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밥이 되신 우리 주님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성인 예비자들에게 찰고 때마다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빵의 모습으로 오시는가?'였다.
우선 말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미국의 연합군 포로들이
다른 수용소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들은 맨발에 누더기 차림의 초라한 모습으로 거의 100km나 되는 거리를 걸어
다른 수용소에 도착했다.
그들은 새로운 수용소에 도착해 가장 원하는 요구사항을 간곡히 전했다.
그것은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먹을 것이 아니고, 헤진 옷을 바꿔달라는
것도 아니고, 부르튼 발의 상처를 치료할 약품도 아니었다.
그들의 유일한 요구사항은 바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포로들은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모두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미사에 참례했다는 '대박', '이거 실화냐'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얼마나 미사에 굶주림과 갈증을 느꼈으면, 그 지친 몸으로 가장 먼저 미사봉헌을
원했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자문해 본다.
오늘도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어 이 제대 위에서 희생 제물이 되어
빵으로 오시는 예수님께,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일까?
우릴 위해 갈리고 씹히고 잘려 소화되시어 그렇게 우리와 하나 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위해, 과연 나는 어떤 몸과 마음을 봉헌하고 있는가?
성찬례는 이렇게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활짝 열어젖힘으로써 서로의 지체, 곧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신비다.
그럼에도 나는 과연 다른 이에게서 그리스도를 바라본 적이 있으며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 다가간 적이 있는가! 성찬의 친교는 내 옆에 있는 사람,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물론, 멀리 떨어진 형제와도 한 가족으로
일치시키는 기적임을 깨닫지 못하는 내 흉측한 위선의 자아를 바라본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명한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내 눈을 감기세요.'라는 詩의 일부를 보면, 애끓는 사랑이 일으키는 변화가
잘 묘사되어 있다.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이야말로 성체를 향해 우리가 지녀야 할 그리고 고백해야 할 마음이 아닐까.
그분의 몸을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마음을 가져본 적이 언제인지,
이것이 사랑인지 모르고 무관심했던 적이 얼마나 자주 반복되고 있는지.
빵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예수님의 피 끓는 사랑의 눈망울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 개개인의 모습에서, 마음을 닫고 시선을 피하는 완고하고
이기적인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
이라는 구체적인 약속을 하셨다.
예수님의 손길은 성체성사에 고스란히 담겨 우리에게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성체성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세주의 몸과 피로 마련된 잔칫상이다.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은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 죄 많고 교만한
인간들에게 내어 주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번뜩 영혼과 마음과 육신을 관통하며 떠오르는 생각 하나. 과연 지금
예수님께서 내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 이웃과 가족들에게 얼마나
드러나고 있는지, 혹여 나의 예수님을 향한 불충실성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되도록 어둠을 허락지 않겠다는 깨달음이다.
오늘은 허울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닌, 빵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내 자신이 빵이 되어
내어주는 진정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제자가 될 것을 다짐해 본다.
-설종권 요한 세례자 신부 (수원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