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삶의 길로서의 성찬(성체성사)

2005. 9. 14. 오전 9:23:16

글자
 

삶의 길로서의 성찬


마리아 피에르 엘레브라샤트(CPPS)


  오팔룬(미조리주) 성혈 수녀회 회헌은 "미사를 드리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또 우리 공동체의 노력과 사명이 넘쳐흐르도록 한다."고 진술한다. 실로 성찬은 진정한 삶의 길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길이라고 부른 그 심오한 의미에서의 삶의 길이다.  그것은 세례에서 시작된 삶이 절정에 달한 예식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 글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속활동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도록 하는지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미사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것 자체가 상징이다.  그것은 각 사람이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가까이 모인다는 단순한 행위 이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함께 모이고, 상호작용을 하고, 서로 영향을 주는 행위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예수는 이모임 안에, 정적으로가 아니라, 공동작용하는 영광스런 현존에 의해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방법으로 현존하신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의 상호작용 바로 그 안에서  - 남의 행복을 비는 것이든, 용서하는 것이든, 입당송을 부르거나 인사에 응답하고 참회를 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이든 -  활동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현실을 경축하기 위해서 모여든다.

  따라서, Dominus vobiscum은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는 긍정문으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사이에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긍정하기 때문이다. 개회식은 전체 신자들의 바람을 하나로 모아 우리가 말씀의 전례로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말씀의 전례


  말씀의 전례에서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모인 사람 전체에게 독자적인 메시지를 주시며 아주 인격적이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우리는 말씀의 전례가 대화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살아 있는 상호작용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자체의 확신을 낳으며, 새로운 통찰이 나타나는 중심을 건드린다. 그리고 그 통찰을 실행하는 인간의 의지에 힘을 주면서 그 자체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 심오한 움직임이 아주 부드럽고, 아주 일변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친숙한 비유를 생각해 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자 숨겨 두고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또한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장사꾼과 비슷합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물러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습니다.(마태 13, 44-46)"

  나는 이 성서구절을 수백번 도 더 들었다. 그런데 지난해 그 말은 강한 확신과 힘을 내게 주었다.  전에는 결코 체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 성서 본문이 선포될 때, 나는 이 보물,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해서 좋은 인상을 주겠다는 강박적인 욕구 - 이는 지난 60년 동안 나를 괴롭혀 오던 것인데 - 를 버려야 하겠다는 것을 전존재로 알 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그런 바람만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힘, 하느님의 힘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내가 도달한 태도는 내 인간적인 잠재력 한계 내에 있었다  - 신앙 안에서만 알아볼 수 있는 비전에 의해 불러내질 수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모든 성서 낭독은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하느님의 놀라운 행위를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워,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꿰뚫으며 마음의 생각과 의향을 판단합니다.(히브 4,12)"는 단순한 진리다.

  말씀의 전례가 그 선포하는 바를 어떻게 예식으로 행하는지, 그리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행적"이 오늘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한 사건이 되도록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순 제2 주일(C해)의 성서 본문들을 묵상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것을 두 부분 즉, 각 자체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 그리고 여러 성서 본문이 서로 미치는 영향 안에 존재하는 의미로 나누어서 생각하기로 한다.

  먼저 복음부터 살펴보자, 예수의 변모(루가 9,28-36)에 대한 루가복음은 잘 낭독되면 이야기의 충분한 효과가 있다.  그것을 충분히 음미하기 위해서는 귀로 들어야 한다.  이미지와 사상이 떠오르는 동안, 우리는 산에 오르고 기도하는 것이 - 예수께서는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오르셨다 - 하느님께 이르는 참된 길이 되는 과정을 실제로 체험하게 될 것이며, 오늘날 우리 삶의 상황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여는 역할을 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의 얼굴이 빛나고 그 옷에 광채가 나는 것을 보면 예수의 기도가 그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 즉, 율법과 예언서를 대표하는 분들과 대화하는 동안, 자신의 현재 삶의 상황이 자신의 삶과 선교의 의미와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알 게 된다.  그 진리의 순간은 너무나 강력해서 제자들을 흥분시켰고 베드로 같은 외향적인 제자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고 외치게 된다.  그런데 구름 속에서 또다른 계시가 울린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구름 속에서 울려나온 목소리는, 그동안 예수의 행동 안에서 저절로 드러난 사실 즉 예수가 신인(神人)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이는 내가 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요르단 강가에서 일어난 일을 상기시켜 준다, "거기서 목수로 도착한 예수는 메시야로 떠난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서 그의 사명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는 유대교의 원로들과 왜 그렇게 갈등이 잦은지 의문을 가지고 와서, 이 때문에 단죄받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 게 된다.  그리하여 그 갈등은 예수가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뜻을 들어감으로써, 예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현재 우리 삶의 상황 안에서 그리고 그 상황을 통하여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우리를 부르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예수가 성부의 뜻을 알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인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인간성 자체에 있는 엄청난 가능성 즉,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계획에 "사로잡히는" 것을 기쁘게 깨닫는 능력을 보게 된다.  "이는 내가 택한 아들이니," 하는 말은 도유와 함께 이 현실을 분명히 설명한다.  예수가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확인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사랑으로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또 선포된 것에 그저 현존할 따름이다. 제자들과 함께 말없이 머무는 것이다.

  제1독서(창세 15, 5-12 17-18)는 복음 메시지를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글에는 언급된 것만큼이나 언급되지 않은 것이 많다.  아브람이 수많은 별아래 서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의미심장하게 그와 함께 있다. 하느님은 아브람의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불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사라의 조건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라는 마음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외침에 동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브람의 신앙은 초월적인 생산력을 가졌다.  그리고 나서 아브람은 의식에 참여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들어가는 것을 표현한다. 우리는 전례동안 아브람이 우리와 함께 걷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부서진 조각들 사이를 걷듯이 연기 뿜는 가마와 활활 나는 횃불 사이에 있을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와 맺은 계약을 갱신하도록 허용할 수 있다.  시편 27편은 우리가 미지의 세계로 여행하는 데 빛이 있을 것이며 상처에 대한 치유도 있으리라는 것을 서정적으로 확신시켜 준다.  깨달음의 섬광은 아주 깊고 현실적이다.


    이 내 마음 당신께 아뢰옵고

    그 얼글 나에게서 감추지 마옵소서.

    주님을 기다리며 너는 아귀차거라.

    내 마음 굳게굳게 주님을 기다리라.


  이제 이 전체 묵상을 전례의 역동성 안으로 끼워넣기로 하자.  이것은 마음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다는 첫 번째 전율의 미광만을 인지하는 연무에 싸인 불확실한 제1독서로 시작하는 주제를 보여줄 것이다.  시편을 대화의 형식으로 노래하면 내적인 주제가 표현되고 심화된다.  노래로 참여할 때마다 확신과 희망이 고조된다.

   "주님은 나의 빛 내 구원이시로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는 제2독서에서 바울로의 통찰은 이날 사건의 주제와 잘 들어맞는다.  마지막으로, 복음이 이 여세를 몰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파스카 신비의 현실로 들어가는 길, 그리스도의 길에 있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말씀은 오늘 우리를 위한 사건이 되었다. 강론, 신경, 산자들의 기도는 우리를 더욱 깊이 이끈다.

성찬의 전례


  성찬의 전례 양식이 비교적 고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거기에 참여하는 우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사에 올 때마다 거기서 선포되는 말씀과 전례에 의해 새롭게 된다. 따라서 C해 사순 제2주일에, 우리는 새로운 통찰을 가지고 참여하는 회중으로서,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로 향하는 그리스도의 움직임과 전적으로 동일시하면서, 성찬의 전례를 소개하는 대화로 들어간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의식하면서, 성찬의 전례에 참여한다.  이때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감사 드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러한 자세는 성찬의 기도 내내 지속된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마음 바로 그 안에 살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느님을 향하여 밖으로 향한다.

  말씀의 전례가 시작한 사건에 대한 우리 체험은, 감사송에서 특별히 전례적으로 표현된다.  감사와 찬미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기억하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지금 현존한다는 것을 안다.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 영광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으니,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하여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게 됨을 증명해 주셨나이다.(사순 제2주일 감사송)"  이 감사송의 말들이 말씀의 전례가 시작한 사건을 어떻게 성찬의 기도에 바로 전하는지를 보라.

  이 기도의 중심에는, 이는 모인 신자들의 감사와 찬미의 태도를 나타내고 또 전례적으로 표현해 주는데, 거기서 수많은 면을 가진 다이아몬드, 즉 제정의 말씀과 축성이 빛을 발한다. 여기에 탁월한 이야기, 그것이 말하는 것을 현존시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들으면서 경외심에 가득할 따름이다.  그 본래 배경은 파스카 식사였다.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제정의 말씀과 축성이 선포될 때, 그 거룩한 시간과 장소의 실재가 오늘날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 현존한다.

  이 신성한 말씀들이 발하는 진리의 각 순간에 의해 영향받도록 하면서 이 말씀들을 통과할 때, 우리는 이 다이아몬드의 각 면에서 반짝이는 깨달음과 관계의 섬광을 놓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나누셨다."는 말에서 아브람과 우리 삶이 부서짐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니라." 는 말은 예수가 타보르산에서 통찰한 목적지를 보여주고 우리도 같은 여행을 하도록 초대한다. 행위와 말은 계속된다.

  "...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이 말은 하느님이 아브람과 사라와 맺은 계약의 의미를 열어주며, 우리가 세례 때에 한 계약을 온전히 살도록 새롭게 부른다. 이 날, 진행되고 있는 사건을 전제로 할 때, 가장 적절한 환호 - 고정된 갈채는 실로 -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풀어 주신 구세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일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놀라운 행적, 파스카 신비 - 수난,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심을 또 다정하게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그것을 모두 다시 말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현존시킨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이 행적들을 다시 한 번 음미한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성령의 힘 안에서 한다.  식사에서는 양식을 얻고 사회적인 유대를 맺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우리로 하여금 성신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가 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물론 산자들과 죽은 자들도 기억한다.

  마침 영광송은 그 전의 모든 것을 압축하는 양식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경외와 찬미의 절정에서 외치는 것이다. 그것은 여태가지 기도에서 표현된 마음의 핵심적인 움직임을 요약한다. 성체가 높이 들어올려지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가 울려퍼지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파스카적인 성사 안에서 생생하고 인격적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성령과 더불어"라는 말에서 성삼의 제삼위를 인정하고, 성령이 이 순간에 불러내고 봉하는 일치 안에서 우리가 회중으로서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전율을 느끼기까지 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찬미와 감사"가 가장 활발하고 분명하게 발해지며, 가장 확고하게 확인된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온갖 영예와 영광을 세세에 영원히 받으시나이다!"

  성찬 기도는 긍정하는 응답, 신자들의 참여를 요구했다.  이제 마침 영광송에서 고조되는 찬미의 크레센도는 "아멘"에서 터져나오는 심령적이고 영적인 에너지를 엄청나게 발산한다.  이 아멘은 우리에게 쉼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일이 일어나게 하는 참여요, 약함이요, 의지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아멘은 전체 기도 - 실로 우리 전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다.

  주의 기도는 성체 성사, 거룩한 식사에 참여하는 전주곡이다. 이 식사의 환경은 C해 사순 제2주일에 거행되는 사건 때문에 독자적이다.  같은 음식이 차려 있더라도, 생일 축하 식사와 결혼 기념일 식사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내 살은 참된 음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고 하신 그 음식과 음료를 받아 먹고 마시는 동안, 그리스도 변모의 신비에 들어간다. 우리가 변모되는 신비에 참여하는 이때, 이 성스런 식사에서 전(全) 그리스도를 섭취하여 우리 전존재가 성장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 모여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 맺어지는 사회적인 유대는 오늘날에도 특별한 성격을 지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는 말은 우리가 더욱 의식적으로 결합되고 있는 지금 우리 마음에 울려퍼진다. 우리는 "내(내하느님의) 기쁨이 그분 안에 있는" 신비스런 그리스도가 되는 온전한 의식을 함께 갖는다.

  이날의 사건이 지니는 의미와 효과가 우리 전존재에 스며들게 하는 동안 경외에 찬 침묵의 순간이 필요하다. 영성체 후의 간단한 공동 기도는 회중으로서의 우리가 다시 집중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온전하게 일치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이 아니라 파견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이 성찬의 사건이 "우리 공동체의 노력과 선교에 흘러 넘치도록" 허용할 준비가 된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성찬이 어떻게 우리 삶의 길이 되는지 좀더 분명히 보았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걸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으로서 걷는다. 그리스도는 그분에게 모여들어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 안에서 걷고 계신다.  오늘날 우리는 망설임과 불확실함 속에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는 신비적인 그리스도다. 하느님의 말씀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리고 그리스도의 전적인 자기 증여의 신비 안에서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가운데, 우리는 예수의 사명을 계속 수행할 수 있고, 우리 매일 삶을 통하여 그리고 모든 활동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현존이 되고 체험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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