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밖 - 최대의 순교 성지
서소문 밖 형장은 현재 서소문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서소문 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바로 사직단(지금의 사직 공원에 위치) 우측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양의 성문 밖이란 점도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으므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으며,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가 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렇듯 잔인한 대우와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첫 순교자들로부터 80여 년 뒤인 1887년에 블랑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렛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고 4년 뒤에는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893년에는 약현 성당(사적 제 252호)이 완공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다)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제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바르바라)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서소문 밖은 분명 한국 교회 최대의 순교 성지였다. 103위 성인 중 44명이 이곳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교회 측에서는 시성식이 이루어지던 1984년에 순교 기념탑을 서소문 공원 안에 건립하였으니 지금은 재개발 때문에 훼손된 상태이다. [편집자 주 : 1999년 성령강림 대축일에 새로운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졌다]
역사는 우연일 수 없다. 우리의 복음사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섭리를 말하곤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체포, 투옥, 포도청과 형조에서의 형벌, 서소문 밖에서의 죽음, 이들은 모두 복음의 고리를 이루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섭리요 한국 순교사의 맥이다. 따라서 형리들이 채찍질하는 수레의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수만은 순교자들이 '착하게 살고 영생의 복락을 얻기 위해 올바른 길을 걷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삶을 살아왔다면, 순교 성지 서소문 밖 형장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결코 초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3월호]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06:00 | 미사 일정은 중림동약현 성당을 포함한 것입니다. |
| 09:30 | 청소년미사 | ||
| 11:00 | 교중미사 | ||
| 18:00 | 청년미사 | ||
| 평일미사 | 월 | 06:00 | |
| 화 | 10:00 | ||
| 19:00 | |||
| 수 | 06:00 | ||
| 19:00 | |||
| 목 | 10:00 | ||
| 19:00 | |||
| 금 | 10:00 | 순교자현양미사(서소문 공원 내 성지에서) | |
| 토 | 16:00 | 어린이미사 | |
| 18:00 | 특전미사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확인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