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와 양의 비유(요한10,1~6)
요한복음에서는 7개의 기적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의 은사를 통해서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 주시지만 영적인 소경들이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느님으로 보지를 못하는 사람들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주님을 만날 때까지 포기하시지 않고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느님으로 볼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양의 속성은 눈은 어두우나 귀는 밝아서 목자의 소리를 잘 들으며, 애정이 깊고 온순하며, 목자의 소리를 듣고 잘 따른다는 것이며 목자는 양들을 비옥한 땅으로 인도하고 물을 먹일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며, 양들을 야수와 도적으로부터 보호하는데,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며 양들인 성도들을 생명의 말씀으로 하늘 나라로 인도하시는 착한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말씀이시기 때문에 말씀으로 인도하는데, 말씀의 문 안에 들어오는 양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눈 먼 양들을 말씀으로 치유하시는데 나타나엘도 예수님께서 "네가 나에게 오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것을 보았다." 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메시아 고백을 했으며, 베드로 사도도 "깊은 곳에 그물을 쳐라." 고 하시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많은 고기를 잡자 메시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율법에 매어있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소경들이므로 요한 9장에서 육적으로, 영적으로 치유를 하시고,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양의 비유와 착한 목자의 예화를 통해서 영적인 소경들을 치유하시는 과정이 나오는데
믿음화가 되고 말씀화가 되어 성전이 이루어져 있는 사람은 기도하는 성전이며, 진리성령 안에서 삶을 살면서 생명을 얻고 또 얻어서 사는 것이고, 말씀화가 되지 않아서 장사하는 성전이 이루어져 있는 사람은 도둑이며 사람들의 영혼을 잡아 죽이는 이리라는 것입니다.
1 "진실히 진실히 말하거니와, 양우리의 문(뒤라)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요 강도(이사야서 56,11)입니다.
설명- '양우리의 문'할 때 이 문은 말씀의 문을 의미 합니다. 골로사이서 4,3 에 "하느님이 말씀의 문을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오." 양우리는 예수님이시고 양들은 성도들을 상징하며 예수님을 받아 들여 세례를 받고 현재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때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데로 넘어 들어오다.' 에서 '넘어 들어오다'라는 헬라말은 '아나바이노' 인데 이 뜻은 '올라오다', 또는 '넘어오다'라는 말입니다.
묵시록 13,1 에서 "짐승 하나가 바다(육을 상징)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묵시록 13,11 에서는 "짐승 하나가 땅(땅을 상징)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짐승, 사탄이 올라오고 넘어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강도 도둑은 거짓 예언자 그릇된 지도자, 즉 영의 말을 육의 양식으로 풀어주는 자를 '강도, 도둑, 살인자, 이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문(말씀의 문)으로 들어 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입니다,
3 문지기(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데리고 나갑니다.
설명- '문을 열어주다' 에서 문은 말씀을 말하고, '열다'라는 헬라말은 '아노이고' 인데 마태 5,1 에서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고 말씀을 하실 때를 말하며, 묵시록 5,5 에서 두루마리(성경 말씀)를 열고, 일곱 봉인를 펼 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목소리를 듣습니다.'에서 이 목소리는 '포네'인데, 이 '포네'는 '포스' 즉 빛이라는 말에서 유래하는데 같은 어원이며 말씀의 소리를 들음에서 빛이 오는데 소리와 빛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즉 소리와 빛은 말씀과 관계를 맺을 때 오는 것입니다.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데리고 나갑니다.'라는 뜻은 성경 말씀을 따라 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고 말씀 순종하면서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4 양들을 모두 이끌어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따라갑니다. 그의 목소리(말씀)를 알기 때문입니다.
설명- 말씀을 아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입니다.(요한 17,3)
5 낯선 이라면 양들이 결코 따라가지 않고 피해 달아날 것입니다. 낯선 이의 목소리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명: '낯선 이'라는 뜻은 묵시록 16,13 에서 "나는 또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알로트리오) 셋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로트리오'는 옛뱀 사탄 마귀 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이라고 하니까 나그네를 생각하지만 성도들은 사탄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 예수께서 이 수수께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
착한 목자(요한 10,7~21)
착한 목자는 히브리어 '토오브' 라는 말로 좋다, 선하다라는 뜻이고 헬라말로는'아가도스'이며, 선하다, 착하다라는 뜻으로 하느님에게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즉 착한 목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신부님들은 예수님의 대리자시라는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가지인 우리들이 연결이 되어 있어야 좋은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성경 말씀과 관계를 맺을 때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7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말하거니와 나는 양들의 문입니다.
설명- 양우리는 골방=곡간=초막=성전=예수님=말씀=성령을 상징합니다. '양들의 문(말씀의 문)으로 들어 갈 때' 라는 뜻은 말씀을 깨닫고 따라가는 자는 그리스도의 양이고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가는 자는 도둑(튜다-테우다스와 유다. 사도 5,36~37 참조)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루어져 있지 않는 자가 예수님께 돌을 던지고 못을 박은 자들입니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요 강도입니다.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설명: 생명의 말씀인 레마를 주지 못한 사람이 도둑이요 이리이며 영적인 살인자들입니다.
9 나는 문입니다. 나를 통해 들어오면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고 드나들며 목초를 찾아 얻을 것입니다.
설명- '나는 양들의 문이다.' 라고 할 때 이 '이다'라는 에이미(eimi)동사는 현재동사이며 예수님은 시공간이 없이 존재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10 도둑이 온 것은 다만 도둑질하고 잡아 죽이고 망치려는 것이지만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설명- '망치려는 것이지만' 할 때 '망친다'는 뜻은 '헬라말로 '아포뤼미'라는 말은 영혼을 멸망시킨다는 뜻입니다.
11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설명- '나는 착한 목자이다.' 라고 할 때 이 '이다'도 에이미 동사로서, 자존자이며 시공간이 없이 존재하는 자존자인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며,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시편 23,1. 이사야서 40,11)
12 목자 아닌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므로 버리고 달아납니다.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흩어지게 합니다.
설명- 기도하는 성전=진리성령=생명을 얻고 또 얻게 함. 장사하는 성전=도둑=잡아 죽임
13 그는 삯꾼이라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설명: 삯군은 돈을 보고 봉사하므로 어려움이 생기면 도망갑니다.
14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압니다.
설명- 같은 영의 양식을 먹었고 말씀이 이루어져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내 안의 열매인 사랑의 하느님을 보고 느끼고 만져서 아는 것입니다.
15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해 목숨('프쉬게' 라는 말은 목숨, 혼, 마음을 의미합니다.)을 내놓습니다.
16 이 우리에 들어 있지 않은 내 양들(육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합니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듣고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입니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고자 목숨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18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지 못합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놓습니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다시 얻을 권한도 있습니다. 이는 내가 아버지한테서 받은 명령입니다."
설명- 명령이 말씀이고 계명입니다.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 사이에서 다시 분열이 생겼다.
설명- 분열-영과 육으로 갈라짐.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어짐.
20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는 귀신들려 미쳤소. 무엇하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들 있소?"
설명- 육에 있는 영적인 소경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못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고 심판의 대상에 있는 자들입니다. 말씀이 아니 이루어져 있는 자들입니다.
21 다른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오.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할 수 있단 말이오?" 하였기 때문입니다.
설명- 영적인 소경들이므로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 성전 예화를 통해서 성전이 이루어져야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루어져야 인격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이 내 안에 사랑으로 살아 계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멘!
성전 봉헌절 때의 논쟁(요한 10,22~42)
요한복음 9장에서 실제로 육적인 소경을 치유하시면서 영적인 소경인 이스라엘 민족들과,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과정을 보여 주십니다.
소경이나 나병이나 중풍병은 죄의 결과로 오는 것으로 그 당시 사람들은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새로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절은 우리들 몸 안에 예수님의 몸을 만드는 날입니다. 피와 살인 우리들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서 말씀 육신이 되었을 때, 우리들의 몸 안이 성령이 거처하는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비추어 주셨을 때, 예수님이 그리스도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보고 만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보는 문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고 아가페 사랑으로 보는 사람은 보는 사람이고, 육의 열매인 우리들의 마음의 본능으로 보는 것은 못 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들 안에 들어와서 성령의 빛으로 보여 주셔야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몸 안에 성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화가 된 사람들이 신들입니다.우리들 안에 예수님의 몸을 만드는 날이 주일입니다.
주일 미사 때 말씀의 전례에서 성경 말씀으로 우리들 안에 예수님이 오시며, 성찬의 전례 때, 빵과 포도주 형상 안에 예수님이 인격체 하느님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미사 때, 말씀 안에 또 빵과 포도주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보고, 느끼고, 깨달아서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볼 때 예수님이 그리스도 하느님으로 보이는 것이고, 이웃의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들어 오는 사람이 예수님의 양 우리 안에 들어 오는 양들인 것입니다. 믿음화가 되고 말씀화가 되어서 성전이 이루어져 있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고 의심이 없어지며, 메시아 논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다(요한 10,22~42)
22 그 때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절 축제(하누카 축제)를 지내고 있었는데 겨울철이었다.
설명: 겨울은 구약성경(율법)을 의미하고, 봄은 공관복음(마태, 마르, 루가)을 의미하며, 여름은 요한복음을 상징하며, 가을은 요한 묵시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겨울이라는 뜻은 구약차원인 율법이라는 뜻이고 율법에 있으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태 24,20 "도망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시오." 에서 겨울이나 안식일에 도망가는 것이 어렵다는 뜻도 있지만 겨울도 율법을 의미하고 안식일도 율법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 있으면 심판이 되므로 복음인 예수님께로 와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약인 복음 시대에는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23 예수께서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대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했다."언제까지 우리를 애타게 하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설명: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못 보니까 그리스도 논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에 있으면 영이신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영적인 소경)
2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내가 말했는데도('타레마타'라는 말은 레마의 복수이며 감동받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믿지를 않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레마로 하시는 일을 말합니다)이 나를 증언하고 있건만
설명: 성전이 이루어져 있는 사람이 믿음화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레마 말씀을 믿고 깨달아서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칠성사도 레마말씀 성취로 이루어지며 이것을 성사의 사효라고 하는 것입니다.
26 당신들은 내 양들이 아니라서 믿지 않습니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옵니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들은 영원불변할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설명: 말씀이 이루어져서 말씀육신이 되어 있는 성도들 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9 그들을 나에게 맡기신 내 아버지께서는 만유보다도 크시며 아무도 그분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요한복음 17,21)
31 유대인들이 예수를 치려고 다시 돌을 집어들었다.
설명: 돌은 세상일을 말하며 돌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전서 2,4에서 산 돌이 나오는데 이 산돌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복음을 상징합니다. 창세기 11,3 에서 진흙으로 만든 벽돌이나 모래나 흙은 육을 상징합니다.
3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 가운데 어느 일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 합니까?"
설명: 좋은 일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이 좋은 일입니다(요한 6,40).
33 유대인들이 대답했다. "좋은 일을 해서가 아니라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이오.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기 때문이오."
설명: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죽일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 17,3에서는 한분이신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는데, 육에 있으므로 예수님의 신성을 못 보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성경을 문자로 보고 있으면 영생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3,6에 "문자는 사람을 죽이나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네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다'고 씌어 있지 않습니까?
35 하느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였고 또 성경은 폐기될 수 없는 것이라면
설명: 말씀이 이루어져 있는 사람들이 신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단수인 '신'이라고 씌어 있으나 헬라 원문에는 복수인 '데우스'로 되어 있습니다. 단수일 때는 '데오스' 이고 복수일 때는 '데우스'라고 읽은 것입니다.
모 교파의 교주는 말씀이 이루어져 있는 사람이 신(하느님)이라고 단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번역에는 gods(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천주교나 개신교나 모두 신이라고 단수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말씀화된 사람이 신의 경지에 도달하고 영적인 존재가 되며,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고 성전이 이루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씀화가 된 사람들이 "신들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부활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한 11장에서 죽은 나자로를 예화로 들어서 죽은 자를 살릴 수있는 분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예화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폐기할 수 없다." 라는 말은 성경의 말씀은 완전하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효력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36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해서 당신들이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신 나더러 '신성모독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마시오.
38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한다면 나를 믿지는 않을지언정 그 일만이라도(영생을 주는 일) 믿으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설명: 삼위일체 하느님이 하느님 속성의 열매인 아가페 사랑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느님이 아가페 사랑으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느끼고, 보고, 만나서 기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39 그러자 그들이 또다시 예수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 떠나가셨다.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물러가시다(요한 10,40~42).
예수님께서 육적인 소경을 치유해 주셨는데,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는 것은 말씀화가 되지 아니해서 사랑으로 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예수님 안에서 보지를 못하니까 의심하며 논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못 보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니까,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이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나타나 보이시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숨으시는 것입니다.
40 예수께서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먼저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서 머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몰려왔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요한이 표징을 행한 바는 없지만 그가 이분에 관해 말한 것은 모두 진실이다."
42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