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두 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며, 눈을 통해 구분하고 판단합니다. 사람에게 두 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눈이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으며, 산과 강,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인들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사람에게 두 눈이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확인할 수 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눈을 갖고 태어났지만 소경이어서 볼 수 없다면 참으로 답답하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도, 자연의 아름다움도 보지 못한다면 그런 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면서 누리는 아름다움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애정과 연민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을 소경이라고 하면서 그 불행이 그들의 부모나 혹은 자신들의 죄 탓이라고 치부해버렸습니다. 그들의 불행과 아픔을 외면하고, 오히려 죄인으로 몰아붙여 이중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죄인입니까? 오히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은 아닐런지요. 사회가 져야할 약자에 대한 책임을 율법이란 이름으로 교묘히 피해나가는 옹색한 책임회피는 아닌지요. 실상 어느 누구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의 장애일 뿐이며 그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병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만이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 이라고 하십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치유되고 모든 사람이 누리는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더 특별한 은총이 베풀어져야 하고 사회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소경은 비록 유다인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비록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마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오히려 앞을 보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의 타락과 추함을 보지 못하게 되고, 그러니 남들보다 더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쉽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그런 눈은 없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한 두 눈을 갖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마음과 욕심이라는 눈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소경이 차라리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눈이 없어도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훨씬 더 세상을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기심과 아집과 욕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모든 것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투정부리는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두 눈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제대로 보며 살아갑시다. 내 가족과 이웃이 함께 살아감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제대로 보고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내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제대로 보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참여합시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오늘 복음의 소경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웃의 소중함과 자연의 소중함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두 눈을 가지고 마음의 소경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주간동안 우리 주위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가지고 살아갑시다. * 천주교 안동교구 화령성당 배인호 베드로 신부
제대로 본다는 것은
2005. 3. 6. 오후 8:21:56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