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숨을 쉬고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습니다.
"자기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속에 존재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물어본다면, 우리 가운데 다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 지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보다는 불행할 때가 더 많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불행의 느낌이 우리 뇌리에 더 깊이 강렬하게
각인되어서 그럴 것입니다.
또한 남들과 비교해서 다른 사람은 더 행복한 것 같고 나만 불행하게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똑같습니다.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누구나 행복을 바라며 언제나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욕심을 버리지 못함으로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서든 물질에서든, 우리는 모든 것에서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늘 행복하면서도 행복하다는 것을 잊고 집착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우리 욕망의 어둠은 우리에게 쉽사리 행복의 빛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굳이 행복을 찾지 않아도 이미 행복이 자기 속에 있는 걸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할까요?
그 해답은 바로 ‘성령’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모습이 장엄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성령은 바벨탑 사건으로 갈라졌던 언어들을 하나로 일치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이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치와 사랑의 원리가 되십니다.
코린토 1서의 말씀은 이러한 일치의 성령의 모습을 찬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이기에 서로 간에 어떤 차별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넘겨주십니다.
여기서 ‘숨’은 성령으로 묘사됩니다.
하느님의 숨이 창조를 하셨고, 하느님의 숨이 당신 자신과 똑같은 말씀이신
성자가 되셨듯이, 성령이신 숨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일치시키고 구분 짓게
만드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숨을 받은 우리는 날마다 숨을 쉬며,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맞게
세상을 성화시키며, 바른 말을 쓰고, 일치와 사랑을 실천할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숨을 쉴 때마다 생명인 그 숨에 대해 감사드려야 합니다.
내가 숨을 쉴 때마다 감사를 드린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삶일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삶은 분명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숨’이 있습니다.
강에도 숨이 있습니다.
이 숨을 끊어버리고 인공호흡기를 가져다 강제로 숨 쉬게 한다면,
그 생명은 살아있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욕심과 안락을 위한
목적으로 자꾸만 자꾸만 자연의 숨, 생명의 숨을 끊어버린다면,
인간의 숨도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숨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숨을 함께 쉬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하고 경이로운 일인가요?
식물도 동물도 우리와 함께 숨을 쉬며 하느님의 숨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마지막 편 마지막 절이 이 세상 만물에게 이렇게 선포하고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하느님 찬양의 표현일 것입니다.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시편 150,6)
고귀한 하느님의 숨을 간직한 그대여, 용기를 내십시오.
이미 그대가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설종권 요한 세례자 신부 (수원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