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큰 고모님은 흰 나리꽃 같은 분이셨습니다.
화단의 한 귀퉁이나,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외진 산골짜기에서 홀로 바람이나 맞고 보내는 나리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꽃이지요.
꽃말이 헌신과 희생이라고 기억하는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큰 고모님은 나리꽃처럼 외롭게 한 평생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결혼하자마자 큰 고모부님이 돌아가셔서 재작년 여든 다섯에 돌아가실 때까지 수절하며 평생을 과부로 사셨으니 까요.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큰 고모님은 언제나 흰 옷을 입고 지내셨습니다.
고모님이 원래 흰 옷을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죄인 연(然)하며 ‘흰옷’으로 상징되어지는 인습의 굴레에 스스로를 가두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흰 옷을 입지 않은 큰 고모님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친척들은 고모님이 첫날밤이나 치르셨는지 모른다고 수군대기도 했습니다. 큰 고모부님이 원래부터 중병을 앓다 이제 더 가망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을 때 결혼식을 올렸다니까요.
그 쪽 사람들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그 사실을 감추었고, 결혼식 때 그 사실을 아신 할아버지도 후회하셨지만, 양반의 집안에서 한번 시집 간 다음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남들이 알까 쉬쉬하며 덮어버렸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큰 고모님은 총각귀신 면케 해주기 위한, 결혼이라는 이름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고모님은 노년에 가끔씩 술을 드시고는 발그레한 얼굴로 “나는 속아서 시집갔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쓸쓸히 웃곤 하셨습니다.
그런 큰 고모님의 모습을 보면 친척들이 하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물론 큰 고모님께 여쭈어 볼 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큰 고모님은 조카인 저희들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양자로 들인, 저보다 열 살쯤 위인 아들이 있긴 했지만, 저희들에게 주시는 큰 고모님의 사랑은 더욱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여름방학만 되면 큰 고모님 댁에 가 열흘이나 보름 넘게, 마치 우리 집처럼 맘 편하게 놀곤 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어려워해야할 사돈집인데도 왜 그토록 마음이 편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큰 고모님 댁은 그 지역에서는 큰소리치는 대지주 집안이었기 때문에 저희 집보다는 모든 면에서 풍족했습니다.
그 당시 저희 집은 점차 몰락해가는 과정에 있어서 쌀을 많이 넣은 밥은 아버지나 잡수실 때였는데, 큰 고모님 댁에는 언제나 하얀 쌀밥이 나왔던 것이 우리가 큰 고모님 댁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집 뒤란에는 사시사철, 가물 때나 겨울에도 맑은 물이 솟아 흘러넘치는 큰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 속 한 켠 에는 여름 내내 수박, 참외, 자두 같은 과일이 잠겨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큰 고모님 댁의 맑은 창호 미닫이 창문이 희붐하게 밝아올 때 들리던 안방의 커다란 괘종소리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저 깊은 땅속으로부터 울려오는 영혼의 소리와도 같이 저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좀 더 커서,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한 떼의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놀기도 했는데, 큰 고모님은 그때에도 한 번도 짜증내시지 않고 끝까지 밥을 해 먹이시며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들이 올 때에는 차비까지 챙겨주시곤 했습니다.
지금도 큰 고모님께 죄송스러운 것은 내가 왜 그토록 철이 없었는지, 왜 그토록 시댁 집안사람들을 의식하셔야 하는 큰 고모님의 처지를 배려하지 못했는지 하는 것입니다.
큰 고모님의 말년은 참으로 불우하셨습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큰 고모님의 노년의 삶은 정상으로부터 한참 일탈(逸脫)된 것이었습니다.
집에 계시지를 못하고, 항상 친정 친척 집들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사시다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야 본인의 집으로 들어 가셨으니까요.
그 이유는 제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군요, 다만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큰 고모님을 돌아가시게 한 병명이 뭔지도 모릅니다.
속병이 있으셨다는 것을 알 뿐.
그리고 돌아가실 때 피를 위 아래로 쏟으셨다는 것만 ‘들어서’ 알 뿐입니다.
제가 그 쪽 사람들에게서 들은 것은,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안녕하시고 식사 잘 하신다는 얘기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병원 입원은 생각조차 않고 있었던 것이지요.
큰 고모님의 장례식 때, 참으로 오랜만에 가 본 큰 고모님 댁은 옛날의 그 집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옛날의 정이 넘쳐흐르던 포근하고 아늑한 집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들이 화석화(化石化)되어 굳어져버린 흔하디흔한 회색 콘크리트 조형물만 서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의 입에 발린 소리를 듣고, 얼굴 바라보는 것도 역겨워 한동안 큰고모님이 누워 계신 곳만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와 하릴없이 모닥불에 장작만 쌓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가끔씩 큰고모님을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큰 고모님이 어디에 계실까 생각해봅니다.
평생 아무런 죄를 짓지 않고, 나리꽃처럼 헌신과 희생과 핍박만을 감수하며 사셨던 큰 고모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어야 한다는 것은 저만의 소망이겠지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저는 압니다.
큰 고모님이 아무리 죄 없이 착하게 사시고, 남만을 위하여 평생을 희생하고 헌신하셨다 하더라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천국에 가 계실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 지옥에 가 계시지도 않으시리라는 것도 확신합니다.
우리 큰 고모님처럼 평생 착하게 사신 분을 지옥에 보내실 주님이 아니시란 것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큰 고모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지금도 가슴 시리도록 후회되는 것은, 왜 제가 큰 고모님께 적극적으로 전교하지 못하여 주님께 인도해드리지 못했던가 하는 점입니다.
저희들의 전교로 저의 아버지와 막내 고모님은 주님을 받아들이시고 세례를 받으셨는데, 제가 그토록 사랑했던 큰 고모님께 전교를 못해 지금 어디 계신지 모르고 있다는 것은 제가 영원히 후회해야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모님, 이제 하느님을 믿고, 성당에도 나가고 그러셔야지요.”
저와 아내가 응석부리듯 그런 말씀을 드릴 때마다 큰 고모님은 조용히 웃으시면서,
“그래, 알았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
그러시면서 돌아가실 때 까지 끝내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혹시 심하게 말씀드리면 공연히 노여움을 타실까봐 저희들도 적극적으로 말씀드리지 못했던 거구요.
저는 전교라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큰 고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새삼 느끼곤 합니다. 그러면서 예비자 교리를 시작할 때면 꼭 한분씩 인도해 오시는 교우 분들께 부러움과 존경심을 같이 느끼게 됩니다.
“내게 저런 능력과 열의만 있었다면 우리 큰 고모님을 그렇게 보내드리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때늦은 후회를 하면서 말입니다.
윤여선(다니엘)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