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만 찾는 하느님
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첫 번째 모습으로, 하느
님과 ‘함께 있는 것’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기’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우리가 많이 듣고 쓰는 표현인데요.
‘현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이 현존이 ‘물리적’ 현존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건물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모르는 사람과 같이 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물리적으로 함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의 삶에
‘현존’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나와는 상관없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할 때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다고 하면 어떨까요?
출근해 있어도 온종일 ‘몸은 어떤가?’ ‘병원엔 다녀왔나?’ ‘약은 챙겨 먹었나?’ 하고
걱정하겠죠.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그 사람의 하루 안에 그 가족 구성원은 분명히 현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성당에서, 성체 앞에 앉아있을 때만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의 구체적인 순간들 안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죠.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긴 한데, 쉽지 않죠? 자꾸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평소 별 탈이 없을 때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내다가, 어려움이나 힘든 일이
닥치면 하느님을 찾곤 합니다.
그리곤 생각하죠. ‘내가 또 하느님을 잊고 지냈구나! 아쉬울 때만 하느님을 찾는구나!’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듭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요?
본당에서 초등부 저학년 신앙학교 때 물놀이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한참을 재밌게 뛰어다니다가, 제 근처로 오면 두 팔을 벌려 제게 안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넘어진 아이가 있어서 얼른 가서 일으켜 세우려고 하면, 아이는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울면서 자기 엄마 아빠를 찾아 뛰어가는 겁니다.
저야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아이 부모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요 녀석 봐라? 신나게 놀 때는 우릴 찾지도 않더니, 넘어져서 아프고 서러우니까
그제야 찾아오네?’ 하고 괘씸하게 생각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아이가 엄마 아빠를 기억하든 못 하든, 달려가 찾든 찾지 않든, 부모는 늘 아이와 함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부모를 찾더라도 부모는 그 자녀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지내더라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만 하느님을 찾더라도,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마다하지 않고
반겨주십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것, 내가 어떤 모습이든 간에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영성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얼마 전 장학생들을 위한 미사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말씀의 전례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신자석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생 한 명이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맥박과 호흡마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의를 입은 채로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아이는 의식을 찾았고 함께 있던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급히 오토바이에 태워 응급실로 보냈지만, 아이는 5시간을 대기하고 나서야 의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대로 집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무척이나 분노했지만, 다행히 요셉의원 소아과 진료가 다음 날이었기에
검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아찔한 경험이었지만 아이가 별 탈 없이 깨어났음에, 또 우리가 병원이라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도 있습니다.
어느 월요일, 의무원장 선생님께서 급하게 제게 오셨습니다.
그날도 진료가 있는 날이기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던 저는, 요셉의원 입구에서
조그만 상자를 든 모자(母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날 새벽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숨을 쉬지 않는 것을
발견, 조그만 상자에 시신을 뉘어 장례를 치러줄 성당을 찾아다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월요일이었고 열려있는 곳이 없어 요셉의원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제의만 급하게 입고, 분향도 성가도 없이 고별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의원은 이곳 주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병원입니다.
따라서 가벼운 병이나 상처뿐 아니라 심각한 질병으로도 많은 환자분이
찾아오십니다.
이런 환자분들을 위해 각종 검사와 수술, 입원 치료 심지어는 식료품 지원을 하고
집을 지어드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는 기도와 미사 봉헌 외에 해드릴 게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생각보다 죽음은 더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는 결국 우리가 영원한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묵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는 우리는, 사실 영원한 삶으로 부름을 받았고 죽음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만들 것인가, 이것은 결국 우리의 신앙에 달려있습니다.
즉 우리가 죽음을 믿을지, 영원한 생명을 믿을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치유는 다름 아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이 땅에서 드러내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믿는다면 치유란 아무 소용 없는 것이 됩니다.
죽음이 마지막이라면 삶을 사랑할 이유도, 희망을 품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단지 과정이기에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나아갑니다.
영원하고도 온전한 천상의 생명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 치유를 바랍니다.
결국, 요셉의원이 나아갈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환자들에게는 치유를, 그리고 돌아가신 연령들에게는 기도를 바칩니다.
이 모든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희망을 향하고 있습니다.
-민범식 안토니오 신부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홍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