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노래

2014. 4. 25. 오전 7:26:09

글자

부활의 노래


그분이 무참하게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도망쳤다.
도망친 곳에서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글수록
그분의 사랑이 잠긴 문을 뚫고
그분이 살아 계실 때보다 더 진하게 느껴져 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이 묻히신 무덤으로(성토요일),
그분이 처형당한 십자가로(성금요일), 그분이 당신의 몸을 쪼개어
내놓으신 최후의 만찬장(성목요일)으로 향한다.
그분의 죽음에서 비로소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분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사랑을 느끼게 하며
그들의(우리의)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리셨다.
부활하게 해주셨다. 다시 사랑하게 해 주셨다.
그분은 당신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라기보다
그들을(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부활시키기 위해 돌아가셨다.

다시 살아난 그들(우리)에게 그분은
이제 더 이상 생명이 없는 곳,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곳,
시체를 묻어두는 곳, 무덤 속에 계실 수 없었다.
그분의 무덤에는 “여기에 ooo 이 잠들어 있다”라는
비석이 세워질 수 없었다. 대신 “그분은 부활하셨다”라는
천사의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분은 “죽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요한 묵시록 1,18)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당신 몸을 쪼개어 나눠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그분은 그들의(우리의) 마음 안에 불같이 살아나셨다.

그분은 죽으심으로써 그들이(우리가)
당신의 살아계심을 찬미하며 부활의 노래를 부르게 해주셨다.
그들이(우리가) 그분께서 부활하셨다고
할렐루야 노래를 한다면 그들도(우리도)
또한 그분처럼 부활하기 위해서이다.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서로를 부활시키는 노래였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함으로써 서로 용서를 느끼고
서로 살리고 서로 부활하게 해주는 기도였다.

그분의 부활은 단순히 고생 후에 낙이 온다는
해피 엔드를 우리에게 전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분의 부활은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무덤 속의
차가운 시체는 부활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분의 부활은 성삼일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자들이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그분께서 자기 몸을 쪼개어 나누어주고(성목요일),
자기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놓고(성금요일),
그렇게 무덤에 묻히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그분이 식탁에서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부활하셨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의 희망은 그분처럼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희망이요 인류의 희망이다.
부활이 인류의 희망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 남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쪼개고(성목요일), 남을 위하여 죽고(성금요일),
남을 위하여 무덤에 묻히는 일(성토요일)을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극복되기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희망은 성삼일을 건너뛰어서는 결코 실현할 수 없으며,
자기만의 부활을 꿈꾸는 장밋빛 환상으로는 채울 수 없다.
부활한 예수의 이름으로 자기만이 부활의 기쁨을 누리겠다는
꿈을 꾸는 데서 깨어나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맹신과 광신을 벗어나는 것은 인류의 과제이다.

- 이제민 신부님 -

댓글 1

  • 2014년 4월 28일 오후 9:56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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