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되찾아야 할 인심과 버려야 할 수심

2010. 2. 16. 오전 10:3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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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 어린 시절 이맘때 아이들은 추워도 동네 어귀 방앗간에 모이곤 했습니다. 떡을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가는 어른들은 그냥 가는 법이 없이 시끄럽게 떠들며 나대서 정신 사납게 했던 우리 동네 꼬마들에게 따끈따끈한 가래떡을 조금씩 떼어주시곤 했습니다. 그것으로 팍팍한 생활에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았을 ‘후한 인심’의 짐을 내려놓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설날 오후 동네 골목은 모처럼 아이들의 군것질로 생기가 돕니다. 콩나물이나 두부 심부름만 하며 익혔던 구멍가게 주인아줌마에게 여봐란듯이 세뱃돈을 내밀며 나만의 쇼핑(?)을 한 뿌듯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았으면 좋았던 그때가 있었습니다. 그날을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사람의 살아있는 따뜻한 인심(人心)입니다.
이제는 모두가 이산가족입니다. 명절이라도 서로 얼굴조차 보기 힘듭니다. 몇십만 대의 차량이 서울을 빠져나갔다고 자랑하고, 비행기 좌석과 유명 관광지 숙박업소의 예약이 다 찼다고 자랑(?)합니다. 다른 한편 노부모 뵐면목 없다며 외톨이로 지내야만 하는 사람들, 해체된 가정의 멍에를 짊어진 사람들, 일이 바빠 찾아뵙지 못한다고 둘러대며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감당할수 없는 생활고에 쓰러질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남들 다 고향을 찾고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데,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소외된 이웃이 있다며 그럴듯하게 감성을 자극하는 뉴스는 단골메뉴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같은 날이 빨리 끝났으면 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고, 그 대신 약육강식의 수심(獸心)이 맹위를 떨친 탓입니다.
1독서는 하느님과 인간이 축복과 은혜와 평화의 관계를 맺었음을 전합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복과 은혜와 평화가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돈을 찬미합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우리는 허리띠를 풀고 등불을 꺼놓고 돈을 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돈으로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해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루카 12,45 참조). 그리고 여전히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며 각오를 다집니다. 돈 많이 버는 것을 ‘경제발전(성장)’이라 그럴듯하게 부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외면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경제와 돈을 주인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경제란 것이 인간의 삶에 필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이며, 사회의 여러 분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데도 말입니다. 하느님의 복과 은혜와 평화가 스며 있는 인심(人心)을 버리면 사생결단과 무한경쟁의 수심(獸心)이 위세를 떨칠수밖에 없습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 부를 만합니다. 민족의 명절 설입니다.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이며, 얻
은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인심을 잃고 수심을 얻은 것은 아닌지요. 이제 깨어나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읍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다시 부릅시다.
“그들이 이렇게…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아멘.

정웅모 신부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신수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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