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성보다 더 효율적인 것은

2016. 12. 15. 오전 6: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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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보다 더 효율적인 것은

저는 현재 자립지원관이라는 생활시설에서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사실상 스무 살이 넘은 청년들입니다. 이들은 청소년 기본법상 24세까지만 허용되는 청소년 복지 혜택의 끝자락에 있는 청소년들입니다. 가정 폭력과 가족 해체, 그리고 말 못할 수많은 사연을 안고 가출하여 10대를 불행하게 보낸 이들입니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계속 넘어지는 이들에게 불행히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들을 억지로라도 자립시키기 위해서 저는 처음에는 의욕을 앞세워 짧은 시간 안에 자립시켜야 한다는 이유와 효율적인 운영을 핑계로 이런 저런 규칙도 많이 만들고 다양한 교육을 억지로라도 듣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초반에 그 청소년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점차 급한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고 규칙을 줄이고, 억지로 교육을 시키기보다 그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주저앉아만 있던 청소년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스스로 일어서기 시작하였습니다. 적어도 사람에게 만큼은, 효율적인 방법이 비효율적인 방법보다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는 역설을 깨달았고, 사실 지금도 계속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대림시기에 왜 예수님께서 그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에 대해 한번쯤은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가장 하느님답게 오시는 방법은 남의 동네에서, 그것도 마구간에서 초라하게 사람으로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라, 화려하고 장엄하게 천사들을 거느리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뽑으실 때는 또 어떠하셨습니까? 자신을 따르는 무수한 영향력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제외하고 가장 초라한 이들을 뽑으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도 아픈 사람을 보시면 외면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복음 전파의 효율성을 생각하자면 결코 그렇게 하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원시인처럼 먹고 옷을 입으며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 외딴 광야에서 아무리 떠들어 보았자 누가 듣고 있겠습니까?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큰 도시의 광장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 몇 명을 동원해서 군중을 모으고, 정치인들과 친분을 쌓아 그들의 협조를 받으며 강연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그 효율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그 비효율적인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 반해 온 백성이 그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줄을 섭니다. 심지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조차 줄을 서고 세례를 받습니다. 요한이 자신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효율성이 주는 미지의 감동에 이끌려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결코 효율성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효율성만 외치다가 정작 중요한 '사람'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불행들이 이 '효율성'이란 매력적인 이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 특히 인권주일로 시작되는 사회교리 주간에 '무엇이 더 효율적인가'가 아닌 '무엇이 더 사람다운가'를 더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효율성보다 더 효율적인 것은 사람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태경 바오로 신부(인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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