 각자는 점차 좋은 땅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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