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 기도
(수도승 전통에 따른 성서묵상법)
I. 들어가는 말
II. 성서와 묵상
III. 수도승 전통에서의 단순한 묵상
IV. 반추동물의 되새김과 반추기도의 비교
1. 반추동물의 되새김
1) 반추의 개념
2) 반추동물의 위와 미생물의 작용
3) 반추동물의 소화율과 반추시간
4) 반추시기와 반추횟수
2. 반추기도
1) 반추기도의 개념
2) 반추기도에서의 기억과 신망애
3) 반추기도의 시간과 장소
4) 반추기도와 항구성
V. 반추기도의 실제
1.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라!
1) 자세
2) 호흡
3) 마음
2.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라!
3. 성령께 도움을 청하라!
4. 성서말씀을 천천히 반추하라!
1) 선택된 성서구절을 떠올려라! (토출)
2) 성서구절을 되씹어라! (재저작/타액과 재혼합)
3) 성서구절을 마음에 간직하라! (재연하)
4) 반추기도중 분심, 잡념에 대하여
5.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로 끝마쳐라!
VI. 나오는 말
I.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들은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필요한 물건은 언제든지 가까운 슈퍼나 백화점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다.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물건들은 모두 저마다 고객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물건들로 때로는 무엇을 사야할지 잠시 망설여 질때도 있다. 너무 많은 것이 좋은 듯 하지만 종종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예로 16c 이래 합리주의, 이성주의, 분석주의의 영향으로 수많은 묵상 방법들이 생겨나고 체계화되어 널리 퍼졌다. 앞의 예에서와 같이 이러한 너무 많은 묵상 방법들이 때로는 신자들이나 수도자들에게 혼돈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A라는 묵상 방법을 조금 행하다가는 금새 B의 방법으로 바꾸고 또다시 그것이 싫증나면 C의 방법으로 쉽게 바꾸면서 묵상이 잘 안된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너무 다양한 그리고 체계화되고 구조화된 묵상 방법들은 자칫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게 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직시하면서, 본인은 교회안에서 가장 안전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묵상을 실천했던 수도승들의 전통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또한 그것을 어떻게 현재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하나의 가능성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오랫동안 영성신학을 강의해 온 요셉 봐이스마이어 신부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적인 묵상은 성서를 읽고 내면화하는 전해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부터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전통의 중요성을 직시하면서, 이제부터 성서를 온전히 내면화했던 수도승들의 전통적인 성서 묵상법에 대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II. 성서와 묵상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책들의 범람으로 성서의 중요한 역할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인쇄술의 발달로 영성생활에 관한 책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또한 현대의 많은 영성 작가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이 묵상을 소개하면서 다양한 자료들을 추천하는 데에도 그 한 원인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다양한 묵상 자료중의 일부분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서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우리 모두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성서가 개인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읽혀지고 묵상될 때 하느님은 성서의 말씀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우리 각자에게 새롭게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나 교부들 특별히 수도승 전통에서 성서는 매우 중요했다. 성서는 언제나 수도승들을 자극하였고 또한 그들의 전 삶을 지배하였다. 회(會)수도생활의 창시자인 빠코미오 성인은 수도자들에게 성서말씀을 암기하여 언제나 그 말씀을 마음속으로부터 되뇌이기를 권했다. 또한 회(會)수도생활에 신학적인 토대를 놓은 바실리오 성인과 그 이후 베네딕도 성인 모두 성서의 말씀을 거의 암기할 정도였다. 성서는 수도승 생활의 휼륭한 원천이며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묵상의 대상으로써 다양한 자료보다는 직접 성서의 말씀에로 나아가기를 권하고 싶다. 사실 이것은 오늘날 점증하는 교회의 요구이기도 하다. 올해 홍콩에서는 지난 7월 2일부터 10여일 동안 전세계 70여 나라에서 세계 성서사도직 관계자 184명이 모여 총회를 개최하였다. 그 총회의 주제는 "하느님의 말씀 - 생명의 원천"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진정 생명의 원천임을 모두가 인정하고, 거기에 대한 접근으로서 수도승 전통안에서 행해진 "Lectio Divina" 의 중요성을 모두가 다시한번 확인하였다고 한다. 최근에 발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축성생활에 관한 사도적 권고』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크리스챤 영성의 원천임을 언급하면서, 특별히 성서묵상은 일반적으로 크나큰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다시한번 강조하였다. 또한 여러 성서 묵상서로 우리에게 친근한 마르티니 추기경 역시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현존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성서를 읽고 묵상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그분을 느낄 수도 없다. 이러한 상태로는 결코 우리의 삶이 힘을 얻지 못하고 또한 우리의 수많은 봉사나 활동도 참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더우기 요즈음 크게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신흥종교들에 쉽게 현혹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성서안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즉 성서를 통해 하느님안에 깊이 뿌리내릴 때 우리의 삶은 더욱더 풍요로와 질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하느님안에 뿌리내리는 가장 안전한 수단으로서 단순한 성서 묵상은 우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해 갈 것이다. 이제 본인은 수도승 전통안에서 수도승들이 어떻게 성서를 쉽고 단순하게 묵상하였는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III. 수도승 전통에서의 단순한 묵상
어떤 사람이 처음 수영을 배우고자 할 때 어떻게 수영해야 하는 가를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처음에 정확하게 동작을 배워야 적당한 에너지와 적은 몸 동작으로 쉽게 그리고 신속하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기본기를 잘못 배우면 10년 혹은 20년 수영을 해도 크게 늘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서를 묵상함에 있어 그것을 어떻게 읽고 묵상해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처음에 방법을 잘못 배우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고도 성서의 핵심에로 바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런면에서 초기 수도자들이 행했던 단순한 성서묵상 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이냐시오 묵상법이나 가르멜 묵상법, 슐피즈 묵상법과 같은 상상과 추리를 요구하는 추론적인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수도승 전통에서 가르쳐 주는 묵상방법은 구조화되지 않고 체계화되지 않은 단순한 묵상법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쉽게 언제든지 실천할 수 있는 성서 묵상법이다. 여기에서 요구하는 것은 단지 그냥 단순하게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항구하게 성서의 말씀을 되뇌이라는 것이다. 원래 라틴어 meditari(묵상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인 그리스어 meletȃn에서 왔으며 이것은 다시 어떤 것을 반쯤 소리내어 중얼거림을 뜻하는 희브리어 haga에서 왔다. 그러므로 고대(古代)나 중세(中世)때 수도승들이 묵상한다고 하면, 그것은 당연히 성서본문을 작은 소리로 읽고 마음으로 그 구절의 충만한 의미를 배우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성서본문을 작은 소리로 끊임없이 반복하고 암송하고 마음안에 각인시키는 영혼과 육체의 전(全)인간이 행하는 단순한 방법이었다. 이에대해 RB(베네딕도 규칙서)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드 보궤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의 묵상과 같은 전적으로 내면적인 행위가 아니라 입과 정신 모두를 사용하는 과정으로서 암송과 같다. 이것은 생각이나 느낌을 형성할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본문을 암송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빠코미오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승들은 한 순간도 성서 말씀이 그들을 떠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들은 일하는 동안에도 성서의 어떤 구절을 중얼거림이나 음송의 형식으로 계속 묵상하였다. 빠코미오 성인은 특별히 수도원에 입회하고자 하는 지원자들에게 신약성서나 시편의 말씀을 암기하도록 요구하였다(praecepta 60. 140 참조). 이렇게 수도승들은 성서의 한 말씀을 온전히 자기의 것이 되도록 그 말씀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맛보았다. 바로 이 되새김이 수도승 전통안에서 행해진 독특한 묵상 방법이다. 동방의 영성을 서방에 알린 요한 가시아노는 마음의 묵상과 끊임없는 되새김에 대하여 '끊임없는 묵상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우리를 형성할 때까지 스스로 열심히 혹은 더 끊임없이 Lectio Divina 하라'고 언급하였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마태 4,4을 주석하면서, 사람이 매일 빵을 먹듯이 낮동안 뿐만 아니라 밤에도 복음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거나 읽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고, 말씀을 곰곰히 생각하는 것은 되새김과 같기 때문이다. 중세를 넘어 오면서 묵상은 이제 되새김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그 과정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당신은 그분 말씀의 벌집을 씹고, 그 맛을 빨아들여라. 그것은 수액보다도 더 달콤하다. … 생각으로 씹고 이해로써 빨아들이고 사랑과 환히로써 들이켜라."(meditatio redemptionis humanae 8∼11 참조) 중세의 마지막 교부라고 일컬어지는 성 베르나르도 역시 수도승들이 순결한 반추동물과 같이 말씀을 끊임없이 되뇌여야함을 언급했다. 즉 "내가 성서를 달콤하게 반추함으로써 나의 내장은 채워지게 된다."(Sermo 16 Super Cantica II. 2, Opera Omnia I, ed) 이렇게 중세까지 묵상의 과정으로써 수도승 전통안에 되새김(ruminatio)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는데 중세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큰 분기점인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묵상 방법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로써 수도승 전통안에서 단순하게 그리고 독특하게 행해져 오던 성서 묵상에 대한 구체적인 수단인 되새김(ruminatio)수행이 잊혀짐은 크나큰 불행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오늘날 수도승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수도승들마저도 그러한 방법이 무엇인지? 혹은 그러한 방법이 있었는지 조차도 모르는 기(奇)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아무튼 희랍어 meletȃn(ՌՅՋԽՔՁՍ)-meléte(ՌՅՋԽՔՇ)의 라틴어 번역 meditari-meditatio는 성서를 읽되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계속해서 암송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때문에 수도승 전통안에서 meditatio는 종종 ruminatio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제 수도승 전통안에서 행해져 왔던 성서묵상에 대한 되새김과 반추동물의 되새김을 비교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IV. 반추동물의 되새김과 반추기도의 비교
1. 반추동물의 되새김
1) 반추의 개념
되새김, 되씹음은 라틴어로 ruminatio이고 영어로는 rumination이며 한자로는 반추(反芻)이다. 그래서 되새김, 되씹음을 하는 동물을 반추동물이라고 부르는데, 대개 그 종류는 161종이나 된다고 한다. 즉 소, 낙타, 면양, 산양, 사슴, 물소 등의 동물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반추동물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대개 위를 4개씩 갖고 있다.(☞ 이것은 일찍이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류하였다) 이 동물들은 처음에 음식물을 적당히 소화하여 주로 위로 보내었다가 그것을 다시 입으로 토출(Regurgitation)한 후 재저작(Remasticatio)과 타액과 함께 재혼합(Reinsalivation)한후에 재연하(Redeglutition)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반추라고 한다. 즉 반추란 토출 - 재저작 - 타액과 재혼합 - 재연하의 4과정을 말한다.
2) 반추동물의 위와 미생물의 작용
대부분 반추동물은 일단 사료를 잘 저작하지 않고 재빠르게 음식물을 넘겨 위로 보낸다. 반추동물의 위는 4개로써, 제1위는(rumen) 전체 위의 70∼80%를 차지하는 곳으로서 사료의 저장, 수침(soaking), 물리적 혼합과 분쇄 및 미생물에 의한 발효 등의 작용을 한다. 여기서 미생물의 종류는 bacteria류, protozoa류 그외 곰팡이와 효모도 약간 있는데, 이들은 주로 섬유소의 분산, 아미노산의 합성, 비타민 B군과 K의 합성, 미생물체 영양소의 공급등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리고 전체 위의 5∼7%를 차지하는 제2위는(reticulum) 제1위와 자유로이 통해 있고 상피층에 근주가 없는 것을 제외하면 제1위와 거의 비슷하다. 이것은 상피가 벌집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명 벌집위라고도 한다. 제3위는(omasum) 전체 위의 2∼7%를 차지하는 것으로써 일명 겹주름위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주로 수분을 흡수하고 미약한 마쇄작용을 한다. 마지막으로 제4위는(abomasum) 다른 단위동물과 같이 소화액을 분비하며 내부는 괄약근에 의해 기저부(基底部, fundus)와 유문부(幽門部, pylorus)로 나뉘어져 있다. 대개 제1∼3위는 소화액을 분비하지 않고 수분만을 분비하는데 이것을 전위(前胃)라 하고 제4위만이 소화액을 분비한다. 이것을 진위(眞胃)라 한다. 아무튼 반추동물의 입에서 충분히 소화되지 못한 사료가 제1위로 들어가 수분과 섞이고 미생물의 작용을 받은 후 반추작용과 가스작용을 하게 된다. 대개 액체는 삼켜져 곧바로 제3위와 제4위로 들어가고 고체 부분은 잘 저작되어 죽 모양이 되어 제3∼4위로 넘어가게 된다.
3) 반추동물의 소화율과 반추시간
대개 반추동물이라도 각각의 동물의 종류와 그리고 사료의 종류에 따라 소화율과 반추시간이 달라지게 된다. 어떤 동물이냐에 따라 소화율이 달라지는데, Huston은 동물의 신체 사이즈에 따라 소화율이 달라진다고 주장하였다. 즉 소는 양보다 제1위가 클뿐만 아니라 덜 유동적이기 때문에 자연히 사료의 위내 정체 시간이 길게됨으로 일반적으로 양에 비해 소화율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반추동물이라도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소화율은 또다시 달라질 수 있다. 다음의 표는 사료의 종류에 따라 채식시간과 반추시간이 각각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같은 반추동물이라도 거친 사료를 먹을 경우 채식시간과 반추시간이 많이 필요한 반면 부드러운 사료를 먹을 경우에는 채식시간과 반추시간이 그 만큼 적게 요구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고찰하게 될 반추기도에서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4) 반추시기와 반추횟수
반추동물들은 대개 이동중이거나 맹수의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절대로 반추하지 않는다. 그들은 맹수가 공격하기 전에 재빠르게 많은 양을 섭취하여 일단 위에 저장한다. 그리고는 아무 위협이 없는 안전한 곳(은신처)으로 가서, 이미 섭취했던 음식물을 다시 "토출 - 재저작 - 타액과 재혼합 - 재연하"라는 반추를 하게 된다. 이것을 1회 반추라고 하는데 대개 30∼50분 정도가 소요된다. 반추동물들은 이런 반추를 하루에 6∼8회 행하며, 소요되는 시간은 대개 6∼9시간이 걸리게 된다. 그러나 정확하게 반추를 시작하는 시간이나 반추에 요하는 시간 혹은 반추 횟수는 개체에 따라 또는 섭취하는 사료에 따라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2. 반추기도
1) 반추기도의 개념
우리는 앞에서 수도승 전통안에서 되새김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구절을 반복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소가 삼킨 음식물을 토출하고 재저작하고 재연하 하여 완전히 자신의 살과 피가 되게 하는 일련의 과정과 같이 말씀을 온전히 나의 것이 되게 하는 독특한 수행이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소리내어 읽고 기억에 간직해 두었다가 일터에서 혹은 혼자 산책하거나 기도할 때 그 말씀을 토출해내어 그것을 다시 천천히 되씹고 그 말씀을 마음에 재연하시킴으로써 온전히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단순하지만 독특한 묵상을 실천하였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서에 언급되고 있다.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이 책에 있는 법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밤낮으로 되새겨라"(1, 8)고 권고하고 있으며, 시편 저자 역시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은 복되다"(1, 2) 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천천히 말씀을 되새김으로써 그 말씀이 내 안에 생생히 살아 현존하게 하는 수행이 바로 반추기도이다.
2) 반추기도에서의 기억과 신망애
반추동물이 음식물을 섭취할 때 일단 그것을 삼켜서 제1위에 저장하였다가 그것을 다시 토출하여 되새김하듯이 우리 역시 하루 중 아침의 적당한 시간에 성서 독서를 하면서 마음에 특별히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으면 그것을 나의 기억에 일단 간직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의 기억은 반추동물의 제1위와 같은 기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일터에서나 휴식시간에 혹은 홀로 산책할 때 마음속으로 그것을 천천히 되새겨 볼 수 있다. 아니면 저녁의 적당한 묵상시간에 그 구절을 천천히 호흡에 맞추어 집중적으로 반추해 볼 수도 있다. 대개 전통적으로 수도승들은 묵상 시간에 이러한 수행을 하였다. 이렇게 말씀을 철저히 되새기다 보면 어느덧 말씀이 내안에 스며들어 살아 현존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또하나 생각할 것은 반추동물이 되새김할 때 제1위에 있는 미생물이나 혹은 입속에서 나오는 침이나 타액의 작용을 받아 쉽게 음식물을 소화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말씀만을 단순히 되뇌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진정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을 때 그 말씀은 이러한 것들과 잘 작용하여 온전히 우리의 살과 피가 되는 것이다. 신·망·애의 정신이 없이는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성서의 말씀을 되새긴다고 해도 그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시간만 낭비할 수도 있다. 반추동물의 침이나 미생물, 소화액과 같이 신·망·애의 정신으로 성서말씀을 반추할 때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3) 반추기도의 장소와 시간
반추동물은 이동 중이거나 맹수의 위협이 있거나 혹은 어떤 불안한 상황에서는 절대로 반추하지 않는다. 대개 한가하고 안정되고 아무 긴장이 없는 상황에서 반추하게 되는데, 반추기도 역시 바쁘고 복잡하고 긴장을 요하는 곳에서 그것을 실천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다. 본인의 경험으로도 수도원 안에서 일하는 중에 계속해서 성서 말씀을 되뇌여 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음을 체험하곤 한다. 옛날에는 모든 것이 단순해서 그러한 수행이 가능했지만 오늘날과 같이 바쁘고 복잡하고 늘 붸기는 상황에서는 편안하게 반추기도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본인은 그래서 가능하면 정해진 묵상시간을 철저히 잘 보내기를 권고하고 싶다. 즉 하루에 적어도 30분 정도를 저녁의 적당한 때에 매일 고정적으로 할애하여, 그 시간에는 과중한 일과 현실의 모든 근심이나 걱정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나의 성서구절을 집중적으로 반추하기를 권한다. 본인은 이러한 방법으로 오랫동안 수행을 하면서 매일 성서의 말씀을 조금씩 맛보고 있다. 시간 배정에 있어서 대다수 한국의 여러 수도회에서는 아침에는 묵상을, 그리고 저녁에는 영적독서를 할애하고 있지만, 본인의 경험이나 또 전통의 빛안에서 볼 때 이러한 방법보다는 차라리 오전에 그날 하루동안 되새김할 성서말씀을 기억에 채워넣는 성서독서 시간을 갖고, 저녁에는 그 말씀을 집중적으로 되뇌이는 묵상수행을 하는 것이 영성생활에 더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아뭏튼 고정된 시간의 성서묵상은 말씀을 그냥 읽거나 듣자마자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이 완전히 나의 양식이 되게 해야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반추기도의 장소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시끄럽고 복잡한 장소나 위험이나 긴장이 항상 상존해 있는 장소에서는 솔직히 묵상을 깊이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반추동물들은 결코 아무런 장소에서나 반추하지 않는다. 그 동물들은 아무런 위험이 없는 안정된 곳에서 여유롭게 반추한다. 반추기도 역시 시끄럽고 불안정한 곳에서 말씀을 깊이 되뇌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방해 받지 않는 조용하고 고요하며 아늑한 장소에서 되새김 수행을 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조용하고 아늑한 장소는 꼭 크고 넓은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더라도 걱정이나 긴장 혹은 온갖 소음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라면 어느 곳이라도 가능하다. 이렇게 반추기도를 위해 고정된 시간과 조용하고 아늑한 장소는 성서 말씀을 더 깊게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을 돕게 된다.
4) 반추기도와 항구성
반추동물은 음식물을 완전히 소화하기 위해 하루에 6∼9 시간을 반추를 위해 할애한다. 반추동물들에게 반추는 생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중 과연 몇명이나 성서 묵상이 자신의 생존에 관한 것이라 생각하고 하루에 6∼9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하루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반추동물과 같이 반추기도를 한다는 것은 솔직히 현대인들에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최소한 하루에 30분 만이라도 규칙적으로 반추기도를 해나간다면 영성생활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규칙적으로 항구하게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성인 성녀들의 삶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한결같이 집요했고, 그리고 항구했다. 영성생활에 있어 이것이 빠지면 하느님안에 깊이 뿌리내리기가 힘들다. 본인은 성서독서나 성서묵상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로 이러한 집요함과 항구함을 견지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때로는 회의와 무료함 그리고 지루함이 엄습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때일수록 더욱 하느님께 신뢰를 저버리지 말고 계속 수행해 나가기를 바란다. 영성생활에서는 특별하고 기이한 비밀스런 방법이란 없다. 우리는 매일 매일 그냥 단순한 마음, 순수한 마음, 신·망·애의 마음으로 성서를 읽고 반추하고 맛들이면서 살아갈 뿐이다. 이러한 매일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성서 되새김은 우리의 영성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하느님안에 머무르는 지혜를 알려줄 것이다.
이제 본인은 수도승 전통에서 면면히 내려온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수행인 성서의 되새김 즉 반추기도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방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 방법은 동양 문화권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동양의 풍부한 유산과 그리스도교 수도승 전통안에서 훌륭히 꽃핀 되새김 수행을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V. 반추기도의 실제
1.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라!
인간은 심신상관적(心身相關的)인 존재(存在)이다. 이 극히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양의 사고는 오랫동안 이분법적으로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분리시켰으며, 그 결과 철학, 종교, 윤리 모든 면에서 수세기 동안 이원론이 지배해 왔다. 다행히 오늘날 서양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직시하며, 동양의 심오한 정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동양은 언제나 육체와 영혼의 가치를 모두 존중해 왔으며, 특별히 몸에 관심을 쏟았다. 몸과 더불어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명상도 눈과 폐와 복부와 척추 따위의 작용을 가르치는 예술이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요가나 선불교등이 이에 속한다. 반면에 서양인들의 기도는 이지적이고 지성적이다. 이것은 머리로 하는 기도일뿐 영적 에너지가 발생하는 몸의 더 깊은 단계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서양은 이성과 추리, 논리를 강조하지만 동양은 직관을 강조한다. 이런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몸의 역할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윌리엄 존스턴 신부의 견해에 공감이 간다. 그가 말했듯이 몸은 결코 묵상이나 기도에 장애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더 깊고 근원적인 차원에로 인도하게 된다. 더욱이 그는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수혈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요셉 봐이스 마이어 신부 역시 아시아의 명상 방법들이 분산된 정신 상태로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과 그리스도교 묵상에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1) 자세 (調身)
반추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몸의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호흡이 깊지 못하고, 호흡이 깊지 못하면 역시 마음이 고요해지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작하기 전에 바른자세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이에 대해 윌리엄 존스턴은 자세에 대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토마스 머턴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그는『그리스도인 참선』의 부록에다 다양한 자세의 양식을 자세히 소개해 놓았다. 즉 자세에는 결가부좌, 반가부좌, 일본식 좌법인 세이자, 그리고 현재 한국의 몇몇 수도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엉덩이를 받칠 수 있는 작은 묵상틀을 사용하는 경우와 의자에서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흔히 요가나 선 수행에서 앉는 자세는 몇가지 점을 제외하면 거의 비슷하다. 여기서는 수행자들에게 주로 사용되는 결가부좌와 반가부좌를 소개하고자 하다. 전자는 왼쪽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깊숙히 올려놓고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자세로써 연화좌, 길상좌, 완성좌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면 달인자, 항마좌라고 하는 반가부좌는 오른발만을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방법으로서, 이 자세는 적당한 높이의 방석을 사용하면 척추가 곧게 펴지게 된다. 아무튼 좌선 자세를 취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몸의 중심이 단전에 모이도록 척추를 곧게 세우고 귀와 어깨는 수직이 되게 하고, 머리 끝으로는 천정을 밀어올리는 것처럼 하고, 턱은 안 쪽으로 당기도록 한다. 턱이 쳐들리면 자세에 힘이 없어지고 쉽게 졸음이 오게 된다. 시선은 자기 앞 1m지점을 보든지 벽을 주시한다. 이때 눈은 한 지점에 고정시키되, 완전히 뜨거나 완전히 눈을 감지않는 반쯤 뜬 상태가 좋다. 힌두교의 경전인《바가바드 기타》에서도 명상할 때는 움직이지 말고 몸과 머리와 목을 곳곳이 일직선으로 하며, 눈은 사방으로 팔지말고 코끝만을 들여다 보라고 가르친다. 이때 손의 모습은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놓고 엄지 손가락끼리는 가볍게 닿게 하여 인(印)자를 짓는다. 그리고 몸쪽으로 닿게 하고 엄지 손가락은 대충 배꼽 높이에 둔다. 양팔은 자유롭고 편하게 두되 팔밑에는 계란을 하나 끼워둔 것처럼 가볍게 떼어 둔다. 그리고 좌선중에 초보자들은 자주 입안에 침이 고이게 되는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윗이빨 가까이 입천정 부근을 혀끝으로 살짝 치올려대고 있으면 도움이 된다. 이렇게 자세가 되었으면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천천히 몸을 전후 좌우로 움직이면서 가장 안정되고 편안한 점을 찾아야 한다. 그곳이 바로 중심점이다. 이러한 자세가 현대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떠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이에대해 다음의 연구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 척추가 곧게 유지되면, 내장에 그만큼 압박이 덜 가해지고 복압력이 생겨 호흡이 순조 롭게 되고 정신도 안정된다.
╃ 온몸의 긴장이 사라지면 마음이 쉽게 집중되고 스스로 초연해질 수 있게 됨으로, 피로 가 적고 항상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다.
╃ 자세가 안정되면 마음도 따라서 바르게 된다. 이때 혈액 순환이 원활이 됨으로 인해 생 기가 충만해질 뿐 아니라,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찾는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게 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반추기도를 시작함에 있어 몸의 중요성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 다.
2) 호흡(調息)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하였으면, 이제 호흡을 고르게 해야 마음 역시 고르게 된다. 호흡과 마음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즉 호흡이 고르지 못하면 마음도 흔들리고, 마음이 동요되면 호흡도 흩어진다. 그러므로 호흡을 의식적으로 고르게 함으로써 자율신경을 조절하게 되면 감정의 움직임도 조절되고 마음의 안정도 가능하게 된다. 경험에 의하면 명상에 있어 호흡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래서 수많은 호흡법들이 널리 퍼져있다. 여기서는 실제적으로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방법으로는 복식호흡이 있다. 이것은 아랫배와 가슴을 부풀게 하여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숨을 토해내는 간단한 방법이다. 단전호흡은 배꼽으로부터 3∼4㎝ 아래 단전에 촛점을 맞추어 호흡하게 된다. 단전은 모든 생명과 에너지가 이곳으로부터 솟아나기 때문에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 숨도 고르게 되고 깊어지게 된다. 요가에서는 완전 호흡법과 쿰바카 호흡이 두드러진다. 전자는 숨을 먼저 내뱉고 배와 가슴으로 숨을 깊이 들이쉬고(吸) 잠시 멈춘 후(止), 천천히 내뱉게 된다(吐). 대개 그 비율은 1 : 4 : 2의 비율로 하게 된다. 반면 후자는 모든 요가 호흡의 총칭으로써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로 앉은 후에, 오른손의 둘째 손가락을 미간에 대고 충분히 숨을 내쉬고 나서,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으로 오른쪽 콧구멍을 닫고 왼쪽 콧구멍으로 충분히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왼쪽 콧구멍을 막고 완전히 숨을 닫는다. 그리고는 다시 오른쪽 콧구멍을 막은 엄지 손가락을 늦추어서 숨을 토하고 다시 그 쪽으로 흡(吸) - 지(止) - 토(吐)를 번갈아 가면서 되풀이하는 방법이다. 대개 여기서의 비율도 1 : 4 : 2로
하기를 권한다. 참선 수행에서도 수식관(數息觀)과 수식관(隨息觀)이 있는데 전자는 선의 호흡법을 대표하는 것으로써 호흡을 세면서 시작하는 방법, 즉 들이쉬면서 하나, 내쉬면서 둘 … 이렇게 열까지 세고 나서 다시 처음 하나로 되돌아 오는 수행이다. 반면 후자는 호흡만을 의식하여 숨쉬고 있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수행이다. 사실 이런 호흡에 대한 중요성은 동양 종교에서만 강조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특별히 헤시카스트들도 이런 호흡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래서 교부들의 명문집인 필로칼리아(Philokalia :수덕의 실천)에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공기를 들이 마시고 내쉽니다. 호흡은 몸이 살아가는 데에 기본이 되고 몸의 온기를 유지시켜 줍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방에 고요히 앉아 마음을 모으고 기도(氣道)를 따라 들이 마신 공기를 모두 심장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그대로 있으십시오 … 그리고 다음의 기도를 읊으십시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계속하십시오.
또한 이름없는 순례자에서도 "예수 기도"(일명 심장 기도)를 설명하면서 숨을 들이쉴 때 "주 예수 그리스도여", 숨을 내쉴 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호흡에 맞춰 기도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 예수회의 드멜로 신부 역시 여러가지 묵상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즉 호흡에 따라 숨을 들이쉴 때 하느님의 성령이 자기안으로 들어옴을 의식하고, 숨을 내쉴 때 자신의 온갖 두려움, 부정적인 느낌들을 내뱉는다고 상상하고 동시에 어떤 느낌들은 호흡을 통해 즉시 표현해 보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호흡법들이 있을 수 있는데, 각자는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들을 잘 활용하기 바란다. 그러나 가능하면 자세를 바르게 한 후에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기를 권고한다.
3) 마음(調心)
인간의 마음은 거대한 대양과 같다. 거기에는 온갖 것들이 혼재해 있다. 이 혼재해 있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간직할 수 있다. 인간사의 조그마한 감정의 파고에 쉼없이 마음이 끌려다니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황폐화되어 깊은 내면생활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깊은 내면생활이나 정신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린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성체 조배중에 혹은 묵상중에 우리 마음은 온갖 걱정과 근심, 분노와 미움으로 요동침을 느낀다. 더욱이 현대인들은 많은 생각과 많은 걱정들로 한 순간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지내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러나 자기 본래의 마음을 잃고 거짓 마음에 휩싸여 있는 한 우리는 존재의 중심에로 바로 들어갈 수가 없다. 이러한 면에서 위에서 언급한 동양의 방법들은 우리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선에서는 좌선을 권하며 특별히 호흡을 고르게 함으로써 마음의 고요에로 나아가라고 가르친다. 마음이 인간의 감정을 조절해야지, 감정이 인간의 마음을 조절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마음이 감정과 생각에 좌우되지 않고 고요해지면 분리되지 않은 통일된 인간 존재가 가능하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바로 고요하고 순수한 마음안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쳐 왔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해 군중들에게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마태 5, 8)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순수한 마음은 이 지상에서 수도승들이 추구했던 일차적 목표였다. 수도승 생활의 모든 수행은 바로 순수한 마음에로 방향지워져 있었다. 사실 이것 없이는 수도자들이 서원의 삶을 충실히 그리고 더 풍요롭게 열매맺어 간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교회안의 수많은 영성가들은 한결같이 이 마음의 심저에 깊이 들어가라고 권고했다. 우리 모두는 자기안에 기도하시는 분을 모시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진리이다. 하느님은 말씀과 성사를 통해 특별히 우리 마음안에 거처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준비하고 잘 가꾸어야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더욱더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물론 교회 역사안에 마음이나 영혼의 측면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했던 극단 주의자들도 있었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중요성 때문에 동양의 전통이나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에서는 한결같이 마음의 고요를 강조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반추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고르게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해왔다. 이 부분은 특히 서양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으로서 동양의 훌륭한 유산임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양은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이성과 지성에 크나큰 관심을 가짐으로써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점들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은 처음부터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았고, 몸과 마음 모두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왔다. 그래서 오늘날 서양의 한계에 동양의 훌륭한 유산은 많은 가능성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라!
우리는 위에서 반추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길게 언급했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만 지나치게 몰입하게 되면 위험하다. 좌선이나 요가의 수행법 그리고 단전 호흡법, 초월명상, 그리고 오늘날 점증하는 인간 잠재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수많은 수양법들은 잘못하면 신(神)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인간의 절대적 능력만을 맹신할 새로운 뉴에이지 운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앞의 방법을 시도하고자 하는 초보자들은 가능하면 지도신부나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기를 권한다. 실제로 그러한 수행을 깊이 하다보면 신비로운 현상들이 충분히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정작 달을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여정을 정확히 직시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끝이 아니라, 바로 달에로 직접 나아가야 한다. 이런면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의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타종교나 새로운 뉴에이지 운동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우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한계도 분명히 알기 때문에 더욱더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반추기도를 시작함에 있어 이러한 하느님 현존의식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리라고 믿는다. 즉 하느님 현존의식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나아가게 한다. 구체적인 한 예로 17c 가르멜회의 수도자였던 라우렌시오 수사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수도생활 40여년을 하느님 현존체험에 대한 수행에 바쳤다. 그 역시 처음에는 이것을 행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랜 노력과 수행을 통해 마침내 무엇을 하던 즉 일을 하거나 기도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그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느님의 현존을 자주 의식하고 오래 수행하다 보면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늘 하느님께로 정신이 집중되게 된다. 이렇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순간 하느님 현존체험으로 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반추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성서묵상을 한다면 크나큰 도움을 받으리라 믿는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는 그분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사도 17, 28)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그래서 반추기도를 시작할 때 조용히 앉아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한 후에 하느님의 현존을 자기 존재 깊이 느끼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3. 성령께 도움을 청하라!
우리가 아무리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성서묵상에서 열매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분만이 거룩한 말씀의 의미를 계시해 주시며 우리안에 거(居)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인도하신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영성생활이 빗나가지 않고 하느님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예수님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사막으로 물러났을 때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기에 사탄을 물리칠 수 있었다. 초기 수도승들 역시 사막이나 광야로 물러났지만, 그들을 인도했던 분은 바로 성령이었다. 성령만이 우리를 가장 안전하고 직접적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성령은 우리안에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의 열매(갈라 5, 22-23)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반추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명오를 밝혀주시어 당신의 심오한 말씀의 신비를 깨닫고 열매맺게 해 주시도록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성령께 도움을 청할때는 각자 자유롭게 청원기도를 드릴 수도 있고, 아니면 "오소서, 성신이여! 저의 마음에 임하소서"라는 짧은 기도를 바칠 수도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각자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4. 성서 말씀을 천천히 반추하라!
1) 선택된 성서구절을 떠올려라! (토출)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음식을 먹고 씹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식이라는 재료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서 묵상을 하려면 반드시 그 재료일 수 있는 성서구절이 필요하다. 이러한 성서구절의 선택은 가능하면 아침 성서독서 시간에 그 날 하루 반추하게 될 성서구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구절을 하루중에 계속 되씹을 양식으로 삼아 일하는 중이나 쉬는 시간에 혹은 차를 기다리거나 걸어가면서 가능하다면 자주 마음속으로 그 성서 구절을 천천히 되뇌여 보기를 권한다. 그러나 어떠한 시간에는 그렇게 한다는 것이 대단히 힘들 수도 있다. 예를들면 과중한 업무를 급히 처리해야 하거나 혹은 많은 사람들을 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말씀을 평화로이 되뇌인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가능하면 그러한 정신을 직시하면서, 특히 저녁의 한가한 묵상 시간에 집중적으로 성서 말씀을 반추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성서 말씀을 떠올려야 한다.
2) 성서구절을 되씹어라! (재저작/타액분비)
이렇게 선택된 하나의 성서구절을 천천히 호흡이나 심장에 맞추어 되씹는다. 단순히 되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망·애의 마음으로 성서말씀이 머리에서 마음에로 각인될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되뇌인다. 이 때 절대로 추리나 상상 혹은 공상을 하려 해서는 안된다. 수도자들이나 신자들에게 반추기도중 추리나 상상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매우 힘들어 하는 것 같다. 사실 대다수 묵상법들이 상상과 추리를 강조하고 있고 도미니꼬회의 유명한 영성신학자인 조던오먼 신부 역시 "추리가 없으면 묵상이 아니다" 라고까지 언급했다. 본인은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며 묵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움직임 안에서만 자연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즉 인위적인 추리나 상상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마음으로 성서 말씀을 되풀이 하다보면 어느 덧 저절로 새로운 영감들이 떠올려지게 되는데, 그 때 자연스럽게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묵상중에 인위적인 상상과 감정은 잘못 자기 충족감이나 자기 만족이라는 헛된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반추기도에서 진정한 깨달음이나 열매를 가능케 하시는 분은 우리의 차원을 넘는 성령이시다. 반추기도는 성령을 우리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이끌림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하는 선승들에게 상상과 추리는 절대 금물이다. 혹시라도 자기 상상과 추리로 공안의 뜻을 조금 깨쳤더라도 그것은 곧 스승에게 거부되고 다시 시작하도록 권고된다. 마찬가지로 상상과 추리에 의한 하느님의 이미지는 결코 하느님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불완전한 것이며 반드시 초월해야 한다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단계에 머물게 되면 더 깊이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반추 기도에서는 기존의 묵상 방법들과 같은 상상과 추리의 작용을 거부한다. 이것은 그냥 단순하게 신·망·애로 가득 찬 마음으로 말씀을 천천히 되뇌이는 수도승들의 전통적인 방법이다. 여기에는 어떤 기교나 테크닉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아무런 부담없이 언제든지 쉽게 할 수 있는 독특한 성서묵상 방법이다. 이에 대해 시토회의 앙드레 루프 아빠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나의 성서 말씀에 스스로를 내어맡기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천천히 그 말씀을 되풀이 함으로써 마치 과일에서 과즙을 짜내듯이 그 말씀의 속뜻을 모두 얻어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말씀에서 자양분을 받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먹이며, 그 안에서 힘을 얻는다. 이 때 내 마음속에는 새로운 빛이 가득하게 되고, 나는 보다 깊이 그 말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말씀은 나의 마음을 가득채워 나의 본질이 된다. 나의 내면 깊숙이 파고 내려와서 끊임없이 자양분을 제공하며 힘을 북돋아 주는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나의 내적 존재가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회의 윌리엄 존스턴 신부 역시 "어떤 성서 문구든 계속 맛있게 되새기는 것도 훌륭한 명상법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걱정과 쓸데없는 생각과 추리를 떨쳐버리게 될 것이다. … 조용히 예수의 말씀을 계속 반복하라. '몸이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이 말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추리하지도 말고…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 그저 그 말을 음미하라. … 이 신비를 깨닫게 될 때, 몸이라는 말은 더욱 더 힘차게 발음되고 나의 몸과 그 말씀은 하나가 된다"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가시아노가 전해준 담화집을 보면 이사악 아빠스는 뜨거우면서도 짧게 자주하는 기도의 실천을 설명하면서 "마음이 이것을(역주:짧은 기도 문구나 성구) 꾸준히 사용하고 계속 묵상하여 강해지면 마침내 온갖 사고방식의 풍부하고 충만한 자료를 버리고 … 다만 이 한 구절의 가난에 스스로를 제한하게 된다"(담화 Ⅹ,11) 라고 말하고 있다. 성서 말씀을 자주 열렬하게 반추하다 보면 하느님과의 일치가 가능하게 되고 그의 마음과 기도에 단순성과 통일성을 갖게 된다. 이때에 기도를 바치는 이는 논리적인 반성이나 묵상으로부터 하느님께 대한 고요하고 단순한 사랑에 찬 예배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반추기도를 할 때에는 고요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열렬하게 말씀을 되씹음으로써 그 맛을 느끼도록 해야한다.
3) 성서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라! (재연하)
되씹어진 음식물은 재연하를 통해 이제 반추동물의 위와 장의 소화계통을 통해 자신의 몸과 피로 흡수된다. 반추기도 역시 되씹어진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풍요로운 맛과 함께 우리 마음과 내장에 흡수되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영적 양식으로 우리 영혼을 살찌우고, 분주한 활동중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하느님과 함게 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가능하게 된다. 말씀이 완전히 내 안에 녹아들어가게 되면 이제 말씀과 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되며, 말씀과 나 사이의 거리도 없어지고 말씀이 나이고, 내가 말씀이 되는 그런 높은 경지에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깨달음을 추구했던 선승들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흔히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여정을 십우도 혹은 심우도로써 표현한다. 처음에는 소와 내가 크나큰 불일치와 분리를 체험하지만 수행이 깊어지면서 소와 내가 하나가 되고 나중에는 소도 나도 없어지는(人牛俱忘) 텅빈 충만을 체험하게 되고 맨 끝에는 "입전수수"(열번째 그림) 즉 맨발에 배꼽 다 드러내놓고 시장 한복판에 걸망하나 매고 너털 웃음짓는 모습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우리 크리스찬 영성 여정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교리적인 측면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나지만 깨달음의 여정, 완덕의 여정이라는 면에서는 유사점이 있다고 본다. 우리의 영적 여정 역시 처음에는 말씀과 내가 분리된 단계에서 반추기도를 시작하게 되지만, 어느덧 우리의 수행이 깊어지면 말씀과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면 말씀이 나이고, 내가 말씀인 그런 경지에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이미 십자가의 성요한이나 대(大)데레사가 말한 변형일치의 단계이다. 이러한 단계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십니다"라고 표현했다. 말씀이 완전히 소화되어 나의 몸과 피가 되어 나와 하나되면 더 이상 말씀과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단계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의 상징적인 모습일 수도 있고,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렇게 말씀과 완전히 하나된 영혼은 이제 어디를 가든지 더 이상 장소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장 한복판을 가든 사막으로 물러나든 수도원 안에 머물든 수도원 밖에 머물든 더 이상 장소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는 그냥 거기에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높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특별히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성서를 늘 가까이 하고 되새기며, 마음에 깊이 간직하여 자신의 참된 양식이 되게 해야할 필요가 있다.
4) 반추기도중 분심, 잡념에 대하여
이 기도를 계속하다 보면 어떤 때는 아주 쉽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지루하고 무미건조함을 느끼면서 온갖 분심, 잡념에 빠질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때에도 결코 쉽게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인내롭게 그러한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이에대해 앙드레 루프 아빠스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그는 또다시 자기가 예로부터 확실히 알고 있는 그 잘 다져진 길을 택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된다. 다시한번 자신의 지성을 일깨워 줄 확고한 역사적 주석들을 들쳐보거나 또는 다시금 자기 마음을 뜨겁게 해줄 신심 깊은 묵상을 하고 싶게 될 것이다. 그러나 Lectio Divina(역주:성서독서나 성서묵상)에서는 이러한 욕구를 완강히 거부해야 한다. 그 대신 참을성 있게 꾸준히 버티어 가면서 하느님 말씀안에 계시는 그분의 능력과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자기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희망을 걸어야 한다.
영성생활의 핵심은 거창한 신비 체험이 아니라 단순함과 꾸준함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반추 기도중에 자의든 타의든 일어나게 되는 온갖 분심과 잡념에 대해 너무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예수의 기도》에서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분심과 잡념을 일으키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것은 선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의 거장 꽅류 스즈끼는 말한다. "좌선 중에 생각을 멈추려고 애쓰지 말라. 저절로 멈추어 지도록 하라. 그대의 마음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오면 들어오게 두고 나가면 나가도록 두라. 들어온 것은 결코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 생각에 벌써 얽매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망상이 일어나든지 사라지든지 무시하고 내버려 두면 잠시후 마음은 고요해지고 곧 평정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반추 기도중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분심, 잡념을 무시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 거기에 집착하다보면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 순간도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 일어나는 온갖 분심 잡념은 일단 무시해라.
5.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로 끝마쳐라!
반추기도를 끝낼 때는 그냥 일어서지 말고 고요한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깨닫게 해주신 하느님께 기도드리면서 몸을 전후 좌우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자세를 푼다. 결코 조급해 하거나 빨리 끝내려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자세을 다 푼 다음에는 앉은 자리에서 피가 잘 순환되도록 간단한 운동을 한다. 즉 하나의 간단한 방법으로서 두 발을 쭉 펴고 발 끝을 최대한 몸밖으로 쭉 폈다가 다시 몸 안쪽으로 최대한 끌어들여라. 이렇게 하면 반추 기도동안 앉아 있음으로 인해 저린 부분들이 빠르게 회복되고 혈액 순환도 잘 되도록 도와준다. 그러고 정해진 성서 묵상 시간이 끝나고 일어서더라도 자신이 되뇌였던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일어나야 한다. 만약 일어남과 동시에 무슨 말씀을 되뇌였는지 모른다면 그 사람은 분명 반추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증거이다. 반추기도를 깊이 하게 되면 성서 말씀의 표상적인 의미를 넘어서 깊은 영적 의미를 꿰뚫어 보게 된다. 이러한 상태로 세상에 살 때 쉽게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될 것이다.
VI. 나오는 말
오늘날 우리는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풍요로움 속에서 빈곤을 느끼고 군중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오늘날 지구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자연파괴, 환경오염, 인간성의 황폐화, 온갖 형태의 전쟁들, 테러와 기아는 우리의 이런 바벨탑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이러한 현대 사회안에서 과연 우리 그리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진정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성서는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을까? 이것은 오늘날 솔직히 우리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이러한 도전앞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마태 4, 3-4) 즉 빵이나 황금 혹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크나큰 믿음을 두고 우리의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 영성생활의 원천인 성서에 어린이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귀기울여야 한다. 옛 수도자들은 그냥 단순하게 신·망·애의 마음으로 성서말씀을 정원이나 일터에서 혹은 산책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끊이없이 되뇌임으로서 그 말씀의 풍요로운 맛을 한껏 맛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결코 도전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또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더욱더 하느님 말씀안에 머물며 그안에서 참된 양식을 발견하고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이에 반추기도는 하느님 말씀의 풍요로운 원천에로 여러분을 직접 인도하게 될 것이다.
(성 베네딕도회 허 가브리엘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