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정의 요건
세 살 짜리 아들이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며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이거 먹어도 돼요?"
엄마는 우유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유통기한이 지났구나. 이거 먹으면 안 돼. 이건 아빠 거예요."
이 이야기는 오늘날의 가정이 아이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습지만
여실히 보여줍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 아이가 원하지는 않지만 아이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것이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아이에게 하염없이
주고자 하는 것이 이 시대 부모의 양육방식입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아이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아이를 위해서 낯선 이집트 땅으로 이주하여 이방인으로 사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마태 2,13-15).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수고를 감내합니다
(루카 2,22-24).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소년 예수를 잃고는 사흘을 찾아
애타게 헤맵니다(루카 2,41-52).
이처럼 이 시대의 가정도,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도 아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양육방식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두 가정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두 가정이 지향하는 목표점입니다.
아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 가정의 지향점은 사회적 성공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세속적 행복이 이시대 가정의 지향점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이가 있는 부부 신자들과 대화하다 보면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이미 신앙을 가졌지만, 아이에게는 신앙의 선택권을
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이가 종교를 결정할 인지능력이 생길 때까지 아이의 신앙을 유보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결정이 대단히 민주적이고 현대적이며 합리적인 양 여기며
자신의 결정에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단히 모순적입니다.
유독 아이의 종교적 자유는 그토록 보장해 주는 그들이 세속적 행복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있어서는 아이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학원에 가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학원으로 내몹니다.
그들에게 아이의 성적 향상은 숫자로 증명되는 행복인 듯합니다.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신앙이라는 것을 좋은 것으로
느끼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살아보니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체험적
민감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경험해서 필요하며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억지로라도 줄 줄 압니다.
그런데 유독 신앙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신앙을
좋은 것으로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 마리아, 요셉 가정의 지향점은 '하느님'이었습니다.
이 가정은 하느님께서 그들 하나하나를 위해 마련하신 계획을 언제나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한 말을 따라' 이집트로 갔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성전에 봉헌했으며, '신앙관습에 따라’아이와 함께 예루살렘을
순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인간이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잘 주실는지"(루카 11,13절)를
체험했습니다.
결국 이 가정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에 행복"
(루카1,45)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성가정으로서 모든 가정의 본보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금기종 안드레아 신부 (일산 부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