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음 (앨버트 노울런)

2007. 4. 19. 오후 3:17:23

글자
'앨버트 노울런' 저 (정한교 역)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의 마지막 장입니다. 
꼭 읽어보시기를...



예수를믿음
 
예수는 어떤 제도를 창설하지 않았다. 하나의 운동을 고취했다. 미구에 그 운동이 하나의 제도로 화할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처음에는 그저 뿔뿔이 혹은 개인으로 혹은 집단으로 예수의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열 두 사람이 있었고, 여인들이 있었고, 예수의 가족들(마리아, 야고보, 유다)이 있었으며, 예수에 의하여 딛고 일어설 땅을 얻은 수많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있었다. 갈릴래아에 제자들이 있었고, 예리고에도(예컨대 자캐오), 예루살렘에도(예컨대 아리마태아의 요셉과 니고데모) 있었다. 예수에 관해서 전해 듣고 영감을 받은 일곱 헬레니스트와 같은 희랍계 유대인들도 있었다(사도 6,1-6). 심지어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공동체에 가입한 바리사이와 사제들도 있었다(사도 6,7; 15,5).

그들은 저마다 저 나름으로 예수를 기억하고 있던, 또는 예수에 관하여 들은 특수한 일면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교리도 없었고 신조도 없었다.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를 믿음에 보편적으로 인정된 방법도 없었다.

예수는 후계자가 없었다. 예수는 단순히 후계자를 지명함으로써 계승되어 나갈 그런 종류의 운동을 추진한 것이 아니었다. 젤로데는 이전의 마카베오 집안처럼 하나의 세습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의 운동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지도자로 머물러 추종자들을 감화하고 있었다. 예수는 분명히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예수가 죽었다면 그 운동은 죽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운동이 계속 살아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예수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 운동은 형태가 다양했다. 실로 부정형이고 우발적이었다. 그 유일한 구심점은 예수 자신의 인격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단순히 예수의 가르침에 통달하거나 예수를 기억하기만 하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죽은 다음에도 자기들 가운데 현존하는 능력이 있음을 어떤 방법으로든 계속 체험하거나 새로 체험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 누구나가 예수는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들을 지도/교화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예수가 죽기 전에 그를 알았었고 보았던 사람들 중의 더러는(특히 열 두 사람은) 예수가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 있음을 자기들이 보았다는 것과 예수가 생전에 그랬듯이 또다시 자기들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과 무덤이 비었음을 발견한 여인들은 예수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또 예수의 지도와 감화가 예수의 영 — 하느님의 영 — 을 받는 일로서 계속됨을 체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의 영에 의하여 사로잡혀 있으며 인도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 부어지고 모두가 예언자들이 되어 계시의 영상을 보고 꿈을 꾸게 되리라는 요엘의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자기들에게서 성취되고 있다고(사도2,14-41 베드로의 설교 참조), 예수는 자기의 영의 현존과 활동을 통하여 여전히 현존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주님은 곧 영입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3,17-18).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하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또 주고 있어서, 그들로서는 어느 누구라도 — 모세나 엘리야라도(마르9,2-8), 아브라함이라도(요한 8,58) — 예수와 동등하다거나 예수보다 더 위대하다고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 후에 어떤 예언자나 판관이나 메시아가 와서 예수보다 더 위대한 분이 된다는 것도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요한7,31). ‘또 다른 분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마태 11,3). 예수가 모든 것이었다. 예수가 일찍이 유대인들이 대망하고 기도해 온 모든 것이었다. 예수가 모든 약속과 모든 예언을 성취했거나 성취할 것이었다. 누군가가 마지막에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면, 그는 바로 예수일 것이었다(사도10,42; 17,31). 누군가가 하느님 나라에서 메시아로, 왕으로, 주님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지명될 것이라면 그는 바로 예수가 아니고 또 누구랴 했다(사도2,36; 3,20-21; 로마1,4; 묵시17,14; 19,16).

예수에 대한 찬탄과 숭앙은 한계를 몰랐다. 단연 예수야말로 선악과 진위의 유일한 궁극적 판별기준이요 미래의 유일한 희망이며 세상을 변형시킬 유일한 힘이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를 하느님 오른편에로 받들어 올렸다. 아니, 하느님이 예수를 자기 오른편에 계신 분으로 평가 하셨다고 믿고 있었다(사도2,33-34; 5,31; 에페1,20-23; 1코린15,24-27; 1베드3,21-22; 히브10,12-13). 하느님은 유대 지도자들의 평가를 부정하신다고, 그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배신하고 죽이게 했지만, 하느님은 그글 높이 사서 부활시키고 영광 속에 들어올려 주님으로, 메시아로, 모퉁이돌로 삼으셨다고(사도2,22.36; 3,13-15; 4,11; 5,30-31; 1베드2,4).

예수는 인간 역사의 어디에나 파고들어 있는 존재로서 체험되고 있었다. 예수는 일찍이 존재한 모든 언행을 능가하는 분이었다. 그야말로 궁극의, 최후의 말씀이었다. 예수는 하느님과 동등한 지위에 있었다. 예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요 예수의 영은 하느님의 영이며 예수의 감정은 하느님의 감정이었다. 예수에게 해당하는 것은 꼭 그대로 하느님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높은 평가를 상상이나 해 볼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함은 예수에 대한 이 같은 평가에 동의함을 뜻한다. 우리도 같은 단어, 같은 개념, 같은 칭호들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예 칭호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예수와 예수가 뜻하는 바를 우리의 가치 서열에 있어서 둘째 자리에 갖다 놓는다면, 우리는 이미 예수와 예수가 뜻하는 바를 부인하는 셈이다. 예수가 관계하고 있던 것은 생사의 궁극 문제였다. 예수가 이해하고 잇던 그대로 그 나라를 받아들이느냐 않느냐의 양자택일이 있을 뿐이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전적인 찬동이 아니면 전적인 반대다. 둘째나 반쯤이란 곧 전적인 반대다. 예수를 믿음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믿음이다.

누구에게나 하나의 신은 있는 법이다 — 누구나 무엇인가를 자기 삶의 으뜸으로 삼는 것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돈, 권력, 위신, 자아, 출세, 사랑 따위. 각자의 삶에는 자기의 의미와 활력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무의식적으로나마 적어도 사실상 자기 삶의 최고가치로 여기는 어떤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하느님이라는 하나의 초월적 인격으로서의 신(God)이든, 또는 명분이나 이상이나 이념이라는 어떤 최고가치로서의 신(god)이든 누구에게나 신으로 받들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 법이다.

예수의 신성을 믿음은 예수와 예수가 뜻하는 바를 자기 하느님으로 삼기로 선택함이다. 이를 부인함은 어떤 다른 분 또는 다른 것을 하느님 또는 신으로 삼음이며, 예수와 예수가 뜻하는 바를 가치서열의 둘째 자리로 밀어 놓음이다.

내가 이 책에서 보아온 바와 같은 접근방법을 택한 까닭은 그럼으로써 우리가 신성에 대하여 개방된 생각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리라고 상상하던 선입관을 예수의 생애와 인품에다가 덮어씌우는, 끊임없이 되살아나곤 하는 과오를 피하기 위함이다.

재래의 신상(神像)은 너무 난삽해지고 예수의 생애의 역사적 사실들과 조화되기가 너무 어려워져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하느님과는 예수를 동일시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의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예수는 매우 생생히 살아 있으나 재래의 하느님은 죽었다. 예수 자신의 언행이 ‘하느님’의 내용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가 예수로 하여금 우리의 신상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며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를 하느님으로 선택함은 예수를 신성에 관한 인식의 원천으로 삼음이며 자신의 신관을 예수에게 덮어씌우기를 삼감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예수를 계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말씀이지 하느님이 예수의 말씀은 아니다. 우리의 신관들이 예수의 생애에 빛을 던져줄 수는 없다. 예수에서 출발하여 신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내지 않고 신에서 출반하여 예수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본말의 전도다.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시도들을 해 왔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이들은 일련의 의미 없는 사변에나 흘러 문제를 흐리게 할 따름, 예수가 우리에게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을 막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신에 관하여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에서부터 예수에 관한 결론을 끌어내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신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가 예수에 관하여 알고 있는 바에서부터 끌어 내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예수의 신성을 말함은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에 관하여 발견할 수 있었던 바에다가 무엇인가를 더하자는 것이 아니며,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에 관하여 말해온 바의 무엇인가를 바꾸자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의 신성을 말한다고 해서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때 달라지는 것은 신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다. 이때 우리는 비단 돈, 권력, 위신, 자아 같은 신들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예수가 뜻하는 바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위격신에 대한 온갖 낡은 표상들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을 배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진대 예수의 관점에서 구약을 재해석하고 예수가 이해한대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구약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되, 인류에게 — 온 인류에게 — 온전한 연민의 정을 보이고자 이전에 뜻하던 바를 철회하고 바꾸는 분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를 우리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임은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그분을 우리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임이다. 이 최고의 힘, 세상의 어떠한 힘보다도 힘찬 이 선과 진리와 사랑의 힘이 예수에게서 — 예수가 아버지에 관하여 말한 바에서도, 또 예수 자신의 모습 즉 예수 자신의 삶의 구조와 그의 확신이 지닌 전능한 힘에서도 — 나타날 수 있고 인식될 수 있다. 예수도 아버지도 우리의 하느님이다. 두 분이 ‘꼭 같은’,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분이기에 한 분을 경배하면 딴 분도 경배하는 것이 된다. 또 그러면서도 예수만이 우리에게 보일 수 있기에, 예수만이 신성에 대한 인식의 원천이기에, 예수만이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두 분은 구별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가 어떤 분이었던 지를 보아왔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하느님으로 모시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하님이란 우리에게 봉사 받기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봉사 하기를 원하는 분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은 우리 사회 내에서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와 신분을 원하는 분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하고자 하며 지위와 신분 따위는 아예 바라지도 않는 분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두려워하고 자기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는 분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자기를 발견해 주기를 바라는 분이다. 지존하게 무관심하고 초연한 분이 아니라, 연대의식과 연민의 정으로 만인과 하나 되기를 스스로 선택하여 인류 해방에 단호히 몸바친 분이다. 이것이 만일 하느님의 참모습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예수는 신성이 없다. 이것이 만일 하느님의 참모습이라면,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떠한 인간보다도 더 참으로 인간다운 분이며 더 철저히 인정스런 분이다. 스힐레벡스가 이른 바, 최고로 인간다운 하느님(Deus humanissimus)이다.

형이상학적 성경의 철학이라는 정적(靜的)인 면에서는 인간성과 신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던 간에,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위한 종교라는 면에서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동시에 동일한 종교적 가치를 표현하면서 결합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신성은 그의 인간성과 전혀 다른, 그의 인간성에 부가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의 신성은 그의 인간성의 초월적인 깊이다. 예수는 다른 누구보다 한량없이 더 인간다운 분이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때에, 예수를 우리의 주님이요 하느님이라고 알아 모실 때에 무엇보다도 중요시해야 할 점이다.

그러면 이 인간이 한 인간으로서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을만한 어떤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가? 돈이나 권력 같은 것을 신으로 선택하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이며 독단적인 일이다 — 일종의 우상숭배다. 예수를 선택하는 것은 그러나 반드시 주관적이며 독단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니, 이 경우에는 자기의 선택에 대하여 합리적이며 설득력 있는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설명하려는 사례들이 있다. 예수는 혹은 명시적으로 신적 칭호나 신적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혹은 암시적으로 신적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신성을 자처했었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또 더러는 이런 주장들이 예수의 기적들에 의하여 그리고 (혹은) 예수의 부활에 의하여 ‘입증’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예수가 자처한 것은 신적 칭호나 신적 권위가 아니라, 자기가 진리를 알되 진리 자체 이외의 어떠한 권위에도 의존함이 없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자기가 직접 진리와 접촉하고 있다고, 아니 자기에게서 진리 자체가 표현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적어도 사실상 그런 의미로 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예수가 청중들에게 기대한 것은 맹목적으로 자기의 권위에 의존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와 자기의 말이 진리를 보여주고 있음을, 그리고 그 진리는 다른 누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라는 것이었다. 예수에게서 배우는 사람들은 사실상 진리 자체를 권위로 삼고 있었다. 예수에 의하여 확신을 얻는 사람들은 진리 자체에 의하여 설득되고 있었다. 예수는 삶의 모든 진실, 모든 실재와 유일무이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분이었다. 사람들을 보고 절로 일어나는 예수의 연민의 정은 애초에 어떠한 소외나 꾸밈도 용납할 여지가 없었다. 선과 진리의 힘에 대한 예수의 자발적인 믿음은 거짓 없고 환상 없는 삶을 제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예수는 진리에 흠뻑 젖은 분이었다. 아니, 자기 안에 진리가 살(肉)이 되어있는, 진리의 화신이었다.

예수 자신은 이것을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로서 체험하고 있었으리라. 하느님이 생각하며 느끼는 그대로 자기가 생각하며 느끼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으리라. 따라서 자신의 체험 이외의 어떤 권위나 어떤 힘에도 의존하거나 호소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이런 진리성 주장이 하나의 환상이었던가 아니었던가를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을 과학적 또는 역사적으로 입증 또는 반증할 방법이란 없다. 열매를 보고야 나무를 알 수 있듯이 그것은 효과에 의해서만 검증될 수 있다. 예수의 언행들이 우리에게 참된 것으로 메아리치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러한 언행들의 근원인 예수의 체험이 환상이었을 리 없다. 우리가 일단 열린 마음으로 예수에게 귀를 기울여 보았다면, 그래서 예수가 삶에 관하여 말한 바에 설득되어 확신을 얻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를 직접 체험했다는 예수의 주장이 허세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리라. 예수가 우리의 마음 속에 자기가 뜻하는 바에 대한 믿음을 일깨울 수 있게 될 때, 그때 즉시 우리의 반응은 우리의 믿음을 예수에게 두고 예수의 유일무이한 진리성을 우리가 믿는 신성으로 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예수가 우리 안에 일깨우는 믿음은 예수를 믿음이자 예수의 신성을 믿음이다.

이것이 예수의 제자들이 얻은 체험이었다. 이런 것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감화였다. 그들은 물론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수나 신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말과 이론이란 으례 모자라는 데가 있게 마련이다. 필경 믿음이란 하나의 표현방식이나 사고방식이 아니라 생활방식이며 실천으로만 제대로 발로될 수 있다. 예수를 우리의 주님이며 구세주라고 인정함은 예수가 살던 대로 예수의 가치질서에 따라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한에서만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는 예수에 관한 이론을 수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 나니라 예수를 우리의 시대와 환경 속에서 ‘되살릴’ 필요가 있다. 예수 자신이 진리란 그저 ‘지키고’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면서 생활하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도 필경 예수가 추구하던 바와 마찬가지로 참된 가르침(orthodoxies)보다는 먼저 참된 삶(orthopraxis)이다. 믿음을 참된 삶으로 실천하는 것만이 우리의 믿음이 참임을 입증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전통적 권위들에 호소할 수도, 신학적 논증들에 의존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참이 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이 진리로 보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믿는 신앙이 세상에서 — 오늘과 내일의 세상에서 이루어 내는 구체적 결실이다.

예수를 믿음은 그러므로 예수가 자기 시대의 표징을 읽었듯이 우리가 우리 시대의 표징을 읽고자 하는 데서 비롯한다. 여기에는 닮은 점들이 있으나 다른 점들도 있다. 우리는 예수가 말한 바를 그저 되풀이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가 자기 시대를 분석했던 바와 같은 정신으로 우리는 우리 시대를 분석하기 시작할 수 있다.

예수가 그랬듯이 우리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출발해야겠다 — 바야흐로 굶주리고 멸시 받는 하고많은 사람들, 오늘의 우리네 생활방식 때문에 괴로움을 겪을 미래의 억조 창생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오로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을 발견한 사람만이 예수가 체험함 바를 체험한다. 오로지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다른 무엇보다도 존중하는 사람만이 인간을 자기 모상으로 창조했고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는’(사도10,34) 하느님과 일치한다. ‘신을 현양하고자 인간을 훼손하는 그런 것이 그리스도교 복음은 아니다. 인간의 영광을 희생시켜서만 자신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신이라면 너무나 옹졸한 신이다.’(Paul Verghese)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민이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거짓이다(1코린13,1-2; 야고2,14-26). 예수와 일치함은 만인과 일치함이다.

예수의 정신으로 시대의 표징을 탐지함은 그러므로 인간을 거슬러 악의 세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든 세력들을 식별함이다. 바야흐로 세계질서는 인간의 적인 사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가? 체제란 사탄의 나라의 현대적 동의어가 아닌가? 악의 권세들은 우리 모두를 파멸에로, 지상의 지옥에로 끌어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세계 속에 얽힌 악의 구조를 오늘에 있는 그대로 인식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돈, 재산, 위신, 신분, 특전, 권력 따위의 현세가치와 가문, 인종, 계급, 당파, 종교, 민족주의 등의 파당연대성에 우리는 얼마나 크게 의존해 왔던가? 이런 것들을 최고가치로 삼음은 예수와 공유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뜻한다.

예수를 믿음은 선이 악을 이길 수 있고 또 이기리라고 믿음이다. 체제라는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인간은 해방될 수 있으며 또 필경은 해방되고야 말리라. 질병, 고통, 불행, 좌절, 공포, 압박, 불의 등 — 죄와 죄의 온갖 결과들인 — 어떠한 형태의 악이든 극복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신앙의 힘이 이것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믿음은 선과 진리의 힘,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이다.

체제에 저항하여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 이익이라는 것을 대신하여 그보다 더 힘찬 것이 될 수 있는 동기가 존재한다. ‘자긴 자들’로 하여금 생활수준을 낮추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부와 인구를 재분배하도록 세상을 자극할 수 있는 충동이 존재한다. 그것은 예수에게 동기를 부여한 바와 꼭 같은 충동이며 자극인 연민신앙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불러 왔거니와, 무엇이라고 부르기로 하든 그것은 신적이면서도 철두철미 자연적인’ 진선미의 힘의 발로로서 이해되어야겠다.

이런 모양으로 우리 시대의 문제점들에 접근하는 사람은 임박한 파국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둘도 없이 좋은 기회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에게 박두한 파국은 전면적이며 결정적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를 끝내는 사건이다 — 우리의 에스카톤’(세말사건)이다. 그러나 바로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네 삶의 근본까지도 진작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가 우리의 마음 속에 믿음과 소망을 일깨워 우리로 하여금 여기 우리들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을 보게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 우리의 에스카톤’은 하나의 양자택일적 사건으로서, 우리의 이 시대를 완전한 인류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서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있음을. 오늘날 하느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계시다 — 우리 시대의 사건들과 문제점들 속에서. 예수는 우리가 진리 자체의 소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지만, 필경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