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는 것이 쉬우면 좋겠는데
신학생들은 신학교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사람들과 생활하다 보니,
작고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로 인해 관계 안에서 내적인 불편함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신학생들은 그런 어려움을 고해성사를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즉, 성사를 통해 받은 은총으로
자신이 먼저 상대에게 다가서는 노력의 과정에서 화해의 맛을 체험하게 된다.
신학생들은 상대에게 먼저 다가서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인식하고 있지만,
용기를 내는 순간 은총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처지에서 보면 가혹한 말씀일 것이다.
‘서너 번’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것의 수십 배를 해야 하다니….
예수님도 인간이셨으면서 인간의 연약하기만 한 용서의 능력과 한계를
모르셨을까? 결국, 용서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얻기 위해,
마음을 열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힘든 문제를 하나 꼽으라면 아마도 타인과의 관계일 것이다.
나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갈등이나 문제는 언제나 상대방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상대 역시 문제의 원인은 그의 상대인 ‘나’로부터
발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상대방이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상대 역시 나에게 그것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서로가 ‘상대의 탓’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화해의 길은 요원할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먼저 화해를 위한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할지 모른다. 때로는
그러한 나의 아름다운 노력이 상대에게 거부당하고 역이용 당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신앙인들은 인내심을 갖고 상대에게 다가서야 할 것이다.
세상의 논리대로 합리성과 냉철한 이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으로 상대에게 다가서야 한다. 남북 관계 안에서도
상대의 회개를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할 때는 통일의 길이 요원하지만,
예수님의 정신으로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비록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속더라도, 화가 나더라도 인내하며 꾸준히 노력한다면 또 다른 길이 보일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운명을 바꾸어 주시듯이'(신명 30,3),
예수님에게서 얻은 사랑의 마음으로 노력할 때,
진정 은총은 우리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서로 용서하려는 마음을 간직하려고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며'(에페 4,32), 은총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노희철 베드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