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한 부자
오늘 복음에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라는 제목이 붙는다.
이 비유 이야기는 라자로가 아닌 부자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라자로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볼 때 줄거리는 이렇다.
라자로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였고 다음 생애에서 행복해 질 것이다.
그리고 부자가 고통 받는 모습을 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단순한 이야기보다는 부자들에게 그들의 무관심에
대한 꾸짖음으로 그들 면전에서 부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의 주인공은 부자다.
그런데 주인공의 이름이 없다.
가난한 자인 '라자로'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부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표현되지 않고 그저 '부자'로 소개된다.
왜 그런 것일까?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부자들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따라 스스로를 규정하는 습성이 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보다 자신이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가 자신을
더 잘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다.
부유함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내적 인간"(2코린 4:16)에 장애를 주어 우리가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모르는 바로 그 지점에서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다른 이들이 누구인가를 보기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 가에만 관심을 둔다.
다른 사람들은 부자의 집 대문 앞에 있는 가난한 이를 보았다.
부자의 눈에는 그가 보이지 않는다.
가진 것에 따라 그 사람을 인식하는 부자에게는 가난한 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존재인식 센서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부자는 라자로에게 친절하지도 못되게 굴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중립적인 모습이다.
이야기의 맥락을 볼 때 부자의 태도는 '중립적 무관심'이다.
이것이 문제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이 '중립적 무관심' 때문에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슬퍼하는 '젊은 부자 청년'(루카 18:23)을 보자.
자신의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슬픔에 빠진 청년이다.
그는 자신을 자신의 재물과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재물 없이는 그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이다.
그 좁은 문은 우리 존재에 꼭 필요한 것만을 지닌 자만이 통과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좁은 문을 통과하기에 필요한 날씬함을 이루어 준다.
부자는 자신의 다섯 아들들에게 이를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바로 우리가 나중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보여야 하는 것이다.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앙교육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