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직면한 세번째 고비 -박영식 전연세대총장

2009. 7. 2. 오후 7:27:02

글자

대학이 직면한 세번째 고비

 

박 영 식 (전 연세대 총장, 학술원 회원)

 

한국의 대학이 직면한 첫 번째 고비는 가난이었다. 당시 나라의 경제기반이 빈약한데다 설상가상으로 6․25사변으로 폐허가 된 황무지에서 한국의 대학은 시작되었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의 슬픔을 안고 글자 그대로 맨손으로 출발한 것이다. 교사(校舍)도 없고 교수도 부족하고 책도 실험기자재도 없는… 오로지 있는 것이라곤 “뜻”밖에 없었다. 배우려는 의욕과 가르치려는 의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때에는 사제지간(師弟之間)에 존경과 애정이 있었고 교칙이 살아 있었고 질서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대”가 있었다.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2000년대 쯤에는 교육여건도 크게 개선 될 것이고, 교육이 “독립”될 것이라는 기대였다. 우리가 기른 박사들이 우리 대학의 교수로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교육적 독립성을 담은 기대였다. 기대는 꿈이요 희망이다. 기대는 힘을 내게 하고 힘을 모으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학은 ‘가난’이라는 첫번째 고비를 인고로 견뎌냈으며 내일에 대한 기대로 극복할 수 있었다.

대학이 직면한 두번째 고비는 산업화였다. 산업화의 역군을 길러내어 산업화를 성공으로 이끄는 일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65년에서 1990년에 이르는 25년 간은 산업화의 시기였다. 구미(歐美)의 나라들이 250년 간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를 불과 25년만에 이룩한 것이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가난의 한에 맺힌 구호 아래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이룩한 산업화였다. 그 산업화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일인당 국민소득 150불의 빈국에서 9000불의 부국으로 탈바꿈하게 한 것이다. 1965년에 우리나라에는 재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1990년에는 30대 재벌이 생겨나게 되고, 우리나라가 세계13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 경제성장에 힘입어 젊은이들의 키는 10cm이상 커지고, 우리 사회의 각 분야는 넘쳐나게 확대된다.

경제성장과 사회확대의 물결은 그대로 대학에 파급된다. 대학은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게 된다. 산업체들이 대학학력의 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대학은 교육의 질을 고려할 겨를도 없이 학생들을 마구 배출하였다. 대학의 재원이 거의 전적으로 학생등록금에 의존되어 있는 사립대학들은 대학의 재원을 위해 학생정원을 늘리고, 늘어난 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집을 지었고 그 재원을 위해 다시 정원을 늘리는 악순환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산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인력의 재훈련을 위해 특수대학원들을 우후죽순처럼 세웠다. 우리는 그 25년 동안을 대학이 가장 호황(?)을 누린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대학입학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고, 대학졸업자는 인문․자연의 기초학문 전공자들도 모두 취업할 수 있었으며, 1989년 까지는 박사는 국내․외 박사를 가리지 않고 모두 대학교수로 될 수 있었다. 산업화시기에 교육에 종사한 사람들은 지금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교육이 산업화의 역군을 길러내었고 그 역군들이 산업화를 성취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은 산업화를 성취해야 하는 두번째 고비를 성공적으로 넘겼다할 것이다.

대학이 직면한 세번째 고비는 세계화이다. 세계화는 우리의 교육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여야 하고, 산업화 과정에서 팽창된 대학의 규모를 축소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이 세번째 고비를 순조로히 넘기기 위한 진단과 처방은 무엇인가. 우리는 1990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1990년을 전후하여 국내․외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밖으로는 동구권의 공산국가들이 붕괴되고,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74년 간에 걸친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자인하면서 공산주의를 포기하였고 소련을 해체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회가 정보사회로 전환하면서 잠복되어 있던 세계화의 바람이 거칠게 일기 시작하였다. 안으로는 1987년 6월의 국민민주항쟁으로 군사독제가 막을 내리고 문민시대가 열리면서 자유의 물결이 범람하게 되고, 억눌렸던 노사분규가 폭발하면서, 산업구조를 3차 산업으로 조정할 겨를도 없이 임금이 급격하게 상승되었고, 경제성장은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때까지 확대되었던 사회구조는 과다현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지만 팽창의 관성에 밀려 구조조정에 손을 대지 못하여 소위 IMF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학교육도 새로운 국면에 처하게 된다. 경제성장에 부응하여 팽창된 대학규모를 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오늘 한국의 대학교육은 1950년대 우리가 “기대”했던 그러한 교육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교육의 독립성은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의존성이 심화되고 있다. 조기유학이 초․중․고등학교로까지 확대되고 있음이 이를 입증한다. 여기서 오늘 우리의 대학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 요인들을 몇 짚어보기로 한다.

우선 대학재정의 학생등록금 의존성과 그로 인한 대학의 양적 팽창을 들 수 있다. 해마다 학생들이 등록금 투쟁을 하는 것도, 그 때마다 총장이 총장실을 떠나 전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등록금 때문에 총장이 겪는 어려움은 총장이 그 짐을 대표해서 지는 것일 뿐 그것은 대학재정의 구조에 기인 된 것이다. 대학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학생정원을 늘리고 늘어난 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집을 짓고, 그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정원을 늘리고… 이 일을 반복해 온 것이 저간의 대학의 실정이고, 학생을 늘이고 집을 짓는 것이 총장의 업적으로 된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한국의 대학들은 양적 팽창에 일도 매진하느라고 학문의 수월성에 소홀하였고 교육의 질을 심화하는 일에 인색하였다. 이것이 오늘 한국의 대학들이 외양은 세계적 수준을 넘고 있지만 교육의 질에서는 바닥을 헤매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다음으로 대학의 학위(學位) 신인도(信認度)의 추락을 들 수 있다. 학사학위의 신인도는 1981년 자율화정책과 대학졸업정원제를 실시하면서 한꺼번에 학생정원을 130% 늘이면서 망가지기 시작하였고, 석사학위의 신인도는 1970년대에 각 대학들이 특수대학원들을 다투어 설치하면서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교육부의 「교육통계」에 의하면 2002년도의 대학원 학생수가 1979년도 학부학생수에 맞먹고 있음이 이를 말해 준다. 박사학위의 신인도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외에서 박사가 마구 쏟아져 박사실업시대를 낳으면서, 그리고 국내 박사가 외국 박사에 밀려 교수되는 일이 어려워지게 되자 대학졸업생들이 방향을 바꾸어 외국대학으로 나가게 되면서, 그리고 특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들에게 대학원 박사과정에 전학할 수 있는 길을 터 주면서 박사학위의 신인도는 겉잡을 수 없게 되었고 대학원은 활기를 잃게 된 것이다.

일을 더욱 나쁘게 하는 것은, 2006년 현재 대학교 203개 대학 158개로 고등교육기관이 300개를 넘어서 있으며, 2000년대에 들어 출산률의 급격한 저하로 연간 출산아의 수가 80만명 선에서 40만명 선으로 내려앉아 산술적으로는 앞으로 대학의 반이 문을 닫아야 할 형국에 접어들어 있다. 그래서 이미 수년전부터 많은 대학들이 학생정원을 채우지 못해 신입생 유치작전을 펴고 있는데, 이는 바로 원서만 내면 누구나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대학의 학사학위 신인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대학의 현실은 결코 1950년대에 우리가 기대하던 모습일 수 없고, 우리의 대학들이 세계적 평가에서 하위에 머물고 있는 현상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다. 대학은 오늘의 외형에 안주할 때가 아니다. 깊은 자기 성찰과 혁신을 위한 용단이 절실한 때라고 할 것이다.

1950년대 황무지에서 출발한 한국의 대학은 지난 50년 동안에 경이적 성장을 거듭한 것은 사실이다. 건물도 많이 짓고 도서관도 마련하고 실험기자재도 갖추고 캠퍼스도 번듯하게 조성하였으며, 교수들의 교육배경은 세계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대학의 외양은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 외양 갖추는 일이 끝나 바야흐로 교육의 질을 위해 방향을 전환하려는데 대학교육붕괴설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으니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음의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타이밍(timing)을 놓쳤다는 것이고, 그 둘은 비대한 몸집이 오히려 큰 부담으로 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 셋은 세계화가 우리의 눈을 밖으로 돌리게 했고, 우리의 기준을 높여 놓았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경제성장이 멈추었을 때 산업구조와 사회구조를 조정했어야 했는데 그 때를 놓쳐 1997년에 IMF를 맞은 것과 같이, 대학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동안에 팽창한 대학구조를 조정하고 교육의 방향을 질로 전환했어야 했는데 그 때를 놓쳐 일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이 그 방향을 교육의 질로 전화하는데 지금의 비대한 몸집이 큰 부담이 되리라는 것이다. 대학이 질의 교육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대학재정의 확충이고 다른 하나는 교수들의 자세 전환이다. 대학교육이 질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수 대 학생비율이 1 대 20 이하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학생등록금만으로는 안 되고 등록금과 국가보조금과 대학의 자체 재원이 삼위일체(三位一體)로 결합되어야 하는데, 그 때 지금의 비대한 몸집이 큰 짐으로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교육이 내실화 되기 위해서는 교육․학습방법에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교육이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쌍방으로 진행되면서 학생이 교육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야 하고, 교수와 학생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의 핵심은 만남이다. 만남이 없는 교육은 교육이라 할 수 없다. 스승과 학생이 일 대 일로 만나 대화하는 소크라테스적 교육방법을 능가할 교육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교수와 학생의 만남의 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교수들이 지금과 같이 논문쓰는 일에 지나치게 내몰려서는 안 될 것이다. 교수평가에서 교육과 만남이 무게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 만나는 일을 시간낭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수는 학생들의 답안지를 돌려주어야 할 것이고, 레포트도 평가하여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교육의 질을 높이는 일에서는 교수들의 참여와 역할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지금의 교육적 관행에서 벗어나는 자세전환이 절실히 요청된다 할 것이다.

세계화는 1970년대 후반부터 언급되어오다가 1990년대 중반에 개념화되어 우리의 피부에 와 닿게 되었지만, 실상은 1965년대에 우리나라가 산업화에 착수할 때 이미 세계화에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는 생산구조를 기계화하고 자동화하여 생산을 대량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체계가 아니고 무역을 위한, 세계시장에 내 물건 내놓고 남의 물건을 사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화는 우리나라가 산업화에 착수 했을 때 이미 시작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1980년대 중반에 일인당 국민소득이 8천불을 넘어서면서 세계에 눈을 돌려 세계로 나가게 되면서 우리의 눈높이가 높아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대학은 이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채 여전히 양적 팽창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대학생들은 물론이요 초․중․고 학생들까지 다른 나라에 빼앗기는 형국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세계화는 세계적 기준, 세계적 수준, 세계적 경쟁력을 요구한다. 세계화는 대학들을 세계적 기준으로 평가하여 서열화한다. 그리고 그 평가의 기준은 교육의 양이 아니고 교육의 질이다. 따라서 국내 대학들끼리의 경쟁이나 국내 제일은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그리고 이 경쟁은 이름만으로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대학들이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규모를 줄여야 하고, 거기에 따른 재정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교수․학습방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교수의 마음을 움직여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대학은 교수이다”라는 말을 되뇌이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이 어떤 평가를 받는가는 교수의 몫이다. 교수의 연구업적과 교육성과에 의하여 대학이 평가되기 때문이다. 총장의 일은 그 여건을 마련하면서 교수들의 역량을 최대화하기 위해 격려하고 독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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