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9 오전 2:25:21

세명의 목격자 앞에서 아기예수를 체벌하는 성모 마리아 ax Ernst
믿고 맡기고 키워야 합니다
제겐, 30여 년 전께 본당사목협의회 봉사를 함께 했던 멤버들이 그때 그 본당 신부님을 모시고 아직도 계절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면서도 만남을 갖고 있을 정도로 재미있게 봉사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이후 여러 본당, 여러 신부님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겪은 사목회를 회상하노라면 즐거움보다 아린 회포가 더 큽니다.
전국 1680 여개 본당에 사목회의 현황은 어떨까? 실정통계자료는 없지만 듣고 보는바로 개황은 이런저런 사유로 아예 없는 본당도 있고, 있어도 겨우 몇 명 정도 명색만 걸려 있는 본당이 있는가하면 티격태격 불목하여 마비되어 있는 본당도 부지기수입니다.
해산명령으로 공중분해 된 본당, 집단사임으로 깨진 본당도 널려있습니다.
이렇듯 평신도사도직의 본분이 유야무야인 본당이 태반이 넘는다고 하면 심청 사나운 자의 객소리일까?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그나마 아무 탈 없이 조용하다 싶은 데는 대개 김밥집이 틀림없습니다. 순명이라는 이름의 복지부동 작태입니다. 맹종은 본당공동체의 혈류를 마비시키고 본당사제를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좀 과격한 표현 같습니다만, 대놓고 이르자면 사제와 가장 빈번히 면대를 하는 사목회장이 임기를 채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라고 말하면 이 역시 가자미눈을 가진 자의 시각이라고 핀잔을 받을까?
정말 영성적으로 인간적으로 훌륭하신 분들이 만나서 아름답게 사목을 펼치는 본당도 물론 많습니다만 아무 문제도 불거지지 않고 조용하다 싶은 데를 알고 보면 자동거수기, 무사여일, 어영부영 지나는 성당이 거개입니다. 이런 본당은 따지자면 문제가 불거진 성당보다 더 심각한 노릇입니다.
이러한 일반적 현상은 원천적으로 우리 본당공동체가 구조적, 역학적 모순을 배태하고 있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언젠가 잘못되고야 만다.(If anything can go wrong, it will.)’는 치숌의 법칙을 도리 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교회의 어느 연구기구나 언론에서도 본당사목회 활성화에 대한 통계를 시도해 본적이 없습니다.
사제와 평신도의‘갈등’의 주범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갈등의 원인은 개인 대 개인의 인격적인 상충으로 비추어지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모순을 안고 있는 체제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1906년에 반포된 교황 비오 10세(1835~1914) 의 회칙 Vehementer Nos(?)의 한 문장 속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고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교계의 여러 등급에 속하는 사목자들이요, 다른 하나는 평신도 무리이다.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명확하여, 교회의 목적을 촉진하고, 그 목적에로 모든 구성원들을 지도하는데 필요한 권리와 권한은 오직 사목자들에게 속하고, 평신도 무리의 유일한 의무는 사목자들의 지도를 받고 순한 양들처럼 그들을 따르는 것이다.」
갈등의 원인은 아직도 유전자처럼 남아 있는 그와 같은 중세의 잔재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헌장의 틈새에서의 신음입니다. 더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아직도 봉건중세기의 평신도로 남아서 사제를 구름위로 띄우는 평신도상과 제2차바티칸공의회 평신도상과의 이중주가 아니겠는가.
교구마다 사목회 회칙 규범 예규가 있지만 각 일선 본당이 실제로 갖고 있는 회칙들을 보노라면 비전문가가 봐도 회원, 회의, 재정 등 비합리적인 규정이 여실히 인정되는 형식적인 것인데도 방치되고 있는 것은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성속이원론의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입니다.
총회를 해도 고만, 안 해도 고만입니다. 입법, 사법, 행정이 사제 1인으로 통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선입니다. 그 독선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식정보화시대에 희화(戱畵)처럼 남아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 대표가 회장이면서 의장은 본당주임사제입니다. 의결기구가 아니면서 의결을 합니다. 보필과 자문을 위한 의결입니다. 만장일치 의안이라 할지라도 주임사제가 비토하면 고만이요, 명색이 평신도 대표이면서도 그 구성원의 임명권과 해산권을 주임사제가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근대적이고 어정쩡하고 상태가 오히려 낮은 과거에는 관례로 통용될 수 있었겠지만 이젠 갈등의 요소입니다. 신남신녀들의 지식수준이 상당히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라성 같은 이들이 성당에서는 꾸어다놓은 보릿자루 꼴입니다. 평신도가 명실상부 교회의 주인이 되어야하는 건 시대의 소명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고 맡기고 키워야 합니다.
교회는 사목회가 신심단체나 봉사단체와 같은‘단체’반열이 아니라고도 합니다. 굳이‘사제의 사목을 자문 보필 협조하는 모임’정도로 어정쩡한 명패를 붙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조적, 역학적 모순을 내포한 사목회가 하나의 유기적인 구성체가 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 한 일입니다.
1970년 전후에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구와 본당에 사목회라는 걸 들여 놓았으나 아직까지도 이의 운영이 피차 자못 애물단지입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오늘날의 갈등의 역사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사목회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기구가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 안하느냐, 잘하느냐, 잘못하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반듯이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굳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넘어 평신도도 교회의 주인의식을 명실상부 갖는 것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신도들을 모두 불러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 식량 배급에만 골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내시오. 이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습니다."
모든 신도들은 이 말에 찬동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파노와 필립보와 브로코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르메나와 또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유다교로 개종한 니골라오를 뽑아 사도들 앞에 내세웠다.』-사도6,2~6-
사목활동 즉 교회의 사목적 사명을 다하는 활동은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이루는 모든 지체들의 다양한 활동으로 나타나겠으나 이를 성직자들의 활동과 평신도들의 활동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의 사목활동은 그들의 사회성(社會性)과 현세성(現世性)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 활동은 그들이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분야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충실성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전문적으로 활약하는 모든 노력입니다.
한편 성직을 통한 사목활동은 특히 신앙생활에 대한 봉사와 전례 집전으로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에 대한 봉사는 설교, 교리교육 및 영적 대화 등으로 구체화되며 전례행위를 통한 봉사는 여러 성사 집행에서 드러나고 미사성제를 중심으로 그 절정에 이릅니다. 이러한 사목활동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는 수단이 바로 교회 운영이 아닌지요.
사목권의 행사인 교회 운영은 지상 여정의 교회가 갖는, 사회적 조직을 구성하고 교회의 사목행정의 능률을 높이며 재정과 인사를 관리합니다. 직무와 은사, 사랑과 법률 사이의 긴장은 순례하는 교회의 본질에 속합니다.
신덕과 지식을 갖춘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고문관’이고 거룩한 영성과 인격적 표상으로 존재해야 할 성직자는 관리자에 다름 아니고 게다가 아무도 귀뜸조차 않는 무치로 남아 있다면 참담한 일입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 문헌이 반포된 지 어언 50년간 한국교회는 공의회정신에 따라 새로운 전통을 위하여 얼마나 분골쇄신 하였나?
많은 변화를 이루었지만 불급입니다.
문제는 낡은 문화가 새로운 제도를‘무력화’시키고 새로운 제도가 낡은 문화에‘굴복’하는 데 있습니다.
사제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본당의 위상은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희비를 겪어야 합니다.
존경스러운 탁덕의 사제도 많으시지만 이모저모 역겹다 싶을 정도로 권위는 안 보이고 권위주의만 보이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먼발치에서 미사만 드리는 신자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이분들에게 사제와 봉사자간의 갈등은 얼핏 하극상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기실, 갈등의 원천인 사제의 권위주의와 평신도의 맹종은 서로 부추기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금세기에 있어 평신도의 교회 사목과 운영 참여는 불요불급 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세속적인 권력 다툼이 아니라 교회운영의 합목적성입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는 사제의 권위주의에 가로막혀 평신도의 상처와 의욕 상실을 낳고, 신부들은‘마마보이’가 된 평신도의‘수동성’과‘의존성’을 빌미로 더욱 독단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는 교황의 우위권(優位權)과 무류권(無謬權)교리를 선포한 제1차바티칸공의회로부터 97년만에 열렸지만 변화의 속도가 엄청난 현금에 제2차바티칸공의회가 있은지 벌써 50여년이 지난 지금 제3차공의회가 시급하다는 게 중론입니다.
대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바티칸공의회문헌 통독은커녕 평신도사도직 교령이란 이름조차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은 우리가 공의 정신을 얼마나 수용했는가를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주교는 교구에서 선출되지 않고 로마에서 비밀지령처럼 이루어집니다. 사제에 대한 주교의 인사권도, 평신도 봉사자에 대한 사제의 인사권도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제도입니다.
믿고 맡기고 키워야 합니다. 무엇을 했느냐 보다 어떻게 함께 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 찬미 예수님! 김동식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이우정님(jjsugw2167)
그냥 냅둬요~낡은문화가 새로운 제도를 무력화시켜라고...다 하느님의 뜻이겠죠...굴복하는 새로운 제도는 그래서 밖으로 튀쳐들 나가나봅니다...낡은문화가 승리한 종교는 미래가 있을까싶지만...이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또다른 문이열리겠죠...
† 찬미 예수님! 김동식울바노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김종업님(rlawhddjq)
천주교는 단일 종교다? 글쎄요. 각 교구마다 다르고 각 본당마다 다르고 주임사제 따라 다르고~~
뭐 그때 그때 따라 다른게 현재 천주교 아닌가요?아~~~ 언제나 바뀌려나. 근데 바뀌긴 바뀔까요?
글쎄요. 주님께서 빨리 오셔야 델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