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부류인가

2007. 4. 1. 오후 8: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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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그 값으로 당신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길을 걷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초라한 나귀를 타고 제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자 
그 모습을 본 군중들도 환호성을 지릅니다.
제자들을 본받아 자신들의 옷을 벗어 길에 깔아 놓고,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손에 쥐고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으신 곳에 평화”를 외칩니다.

환대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히시어, 
십자가형을 받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십니다.
그 광경을 본 군중은 오늘 환호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불과, 며칠... 몇 시간 전만 해도 “다윗의 후손이여, 찬미 받으소서.” 환호하던 군중은... 
이제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돌을 던집니다.

그 무엇이... 군중을 그렇게 변하게 한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몇 사람에 의해 확 달아올랐다가, 금방 꺼져버리는 군중심리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환호하고...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옷을 벗어 길에 펼쳐 놓을 때는 신앙의 눈으로 대했다면, 
이제는 세상 욕망의 눈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 때는 다윗 왕과도 같은 강력한 힘을 지닌 정치적인 
메시아로 대했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초라하고 
힘없는 메시아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러한 군중의 모습과 행동은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간접적인 이유가 됩니다.
사형 선고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 사형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여정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 십자가를 짊어지우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구원과 
부활이 담겨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수난에 중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직,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십자가 안에 구원과 부활이 담겨 있다고 믿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수난 여정에 어떠한 모습으로 있고, 
또한 어떠한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있는가? 없는가? 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수난 복음에 등장하는 가야파, 유다, 수석사제들, 성전 경비대장, 원로, 
어떤 하녀, 율법학자, 빌라도, 군중, 헤로데, 군사, 좌도 등... 이들은
 예수님의 수난에 직접적인 이유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아픔과 비극은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구원의 길에서 영영 벗어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사람들... 곧, 베드로, 사도들, 통곡하는 여자들, 
우도, 백인대장, 아리마태아 요셉,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여자들... 등은 다릅니다.
비록, 이들 또한 예수님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이유가 된다 하더라도, 
구원에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회개와 보속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함께 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부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지금 나는 어느 부류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연히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구원받아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 믿는 그런 사람들 속에 함께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굳게 믿고 싶지만...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리 확실하지는 못합니다.

제 안에 여전히 빌라도의 모습이.. 헤로데의 모습이... 
유다의 모습이 너무도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의탁하며 이 성주간만이라도 더 이상 주님을 향해 
돌을 던지지 말기를... 고난의 길을 걸으시는 주님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런 중간자적인 자세를 버릴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진정,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시어”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그런 부활을 맞고 싶다는 기도를 드려 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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