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의 의미 -정진홍 교수님

2009. 7. 2. 오후 7:32:47

글자

 

 

      종교, 그리고 사람됨

   

1. 종교와 인성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데 여러 면에서 도움을 줍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른바 ‘종교는 인성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하는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가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정체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혈연관계에서 내가 누군지 압니다. 또 사회적인 신분을 통해 내가 누군지도 압니다. 대체로 자기 능력의 가능성과 한계도 짐작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왜 사는가?’라든지 ‘왜 내가 존재하는가?’라든지 하는 실존적이고 근원적인 자리에서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하는 일입니다. 종교는 그것이 어떤 종교든 그러한 자기정체성이 무언지 가르칩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는 그 누구든 그가 ‘신의 자녀’라고 가르칩니다. 그러한 새로운 자기 인식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삶을 스스로 다듬고 귀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루려는 진정한 노력을 이에 바탕을 두고 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또 다른 하나는 종교는 자기를 판단할 수 있는 준거를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자기 정체성의 확립과 이어지는 당연한 서술입니다만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 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자기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필요합니다. 종교는 바로 그러한 척도, 판단을 위한 준거를 마련해줌으로써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도록 해줍니다. 직접적으로는 종교가 지닌 계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척도는 더 깊은 차원에서 이른바 ‘양심’이기도 하고, 외경을 금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경험이기도 합니다. 자기 판단의 척도가 있어야, 자기를 살필 수 있는 거울이 있어야, 사람은 비로소 ‘성찰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완전을 도모하는, 그리고 과오를 늘 고치는, 그런 존재가 됩니다. 종교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끝으로 지적하는 것은 종교가 원만한 인격을 지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행동이 한편으로 쏠려 모나거나 편견에 잡힌 사람은 모자란 사람입니다. 충분하지를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경험한 것만을 절대화하는 사람은 자기 밖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인격이 가난하다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이익만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화하여 무시하거나 비굴하게 아부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은 실은 자기 삶이 없는 딱한 사람입니다. 모자라기는 앞의 경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물을 보되 보이지 않는 쪽을 포함하여 두루 살피고, 사람을 만나되 만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언행을 늘 삼가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셋을 고루 의식 안에 담아 신중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즐거움 속에서 감사를,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원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이러한 사람을 지어낼 수 있는 귀한 문화라고 사람들은 일컫습니다.

하지만 만물이 다 밝은 면과 그늘진 면이 있듯이 경건하고 돈독하고 순수한 믿음의 삶을 애써 영위한다 해도 종교적인 믿음이 인성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지 않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설명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종교가 사람다운 사람을 짓는데 부정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자칫 독선적인 품성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에 대한 신념을 갖는 것은 귀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만 옳다든지, 자기만 바르다든지, 자기만 존재한다는 투로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 곁에 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가 순수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그렇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독선적인 사람은 옆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신이 독선적이어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옳기 때문에 외롭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더 심하게 그릇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독선과 배타는 함께 갑니다. 물론 그러한 품성이 반드시 오만하고 건방진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겸손하고 온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말보다 자기의 생각이나 말을 더 주장하면 그러한 좋은 덕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는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독선적인 감사’에 이르면 그 감사는 아예 타인에 대한 저주와 다르지 않게 됩니다. 독선과 배타는 종교가 낳는 참으로 조심해야할 태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종교가 사람들을 반지성적인 인성을 가지게 한다는 점입니다. 믿음이란 합리적인 분석틀로 다 해체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삶이란 것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넘어서는 믿음을 지닌다는 것은 참으로 성숙한 인성을 가지게 되는 첩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것은 믿음이 지성을 배제해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지성이 삶에서 종국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성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랑, 합리적인 사려를 결한 동정, 충분히 분석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희망이란 언제나 자기를 속이는 일로 끝납니다. 지성적이지 않은 삶의 태도는 사실은 게으른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써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반지성적인 태도가 오히려 돈독한 믿음의 전형적인 모습인양 가르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젊은이들한테 이러한 반지성적인 신앙이 깊이 뿌리박게 되면 그 미래가 몹시 불안합니다.

이와 연결된 것입니다만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가 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편리한 환상’ 속에서 지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삶에는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의 고비에서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쉽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그러한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태도가 신에게 절대적인 의존을 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믿음의 삶이라고 여기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한 자세가 곧 돈독한 믿음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신을 회의하는 못된 불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면 신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마술 속의 심부름꾼이 되고 맙니다. 신이 자신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의 삶은 전혀 현실과 직면하지 못합니다. 잘 되도 신의 탓이지만 못 되도 신의 탓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책임질 몫은 하나도 없습니다. 참 뜻밖의 일입니다만 많은 학자들이 종교적인 인성 속에서 보통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유아기적 특성을 발견하곤 합니다. 맹목적인 의존, 동화적인 현실인식, 비상식적인 기대 등이 그러합니다. 신비를 빙자한 일탈이나 초월을 빙자한 탈속(脫俗) 등도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는 이처럼 두 다른 영향을 인성형성에 끼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문화적 차원에서나 공동체적인 차원에서도 이 두 면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실을 그대로 동시에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곧 종교는 옳음과 바름, 의미와 가치, 사랑과 평화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화 속에서,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실존 속에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는 갈등과 충돌, 광기와 환상, 증오와 살육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를 문화적인 차원에서, 국가나 민족 간에서, 공동체 간에서, 그리고 개인 간에서 직접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2. 종교적 성숙, 그리고 인격적인 성숙

위에서 언급한 사실은 우리 종교인들에게 상당한 아픔을 강요합니다. 받아드리기도 어렵고 부정하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바른 종교인,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새삼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교리적으로 접근하여 답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리는 때로 너무 추상적이어서 현실적으로 소화하기 힘들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박하게 우리 일상의 삶의 경험을 통해 정리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인류의 문화를 살펴보면 아득한 때부터 사람들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일정한 의례’를 수행해 왔습니다. 사람은 한꺼번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무척 긴 성장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개념적으로 말하면 ‘성장’과 ‘성숙’을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성장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숙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마련한 목표와 그렇게 준비한 현명한 방법을 선택하여 치밀하게 가꾸고 북돋고 이끌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득한 때부터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은 아직 어린 사람들한테 이 일을 베풀어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를 우리는 ‘지혜의 전승’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교육’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육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확장, 도구의 습득 등도 교육의 내용일 수 있지만 종국적인 교육의 목표는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도록 키우는, 말하자면 ‘성숙’을 기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든 우리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른을 되게 하는 제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기한도 다양하고, 그 제도나 의례의 꼴이나 틀도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결한 문화는 없습니다.

우리의 전통문화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상고대부터 훑어볼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오르면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것이 관례(冠禮)와 계례(笄禮)입니다. 형식적으로 보면 전자는 사내아이들한테 상투를 틀어 관을 씌우는 것이고, 후자는 계집아이들한테 쪽을 지어 비녀를 꽂는 일입니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이러한 의례를 통해 아이들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존재, 곧 성숙한 인격체로 변화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이제 아이들은 아명(兒名)을 버리고 자기 이름을 갖습니다.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이제는 하대(下待)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어른의 자의식을 가지고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로 자기를 인식하고, 어른들도 이제는 그 아이를 아이로 여기지 않고 어른으로 여깁니다. 역할을 주고,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고, 서로 의논하고, 더불어 책임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접을 합니다. 이를 우리는 성년식(initiation)이라고 칭합니다. 지금은 퇴색하여 거의 전승되지 않지만 아직도 그 흔적은 남아 매해 5월 셋째 월요일을 ‘성년의 날’로 우리는 지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례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이를 극적(劇的)인 모습으로 드러내 주는 사례를 아프리카의 어느 종족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족의 성년식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일상으로부터의 별리(別離), 비일상 공간에서의 배움, 그리고 일상으로의 회귀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특히 비일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배움, 또는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간결하게 말한다면 이도 또한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자기네 부족의 신화를 읊어 되뇌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 아이의 뿌리를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의 맥락을 좇아 아이는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합니다. 달리 말하면 아이들에게 자기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갖게 한다고 해도 좋습니다. 결국 이 단계는 어른이란, 곧 성숙한 인간이란, 자기 존재의 뿌리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자기 신화를 가진 존재라고 일컬어도 좋을 듯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나다!’라고 발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면 그는 성숙한 인간이 아닙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삶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일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삶은 고난으로 점철된 것임을 터득하게 합니다. 그래서 인위적인 고통을 육체에 과합니다. 그것을 어린 아이들이 견뎌내도록 합니다. 죽을 지경으로 힘든 아픔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고통을 이겨낸 존재’임을 스스로 학인하게 하고, 따라서 ‘어떤 고통도 앞으로는 너희들을 좌절시킬 수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고통은 회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여 의미 있는 것으로 극복해야 하는 당연한 삶의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어른은 그럴 수 있는 존재이고, 그래야 어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생명의 신비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오늘 일컫는 성교육이 이에 해당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남성과 여성, 사랑과 성, 생명의 신비와 그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는 것이 이 세 번째 단계의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성은 성장의 지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느냐 하는 것은 성숙의 지표이기도 합니다. 성은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쾌락만은 아닙니다. 생명과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출산은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어른이란 그 신비에 대한 외경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른이란, 성숙한 인간이란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고백할 수 있고, 고통의 의미를 알아 그것을 견딜 수 있고, 생명에 대한 외경을 지니고 그것을 책임지는 주체가 되면 그가 바로 어른입니다.

그러므로 사유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어른은 근원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충분히 분석적이고 통합적일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되살필 수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보이는 것을 뚫고, 보이는 것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하고, 들리는 소음을 뚫고 그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그것이 어른입니다.

이러한 어른으로 성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종교적인 교리에 알맞은 신도가 된다하더라도 사람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종교가 세속적인 성숙의 기준에 맞추어 서술되고 재편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 긴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만, 우리가 직면하는 일상의 문제, 곧 훌륭한 종교인인데 왜 그가 곧 훌륭한 인간일 수는 없다고 판단되는 경험을 하게 될까 하는 문제의 까닭을 살펴보고 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종교인이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비난은 참 아픈 지적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비판 앞에서 ‘종교인이 되면 참 인간이 된다’는 반응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신앙생활을 살펴 다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성숙과 인간적인 성숙은 전혀 상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함께 있어야 하고,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3. 자녀를 성숙하게 하기 위해 해야 할 부모의 몫

저는 교육학자가 아닙니다. 이러한 주제로 드릴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감히 몇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녀들을 참으로 어른이게 하려면, 성숙한 인격체이게 하기 원한다면, 부모가 자녀를 지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규범이나 원칙을 강요하는(indoctrination)것은 ‘어른’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숙하지 못한 자아가 저지르는 독선이거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랑의 이름으로 그것이 펼쳐진다하더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자기에 대한 불신만을 철저하게 익힙니다. 대체로 그러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부모는 자식에게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힘이고 권위이고 체제입니다. 자식들은 그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힘의 과용은 언제나 자제 되어야 합니다.

실제 일상적인 삶에서 이러한 지배적인 태도는 사사건건 행동을 지시하는 모습으로(instruction) 나타납니다. 그것은 친절하고 배려 깊은 태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위험에서 자녀를 방어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태도는 자녀의 가능성을 닫아버립니다. 그것을 펼 수 있는 기회가 막힙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들은 의존적이게 되어 스스로 서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자녀가 자기에게 노예적 귀속을 하고 있는데도 부모는 그 자녀들이 순종적인 애정을 자기에게 쏟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의 몫을 하고 싶은 아이들의 저항을 못된 악으로 치부하여 정죄하곤 합니다. 두려운 착각입니다.

부모는, 무릇 가르침은, 자녀로 하여금,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줄 의무밖에 없습니다. 자녀의 삶을 살아주는 것이 사랑이고 희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부모는 아직 어린 유치한 인성을 가진 어른,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에 불과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우미(enabler)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부모의 존재를 자녀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일상을 지내다가 스스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할 때, 속수무책인 채 도움이 절실해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거기 빙그레 웃고 있는 그러한 어른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서야 할 자리이고, 그것이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유념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만났을 때 내 이야기보다 자식의 이야기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자식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신뢰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말함은 대화를 낳지 않습니다. 그러나 들어줌은 대화를 낳습니다. 그리고 말할 때조차 그것은 규범적인 당위를 발언하기보다 내 경험과 삶을 고백하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규범에 이르지 않는 증언을 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이라면 그것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힘들지만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백에 자신의 부끄러운 실수를 가감 없이 담는다면, 자신의 후회를 진솔하게 담을 수 있다면, ‘그러므로 너는~’하는 투의 발언을 담지 않는다면, 조금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와 아울러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는 부모의 역할을 그래도 꽤 하는 어른의 모습을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기다림은 참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인내는 거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모멸을 스스로 견뎌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되는 분노와 아픔과 갈등과 혼란을 스스로 다듬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이 곧 인내입니다. 그것이 기다림입니다.

종교적인 성숙을 위해서도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인 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종교도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종교생활도 일일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담담하게 증언하고, 그 증언에 어울리는 삶을 살면서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성급하게, 자기만족을 위한 서두름 속에서 자식의 ‘영혼이 병들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식에 대한 자신의 꿈이 살아생전에 이루어지 않아도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는 기다림을 지녀야 할 것 같습니다. 대체로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그러한 존재들이 아니었습니까. 신앙의 삶에서도 그러한 기다림과 참음이 필요합니다. 그래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진술을 하고 있자니 저 자신이 쑥스러워집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으로 부모 노릇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자주 젊은이들에게,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제가 좋아하는 시를 읽어주곤 합니다.

Though the evening comes with slow steps and has signalled all songs to cease:

Though your companions have gone to their rest and you are tired:

Though fear broods in the dark and the face of the sky is veiled:

Yet, bird, O my bird, listen to me, do not close your wings.

 

That is not the gloom of the leaves of the forest,

that is the sea swelling like a dark black snake,

That is not the dance of the flowering jasmine,

that is flashing foam.

Ah, where is the sunny green shore, where is your nest?

Bird, O my bird, listen to me, do not close your wings.

 

The lone night lies along your path,

the dawn sleeps behind the shadowy hills.

The stars hold their breath counting the hours,

the feeble moon swims the deep night.

Bird, O my bird, listen to me, do not close your wings.

 

There is no hope, no fear for you.

There is no word, no whisper, no cry.

There is no home, no bed of rest.

There is only your own pair of wings and the pathless sky.

Bird, O my bird, listen to me, do not close your wings.

 

R. Tagore The Gardner LXVII

 

모두가, 우리 어른들도, 우리 자녀들도, 신도도, 비신도도, 다 성숙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날개를 펴 자기 하늘을 마음껏 나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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