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를 이해한 예수
“20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21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입니다. 24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은 뻔했습니다.’ 25 그 때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나서서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그것은 당신 말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오 26,20-25)
같은 이야기가 루가 22,21-23, 요한 13,21-30에 나온다. 루가에서 최후의 만찬이 끝난 후에 배신에 대한 말씀이 있지만 마태오에서 만찬 도중에 있다. 요한에서 사탄이 악마에게 들어갔다는 말은 네 복음서 전승 중 가장 늦게 생겼다. 마태오 단락의 대본은 마르코 14,17-21이다. 마태오는 25절을 새로 꾸며 추가하였다.
복음서 저자들은 사진작가보다 화가에 더 가깝다. 사진작가의 의도와 촬영 각도가 작품에 개입되지만 촬영 대상 자체를 바꿀 수 없다. 그림은 없는 대상을 있는 것처럼 새로 덧붙일 수 있다. 복음마다 화가의 화풍도 다르다. 마르코는 동양화, 마태오는 수채화, 루가는 유화, 요한은 추상화처럼 내게 느껴진다. 복음이 노래라면 마르코는 베토벤, 마태오는 베토벤 묘 옆에 잠든 슈베르트, 루가는 바흐, 요한은 모차르트 정도로 비유할까.
예수가 어떻게 예루살렘 시내에 도착했는지 설명이 없다. 과월절 만찬은 날이 저물기 전에 시작되어 자정 전에 끝나야 한다.(출애급 12,8) 유다인들은 하루에 두 끼 식사하였다. 20절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방바닥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다. 이집트 억압에서 해방된 기쁨을 표현하는 축제인 과월절에서 만찬 때 편안한 자세로 눕는 것은 종들에게도 의무였다.
중세 이후 거의 모든 최후만찬 그림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식탁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은 성서 내용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8.15 광복절을 우리는 유다인의 과월절처럼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며 축제처럼 지내는가. 친일파를 처단하지도 못했으니 죄송하게 지내는가. 친일파의 후손들이 권력을 잡고 엉터리 역사교과서가 날뛰는 대한민국이 부끄럽다. 그런 세력에 아부하는 그리스도교 종교인들은 과월절을 설교할 자격도 없다.
식사 도중에 예수가 배신자 예고를 했으니 제자들은 먹던 음식이 소화되지도 않겠다. 제자들이 밥이나 좀 편히 먹게 하시지. 20절 meti egio eimi는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1. 아니라는 답변을 기다리는 뜻으로 ‘저는 아니겠지요?’(마태오 7,16) 2. 자신을 조심스럽게 의심하는 뜻으로 ‘혹시 저입니까?’(마태오 12,23) 제자들은 모두 당황한다. 성서를 읽은 우리는 누가 배신할지 이미 알고 있지만, 당시 예수 제자들은 누가 배신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독자는 소설의 결말을 이미 알지만 드라마의 배우는 아직 결말을 짐작할 뿐이다.
식탁에 놓인 큰 그릇에 참석자 모두가 손을 넣어 집어먹을 수 있는 무화과, 사과 등 과일 조각과 채소가 담겨 있다. 23절 말씀으로는 누가 배신자가 될지 전혀 알 수 없겠다. 유다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그릇에 손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손을 자주 집어넣어 많이 먹은 제자가 배신자 후보로 떠오르겠다.
예수가 누구를 지목하는지 제자들이 알았더라면, 베드로가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따로 물어보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요한 13,23-27) 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제자들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요한 13,28) 유다가 배신할 것을 11제자들이 미리 알았더라면, 그들은 유다를 체포하고 심문하고 요절을 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체포되지 않도록 애썼을 것이다.
24절은 예수 죽음의 예고, 배신자에 대한 저주 두 가지를 담고 있다. 성서, 즉 공동성서 어디에 예수 죽음을 예고하는 구절이 있는지 마태오는 인용하고 있지 않다. 초대교회는 예수가 성서에 따라 죽으신 것으로 믿는 그것만이 중요하였다.(고린토전서 15,3-) 22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키리오스(kyrios, 주님)이라 부르지만 25절에서 유다는 랍비(rabbi, 선생님)라고 부른다.(마태오 26,49) 예수를 미워하는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랍비(rabbi)라고 불렀다.(마태오 23,8) 유다는 이제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의 적대자라는 뜻이다.
25절 수 에이파스(su eipas)는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1. 듣는 사람이 무관함을 주장하는 뜻으로 ‘그것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당신이 한 말이다’. 2. 묻는 사람의 질문에 긍정하는 뜻으로 ‘당신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군요.’ 예수의 답변은 2번 긍정의 뜻으로 예수와 유다의 거리를 나타낸다. 유다 정체가 예수에게 발각된 후 유다는 식사 장소를 떠났는가? 최후만찬 자리에 유다가 있었느냐는 문제는 교리적으로 해석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마태오는 말이 없다. 마르코와 마태오에서 유다가 그 자리를 떠났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루가에선 유다가 확실히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최후만찬이 다 끝나고서 배신자가 밝혀졌다.(루가 22,21-23) 유다는 최후만찬 자리에 있었고 빵과 포도주를 예수와 함께 나누었다! 가톨릭에서 성체분배 문제와 관련하여 이 본문을 좀 더 신중하게 연구하고 참조하기를 나는 바란다. 죄인에게도 성체를 모시도록 배려하는 것이 옳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세례 받은 개신교 형제자매들이 가톨릭 미사에 참석할 경우 성체를 영하도록 존중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나는 개인적으로 빈다. 그런 경우에 왜 거절해야만 하는지 그 신학적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가 유다를 부드럽게 대한 것을 성서학자들은 언제나 강조하였다. 24절은 읽기에도 무서운 말이지만 유다에 대한 영원한 저주나 심판의 말은 아니다. 예수는 유다를 비난하지 않았다. 우리가 유다를 비난하여도 예수만큼은 유다를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 예수나 유다나 모두 하느님의 계획에 협조한 사람이다. 그들은 같은 처지에 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동시에 유다의 잘못을 모른 체 하지 않았다.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나, 유다 개인의 죄는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신학자들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의 계획에서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은 개인의 운명은 하느님이 알아서 배려하시지 않을까. 유다를 비난하기보다는 유다를 위해 기도하고 같이 슬퍼하면 어떨까. 유다가 범인이라면, 우리가 검사, 판사, 증인, 방청객이라면 예수는 유다의 변호사일 것이다. 유다에게 돌을 던지지 말고 유다를 보며 우리 자신을 반성할 일이다. 누구나 유다가 될 수 있다. 예수와 가장 가까이 있노라 자부하는 사람이 예수를 배신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