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거쾨더 성화와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 묵상

2012. 2. 24. 오전 11:50:12

글자

지거쾨더 성화와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 묵상


제1처 사형 선고 받으심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예수께서는 신성모독자이자 정치적 반란자로 붙잡혀

묶이고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종교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이라는 맷돌 사이에서 가루가 될 밀알이셨다.

그분은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사명에 충실했다.

즉 '눈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앉은뱅이들'을 다시 자기 발로 일어서도록 도와주고,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소외상태에서 해방시켰는데, 이는 모든 면에서 우리 인간을 염려하는 사랑의 하느님

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림에서 예수께서는 가야파와 빌라도 앞에 서 있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권력구조의 대표자들이다.

가야파는 토라 두루말이를 꽉 붙잡고 있는데, 그것이 그에게 성스러운 하느님의 율

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만에 찬 찡그린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이다. 오른쪽에 빌라도가 있다. 이는 심각한 종교적 갈등에 빠져들어간 세속적 권

력을 대변한다. 빌라도는 이 갈등을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한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

는 붉은색 옷을 걸치고, 빌라도는 '무죄'의 물에 자신의 손을 씻는다. 대야의 물이 핏빛

으로 빨갛게 물들어있다. 이것은 그가 이 살해모의의 공범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살해공모에는 종교 지도자와 세속적 권력자의 손은 함께 협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시선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판관들 앞에 상체

를 드러낸 채 고개 숙이고 있다. 그리고 그가 걸친 옷의 붉은 색은 왕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빼지도 아니한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긴다'(이사 50,5-6)는 말씀처럼 내 맡

겨진 자세이다.

 

제2처 십자가 지심

 '그 분은 몸소 십자가를 지셨다'

판결이 내려졌고 처형은 행해진다. 채찍질 때문에 피를 흘리는 그의 손이 십자가를 잡

고 있다. 그 손은 들보를 껴안는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예수께서는 이

사야 예언서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지거 쾨더는 십자가의 길에서 시간

을 넘어서서 다른 강조점을 부여한다. 가로 들보 위에 무거운 철 갈고리가 걸려있다.

그리고 가로 들보와 평행하게 처형장으로 이어지는 레일이 있다. 이는 베를린의 플뢰

첸제(Pl tzensee)에 있는 감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광경이다. 그곳에서 1944년

7월 나치의 앞잡이들은 불의와 증오의 독재에 대항해서 투쟁했던 남자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고, 그들의 말살이 곧 이어졌다. 플뢰첸제의 철길은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던 무수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그들은 정의, 인간존엄, 억압당한 사람들의 자

유를 위해 투신했던 것이다. 권력과 무기력, 편협함과 자유, 억압과 절규 사이의 투쟁

이 피의 띠처럼 역사를 관통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곳 어디서나 나자렛의

예수를,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형된 분을 기억할 수 있다.

 


                         제3처 첫 번째 넘어지심
                                         
 

예수님!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망각하셨습니까?

이렇게 무기력하게 넘어지시는 것이 정말 기력이 핍진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골고타산에 오르셔야 한다는 것에 미리 질려버리신 나머지 엄살을 피우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도 당신은 무엇인가를 해내실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군중 속에 파묻혀 당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 그리고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은 이렇게 항거하지 않았을까요?

메시아로 인정받으시던 당신이 가증스러운 구경꾼들 앞에서 그것도 무거운 십자가와 함께 넘어지셨음이 얼마나 굴욕적이며 창피하셨습니까?

온 몸이 짓눌리는 아픔과 함께 재촉하는 군인들의 채찍으로 생긴 상처에서는 시뻘건 피까지 흘러내렸겠지요.

그럴수록, 도와주는 이는 없고 늑장 부린다고 보채는 병정들의 채찍이 가세하니 그 고통 얼마나 심하셨습니까?

얼른 처형을 끝내고 쉬고 싶어서 빨리 가라고 보채는 병정은 물론이요 야유와 함께 극적인 장면을 보고 싶어하는 군중들의 아우성은 더욱 당신을 힘들게 합니다.

그들이 다그치는 보챔은 당신의 기력을 무척 많이 빼앗아갑니다.

예수님! 넘어지셨을 때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십자가를 팽개치고 “나는 왕도 아니고, 메시아도 아니오!”라고 외치고 싶지는 않으셨습니까?

“하필이면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머리가 터질 듯이 솟아오르지 않습니까?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면서 다른 이들에 대한 원망에 젖어들지는 않으셨습니까?

대낮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넘어졌을 때, 해낼 수 없는 일에 과도하게 채근을 당하기 때문에 허둥대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때 느껴지는 창피함은 저희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것이랍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굴욕감이나 모멸감이 있다면 얼른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자존심이 그냥 있지를 못해 어떻게 해서든지 헐뜯고 맙니다.

그로 인해 심한 열병을 앓고 기력을 빼앗기곤 한답니다.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만 묵묵히 일어나 걸어가시려 애쓰시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낍니다.

거창한 계획으로 짓눌리고, 작은 결심에도 무너지는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 아버지께로 오라는, 그리고 노력하면 하느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격려의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는 일이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고,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 얻은 수확만이 당신께 드릴 진정한 제물이라는 것을 새로이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나약해질 때 도와주소서!

 

 
                제4처 성모님을 만나심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어머니와의 만남은 위로의 순간이 되었습니까? 기쁜 일로 자주 어머니를 뵙는다는 것은 아무런 감동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멀찌감치 머물러 계시던 어머니를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에서 뵌 심정이 오죽하시겠습니까?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늘 먼 발치에서만 아들을 지켜보아야 하는 어머니, 자식은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어머니이십니다.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하려면 “어머니의 마음은 정말 예리한 칼로 찢길 것”이라는 말을 했던 예언자 시므온의 말이 어머니에게는 몹시 원망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머니의 부탁이라면 늘 허락하시던 당신은 고통스러운 길에서 어머니를 만나셨습니다.  두 분이 서로 바라보시면서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드릴 말씀이 생각조차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이럴 때 자식은 어떻게 어머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습니까? 두 분은 눈물로 가득 차 있고, 얼굴은 상기되어 차라리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는 것이 더욱 마음이 편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현실은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싫다고 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아니 자신의 편함을 위해 자식이 필요 없고, 자신의 안일함을 위해 부모가 거추장스럽기에 보낼 곳을 찾아 눈에는 핏발이 섰는지도 모릅니다. 부모님께 효도를 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이 앞서야 가능한 것이 되었나봅니다.
론 버젓이 살아 있는 부모를 두고 고아로 살아야 하는 현실도 있습니다.

 자식은 당신께 대한 수고의 갚음이 아닌지 오래 되었고, 부모는 당신께 대한 사랑의 표상이 아닌지 한참 되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당신을 낳아 주신 어머님께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거늘 우리의 부족함은 너무나 많습니다.

당신의 효성과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의 사랑과 신앙을 조금이라도 본받을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제5처 시몬이 함께 십자가를 짐

 

'그들은 그로 하여금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얼굴 둘, 몸 둘, 손 넷, 무거운 들보 하나가 있다. 그들은 이 들보를, 짓누르는 십자가

들보를 어깨에 짊어졌다. 마치 그들이 짐을 짊어지는 일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그들

이 어떻게 자세를 고수하는지 눈길로 더듬고 싶어진다. 팔 하나는 공동의 짐을 감싸고

, 다른 팔 하나는 상대방을 감싸고 있다. 복음서는 키레네 출신의 남자를 시몬이라 말

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농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처형장

으로 가고 있는 행렬과 만난다. 왜 그가 병사들에게 호출 당했을까? 시몬은 들보를 꽉

움켜잡고 나르기 시작한다. 지거 쾨더는 이 그림에서 복음서의 진술로부터 벗어나 자

기 자신의 길을 간다. 시몬은 예수 앞에서 십자가를 운반하지 않고, 예수와 함께 십자

가를 짊어진다. 이로써 시몬은 우리에게 다른 시각을 일깨워준다. 두 얼굴은 얼마나

닮았는가! 얼굴 생김새, 눈, 코, 입, 수염 등 이 두 사람이 혼동될 정도로 비슷하다. 다

만 푸른 옷을 입은 사내는 얼굴에 자기 일의 색채를 띠고 있다. 붉은 옷의 사내는 창백

한 얼굴에 모욕당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뒷면에 있는 그들의 팔은 서로 교차되어 상

대방의 몸을 감싸고 있다. 그들은 함께 하는 일로 서로 얽혀있는 살아있는 십자가이다

. 두 사람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 시몬은 눈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게 되었지만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나는 여기 있

는 내 형제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와 연대하겠습니다. 우리 둘이 짊어질 겁니다. 서

로 부축하며 짊어질 겁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들의 고통에 너무

깊이 관여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그들은 나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는

이 고난의 길을 끝까지 가겠다. 그리고 시몬, 그대는 나의 길을 함께 갈 것이다.' 우리

는 연대성을 이보다 더 분명히 말해주는 그림을 볼 수 없다. 예수께서는 고통 당하는

인간, 즉 '십자가를 진 사람'과 연대한다. 우리가 시몬처럼 짊어지게 된 십자가를 받아

들이고, 그 무게가 우리를 압박한다면 그때는 미리 그런 징후를 지녔고, 그 징후에 자

신을 내어준 분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를 받쳐주고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질 것이다. 그는 인간들의 형제이다. 그를 통해 우리의 고통을 나누면 고난의 길

을 넘어 희망의 오솔길에 이를 것이다.


                  제6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드림
 

베로니카는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루가가 전하는 유일한 언급은 예수께서 탄식하

는 여인들 곁에 잠시 머무는 장면뿐이다. 그러나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14처 때문에 우

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4세기경부터 깊은 신앙심 때문에 예수의 고난의 길을 따라하기

시작했을 때, 그 당시 생겨난 전설에 따르면 그 이름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나타난

다. 그녀의 이름은 베로니카(Vera Ikona, 이 이름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합성어이다)

로, 진짜 형상을 의미한다. 전설은 이 여인을 고수한다. 그녀의 수건에 고난받는 자의

얼굴이 찍혔고, 이 수건으로써 치유효과가 생겨났는데, 황제 티베리우스가 이 수건 덕

분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붉은 옷의 여인은 루가가 말하는 예루살렘의 딸들 중 하나였

을 수 있다. 그들은 형장으로 이어지는 길거리에 서 있다. 유죄판결을 받은 자가 걸어

가는 길을 내기 위해 병사들이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왜 그때

한 여인이 충동적으로 수건을 꺼내 땀과 피로 얼룩진 그의 얼굴 앞에 내밀었을까? 그의

얼굴은 막 이루어진 접촉에서 생긴 네거티브 사진처럼 뒤에 남아있다. 이 그림은 어떤

사명을 전하고 있다. 베일 뒤에 있는 여인의 눈은 계속 끌려가는 예수를 더 이상 바라

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흑인을 바라보는데,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빈 대접을

들고 음식을 구걸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본양식이 필요하다. 온정에 대한 간

청이 구체적으로 필요한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의 가르

침에서 그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

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제7처 두 번째 넘어지심

예수님! 두번째 넘어지심은 땅에 묻히는 연습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초라한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인가요? 아마도 땅에 넘어져 골고타산의 정상을 한번쯤 쳐다보시고 한숨을 내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길을 재촉하는 병정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올려보시고, 당신의 처절한 죽음을 그리워하는 군중을 흐려진 초점으로 바라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군중을 바라보시는 초점을 맞출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미워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초점을 흐리게 하고 바라보신 것은 아닙니까?

 십자가 자체의 무거움보다는 주위에서 가세하는 광란의 소리가 더 무겁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골고타 산 정상까지 가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골고타 산 정상에 올라가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나는 절대로 왕이라고 해본 적도 없고, 결코 나라를 뒤집어보려는 야망을 가진 적도 없다.”라고 외치면서 십자가를 버리고 싶은 일시적인 갈등과 유혹을 물리치시고자 잠시 여유를 갖으시기 위한 넘어지심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수다와 농담, 불의와 부정, 황당무계한 모함이 합쳐지기 때문에 더 무거웠겠지만 멀리서나마 응원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고자 잠시 여유를 갖으신 것이겠지요?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결승점에 들어오는 마라톤 선수에게 관중은 야유가 아니라 일어서서 경의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절망하고 넘어졌을 때 모든 것 떨쳐버리고 어디론지 도망치고픈 심정 어디 저희라고 없겠습니까?사랑이 넘치기에 격려해 준다고 하는 말들이 더욱 야속하다는 것을 저희도 역시 뼈저리게 체험했었습니다.

아무런 뜻이 없다고 수다를 떨며 내 뱉은 말들이 제 마음에는 비수로 꽂혔고, 저의 앞길에 놓인 커다란 돌이었음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알 수 없는 오해로 “나는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항거하고 싶었던 날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모범을 따라 저희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 자신이나마 다른 이들에게 더 무거운 십자가가 되지는 않았는지 진정으로 반성케 해 주시고, 저희가 넘어지고 좌절할 때에, 그리고 당신이 싫어지고, 믿어지지 않을 때에 끝까지 일어나 따를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을 허락하소서.

 


         제8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저만큼 서 있는 부인들은 구경꾼인가요? 아니면 동정심에서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들인가요?  예수님! 왜 그들을 위로해주셨습니까? 그들이 정말로 슬픔의 눈물을,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까? 예루살렘의 부인들을 바라보면서 당신은 많은 분노를 느끼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며칠 전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는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웃옷을 벗어서 길에 깔면서 그렇게도 당신을 열렬히 환호하고 호산나를 외치던 예루살렘의 부인들이 불과 며칠이 되었다고 오늘은 그렇게 찢어지는 목소리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고, 이제 와서는 초라한 당신의 모습을 모면서 동정의 눈물만을 흘리고 있으니 병 주고 약도 주는 것이 아닙니까?

 저희는 가끔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힘든 때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피리를 불 때에 울게 되고, 곡을 할 때에 춤을 추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래서 용감하게 뛰어들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만 당신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울되, 인간 앞에서는 울지 말라는 당신의 가르치심에 따르려 하니 늘 손해만 본다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만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우리가 용서한 만큼 그만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신과 당신의 가르침 앞에서는 매우 완고하고 인간들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값싼 동정심을 호소하며 지낸 나날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울어야 할 일에 웃고, 웃어야 할 일에 울었던 나날도 있었습니다. 진정한 사랑보다는 그냥 던져주고 마는 한푼 어치 동정심에 기뻐 날뛰고, 때로는 마지못해 치러야 하는 이웃에 대한 의무감에서만 살아 왔는지도 모릅니다.

 장터에서 편을 가르지 않고 피리를 불 때에 춤을 출 수 있고, 곡을 할 때에 울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소서. 진심으로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당신 앞에서 울고, 이웃들 앞에서 웃게 해 주소서. 하느님 앞에서는 울고, 이웃들 앞에서는 활짝 웃게 하소서. 당신께 대한 통회의 눈물과 이웃과 가족에 대한 화해와 용서의 웃음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제9처 세 번째 넘어지심

 

당신의 넘어지심이 결코 당신 자신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을 경고하시고 훈계하심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야 인간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당신은 인간이시면서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또 넘어지셨습니까? 그새 그것도 못 참고 넘어지십니까?”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입니다. 자신의 입장은 항상 옳고 타인의 입장은 항상 잘못되었다고 우리들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당신께 투정을 해 봅니다.

 늘 세 번을 좋아하시는 예수님, 당신은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신 만큼 넘어지셨습니다. 세 번 울 것이라는 닭소리만큼, 세 번씩이나 배반할 것이라는 베드로의 철없는 짓거리만큼, 그리고 세 번씩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그만큼 넘어지셨습니다.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에게서 악마의 짓거리를 보셨고, 세 번의 닭의 울음소리를 말씀하시면서 배신을 느끼셨고, 세 번 배반할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하시면서 “베드로야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주고 싶으셨고, 부활하신 후에 세 번씩 사랑을 확인하실 때에 성질을 부리면서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절망을 느끼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세번째 넘어지심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닙니까?

 당신을 떠나서 위로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꿈과 허튼 소리에 빠져들어 가기도 합니다.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씩 빠져들어 갑니다. 당신의 말씀보다는 점쟁이들의 말이 더 힘이 있게 느껴지고, 당신이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공적계시에는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고 허튼 소리인 사적계시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도 더 됩니다.

 계속되는 회개와 끝없이 당신께로 향함이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한두 번 깨우치고 무너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어리석은 저희들입니다.  계속적인 회개와 사랑만이 우리를 당신께 엮어 놓는 것이며 우리 살아가는 이유임을 굳게 믿고 따르게 하소서.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이라도 다시 일어서서 돌아오기만 한다면 당신은 늘 받아주신다는 믿음을 갖게 해주소서.

 

 

              제10처 옷 벗김을 당하심
 

'그들은 내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요한복음이 이야기하듯이 '위에서 아래까지 이은 곳 없이 통으로 짠' 예수의 하얀 옷가

지가 색상이 화려하고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 그림의 중심에 있다. '한 조각'으로 된 예

수의 이 속옷을 놓고 병사들이 제비를 뽑았다. 이 속옷은 이미 고대 교회에서 나눌 수

없는 교회의 일치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독일 남서부의

트리어(Trier) 도시에 있는 성의(聖衣) 순례 때, 그곳에서 보게 되는 성의는 많은 사람

들에게 구체적인 인간 예수에 대한 감동적인 추억이 되었다. 이런 해석을 배경으로 하

여 지거 쾨더의 그림이 구성되어 있다. 이 그림은 우리의 시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생각하도록 자극을 줄 것인가? 이 그림에서는 예수의 옷가지

주위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주된 세 흐름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앞쪽에 금빛

나는 제복을 걸친 그리스 정교회 사제가 있고, 그의 옆쪽으로 검은색 가운을 걸친 프로

테스탄트 목사가 있으며, 그의 맞은편에는 진홍색의 주교관과 옷을 걸친 로마가톨릭

주교가 있다. 이 세 사람 모두 함께 숭배하면서 예수의 옷 한 조각을, '그들'의 조각을

잡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유산에서 '그들'이 지니는 몫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핏빛처럼 붉은 깃발을 든 검은 피부의 사람이 이 경건한 전원적인 풍경을 망치고 있다.

묘사된 '성의'(聖衣)에 흐트러지고 쪼개지는 십자가 형태로 찢어진 틈이 보인다. 분리

된 채 있는 종파 사이에서는 복음 역시 '그리스도의 몸'을 쪼갠 것에 대한 분노를 없앨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유산에서 자신의 몫에 자족적으로 만족해

하면서 그 유언의 본뜻을 망각하고 뒤로 제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유언이 여기에서는

십자가의 그림자 속에 제시된다. 지나치기 쉬운 십자가의 그림자가 붉은 색 깃발을 든

흑인에게로 이어진다. 이것은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적인 질문이 된다. 우

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들의 어려움과 다시 섞이지 않는

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오히려 그 해방시키는 구원의 힘을 죽이게 될 것이다.

 


 

 

                 제11처 십자가에 못박히심

 

'그곳에서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그림은 얼마나 낯선 광경인가! 골고타에서 눕혀져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없다. 이 그림은 우리의 감상 습관을 방해한다. 이 그림은 우리의 시선이 가는

방향을 바꾸고 마치 우리를 십자가의 길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눈으로 보게 한다. 팔다리를 뻗고 십자가에 누워 예수님의 눈으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게 한다. 그 하늘에서 죽은 검은 태양이 그를 내려다본다. 화환

형태의 얼굴들이 누워있는 자, 다시 말해서 나를 내려다본다. 마치 내가 해부될 준비

를 하고 수술대에 누워 있는 것 같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갑옷으로 무장한 로마 병사

가 망치를 격렬하게 내리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즐기면서

도 깔보는 히죽거림 외에, 깊이 생각하는 표정도 찾아볼 수 있다. 당황하는 표정도 있

고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있으며, 슬퍼하는 표정도 있다. 어떤 사람은 손으로 얼굴

을 가린다. 또 어떤 사람은 성서 두루말이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예언들이 그에게 암시되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찌른 사람을 바라볼 것이다.' 자신을 고난받는 예수와 일치시키고 '못 박힌 존재',

즉 묶이고 못 박혀 고정된 존재에 대한 고유한 경험을 이 그림 속에 옮겨놓도록 화가

가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서 행동의 자유를 몽땅 빼앗지는 않아도

우리를 못박아 고정시키는 것으로 질병과 장애, 직업상 그리고 가족관계상 피할 수

없는 부담, 다른 사람들의 선입견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

이 곤경과 고난과 비참함 속에 못 박혀 고정되어 무기력하며, 내맡겨진 채 놀라서 쳐

다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들이, 민족 전체가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 곳에서 사람

들이 구경하고 있고, 세계의 언론들이 방관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런 곤경을 알고 있

다. 그는 이런 곤경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우리 중에서 '형언할 수 없는 텅 빈 눈구

멍'(그림의 형상)을 바라본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의 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2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아래에 있던 백인 대장의 외침,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

나!'는 복음의 혁명적인 내용, 즉 십자가형에 처해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요약하고 있다. 예루살렘과 로마의 종교적·정치적 권력자들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생명의 하느님에 의해 부활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로마 황제에게 고용된

사람의 이 외침으로 복음은, 로마 황제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하는 정치적 선언과

배치된다. 십자가에 처형된 이 가련한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이 심지어

가장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의 삶에 얼마나 불멸의 사랑을 품고 있는지를 계시

해준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삼는다. 예수와 율법 사이의

대립은 분명히 너무 극단적이어서, 권력자들은 예수를 제거함으로써 그의 일을 끝내

려고 했다. 예수는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메시지와 행동은 종

교적·정치적, 유대적·로마적인 사회의 토대를 흔들어 놓는다. 그림은 성전의 휘장이

찢기는 모습인데, 마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께서 양쪽 담을 허물고 있는 강한

인상을 느끼게 한다.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을 제외시키고 그 자녀들을 죽이는 체제

속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은 율법을 부순다. 그게 로마의 율법이든, 시장경제의 율

법이든, 아니면 하느님 자신의 율법, 즉 시나이 산의 율법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왜냐

하면 '안식일이 인간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마르 2,27) 때문이다.

 

     제13처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노을이 물든 밤중이다. 장소는 십자가 아래임을 알 수 없다.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내려온 것과 같이 어둠도 위로부터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

에서 내려놓는 것과 장례 사이의 고통스러운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마리아는 절망과

슬픔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저항한다. 한 손으로 그녀는 아들을 세우고 그의 버팀목

이 된다. 마치 그녀가 아들이 아기였을 때 똑바로 세우고 받쳐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숙여진 머리는 더 이상 똑바로 설 수가 없다. 피가 넘쳐흐르는 그의

머리는 무겁게 가슴에 안겨 있다. 그의 눈은 감겨져 있다. 그는 마리아를 더 이상 바라

볼 수 없다. 안겨있는 예수님의 자세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에 있었던 아기의 자세이

다. 그리고 예수의 등에는 노아의 홍수 때, 방주로 돌아 온 비둘기처럼 부리에 올리브

잎을 물고 있다. 이것은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일깨운다. 그의 죽음이 세상을 구원하

였다는 증거의 표지이다. 마리아의 초록색 외투는 말씀에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교회의 표상이다. 즉 절망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교

회 구성원들의 믿음을 말해주고 있다. 두 개의 해골에서 어두운 눈구멍이 그림 감상

자를 쳐다본다. 해골의 눈들은 호기심에 차서 뻔뻔하게 바위틈을 통해 바라본다. 피

투성이가 된 이 사람의 죽음으로 죽음이 궁극적으로 극복되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

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1이하). 이런 연관성이 두 개

의 해골(아담과 하와)로 암시되었다. 교부들의 전승에 따르면, 골고타는 아담의 무덤

이라고 한다. 열린 무덤 사이로 해골이 드러난 것은 부활의 표징이다.

 

                  제14처 무덤에 묻히심
 

'그러고 나서 그는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다'

때는 안식일 전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율법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을 금하

고 있다. 그런 사건의 진행이 어땠는가에 대해 전승은 아마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

을 중시했을 것이다. 처형 후 이제 누가 매장을 떠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히

해야 했다. 심하게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외에, 행동할 수 있었던 남자 한 명과,

아마도 안식일이 지난 후 죽은 자를 어떻게 돌볼 수 있을지를 생각해둔 여인들이 분

명히 있었을 것이다. 랍비 예수에 대한 성실함, 고통 속에서의 객관적 사고, 그의 죽은

몸에 대한 경외심 등을 이 텍스트에서 느낄 수 있다. 그 다음의 일이 모든 인간적인

경험을 부수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특히 정밀하게 재현

했을 것이다. 마치 무덤 내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은 매장 장면의 그림을 이것

말고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두운 공간, 즉 바위 무덤 안으로 인도되어진다. 수건으

로 싸매어진 예수가 있다. 그의 상처에서 나온 피가 붕대에 배어있다. 이 사람이 정말

로 몇 시간 전에 죽은 그 처형당한 사람이라는 표시이다. 그렇지만 캄캄해야 할 무덤

안에서 이 사람의 몸은 빛을 내고 있다. 죽은 자의 머리 위쪽에서는 부활의 신비의 빛

이 강렬하게 반짝이고, 조심스러운 표징 속에서 부활의 신비를 볼 수 있다. 신경에서

우리에게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는 짧은 신앙고

백을 하고 있다. 남녀 제자들의 증언은 부활절 이후의 만남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매장과 안식일 다음날 아침 사이에는 신비가 놓여있

다. 약한 빛이 앞쪽으로 굴려진 돌 사이를 통해 무덤 안으로 스며든다. 첫 번째 연한

밝음은 떠오르는 태양의 전령이다. 이것은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 이상

이다.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끝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시작이다.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새 날의 시작인 것이다. 부활절 아침의 예고는 모든 무덤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고,

또한 우리를 잠들게 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암시한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예수향기와기도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