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회?'

2019. 2. 18. 오전 6:19:13

글자

'고구마 회?'

 

 

얼마 전 청년들과 식사를 하다, 본당일로 제주도에 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청년이 "그럼 '고구마 회' 드세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고등어 회'를 잘못 말한 것이어서 한참 웃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고구마 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단어였습니다. 보편적으로 언어는 인간의 생각을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대신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 수학이나 논리학같은 다른 학문의 도움을 통해 언어의 한계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문장은 반대로 "내 언어의 한계를 확장하면 내 세계의 한계를 확장할 수 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화 '컨택트(Arrival, 2017년 개봉)'는 외계 생명체의 언어라는 특이한 소재로 이런 주제를 재미있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고구마 회' 덕분에 이전에 없던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타성에 젖어 아무 생각없이 말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던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언어에 이런 동력(動力)이 있으니 하느님 말씀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살던 시대는 바빌론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회개를 호소하며 하느님의 심판을 알립니다. 하지만 타성에 젖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조롱하거나 위협하기도 하고, 심지어 가족들의 외면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를 '눈물과 수난의 예언자'라 부르기도 합니다. 1독서는 하느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이런 소명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인간적 차원에서 그의 삶은 분명 괴롭고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말씀은 그를 요새 성읍과 같이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게 만들어 줍니다. 복음에서도 박해받는 예언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예수님께선 고향 나자렛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해방과, 그 말씀이 듣는 이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며 인간적으로 바라보던 예수님을 도저히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꾸짖는 예수님을 죽이려 들기까지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예언직으로 초대를 받고, 이를 위해 하느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며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삶이 세상의 눈으로는 어리석어 보이고, 원치 않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적인 모습에 머무르거나, 때론 이마저 외면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비록 지금은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고 생각하고 헤아리지만,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은 머지않아 우리가 주님과 얼굴을 마주 보며 그분을 온전히 알게 할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그의 생애를 생각하면 단순히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근거를 둔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고구마 회'라는 표현은 평소 말을 많이 할 수 밖에 없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늘 그분 가까이 있지만 오히려 타성에 젖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동시에 예레미야와 바오로 그리고 예수님의 모범을 통해 이겨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내 안에 새기며 이 세상을 하느님나라로 키워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조문혁 안드레아 신부 (마두동 부주임)-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기도.묵상 글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