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 4, 12-23.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네 명의 어부를 제자로 삼으셨다고 말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기록한 책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문서는 구약성서입니다. 따라서 마태오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는 중요한 대목마다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그것이 하느님의 뜻으로 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도 예수님이 가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신 사실이 하느님의 계획대로 된 것이었다고 말하기 위해 구약성서를 인용하였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마르코복음서는 달리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1,14). 그러나 마태오복음서는 우리가 들은 대로 이사야서(8,23)를 인용하여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신 것은 구약성서가 예언한 대로 된 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즈블론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라는 긴 지명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같은 이사야서(9,1)를 인용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요약합니다.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이것은 이사야서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에게 빛을 주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어둠 속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복음서들 안에서도 확인됩니다. 요한복음서(1,4)는 그 서론에서 말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체험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이라는 어둠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사람들이 그 함께 계심을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실천을 요약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그 자구(字句)에 매달려 사람들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버리고 죽이는 인간 어둠의 역사 안으로 율법을 편입시킨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 제사도 사람들을 어둠 속을 헤매게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말하는 건물이었습니다. 인간이 자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것을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느님의 시선이 그 제물 위에 내려오게 하여, 자기가 가진 것을 하느님의 시선에서 새롭게 보겠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노동하여 얻은 것을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이기적 시선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시선에서 그것을 새롭게 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교 제관들은 여러 가지 명목의 제물 봉헌을 강요하여 자기들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가 잘사는 우리 어둠의 역사 안으로 성전제사를 편입시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지도 않으셨고, 성전 제사 의례를 없애자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제사가 그 본연의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말하는 율법과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시기에 율법은 사람을 단죄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하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지침입니다. 제물 봉헌은 물질에 대한 하느님의 욕심을 충족시켜 드리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 노동의 대가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게 하는 길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살기 쉽습니다. 자기 혹은 자기 가족 외의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그것이 사람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자각한 사람은 하느님을 기준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자녀는 부모를 기준으로 주변을 보려 노력합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기에 자기도 그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기에 자기도 베풀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모든 질병과 허약함을 고쳐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사람들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어떤 이유에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불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말은 사람들에게 기쁨이고 행복이라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벌주지 않으십니다. 죄인이라고 버리고 허약하다고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사람들 위에 지도자로 군림하면, 벌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 발생하고, 버려진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 아픈 사람이 치유되고 허약한 사람이 힘과 용기를 얻는 행복한 일이 발생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부르시자 “곧 그물을 버리고” 혹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제자라는 것입니다. 제자 되는 길에는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맹목적으로 혹은 광신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부모를 떠나는 일은 한 순간의 경솔한 결단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심사숙고하여 결정해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이 부르시자 곧 버리고 떠났다고 말하는 것은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주저와 망설임을 극복하고 그분을 따라 나서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인류역사의 어둠 안에 자비롭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실천하여 우리도 그 제자가 되어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업이 어떤 것이든, 우리의 관심사가 어떤 것이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잘 살기 위해 의지했던 이기심의 배와 욕심의 그물을 버리고, 출신과 가문이라는 아버지도 떠나서 예수님 안에서 깨달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참다운 인간 자유를 알라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보지 못하던 어둠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참다운 인간 자유를 보고 배우라는 말입니다. *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예수님 안에서 참다운 인간 자유를 보고 배워라
2005. 1. 23. 오전 10: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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