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 탈북자 심층 인터뷰 ①

2005. 2. 23. 오전 10:34:21

글자
월간 『말』을 통해, 탈북 브로커가 주도하는 기획망명의 비인간성을 폭로해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 비디오저널리스트 조천현 전문기자가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중국을 떠도는 수많은 탈북자를 10년 가까이 밀착 취재해 온 조천현 전문기자는 “탈북자들을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고 평한다. 한국으로 가려는 탈북자와 중국에 남아 있으려는 탈북자, 그리고 북조선으로 되돌아가려는 탈북자 등 세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조 기자는 심층 인터뷰를 통해 각 유형의 탈북자들이 말하는 ‘그들의 삶과 꿈’을 지면에 옮기기로 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바로 ‘북으로 되돌아가려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지난 해 겨울, 조 기자가 2개월 간 조-중 국경지역에서 만난 탈북자 4명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조천현 전문기자 vjcho@hotmail.com


“탈북자들이 중국 땅에서 속절없이 숨어사는 것은 이게 다 미국 놈들 때문이라고 봐요. 경제 봉쇄만 하지 않았어도 탈북자들이 중국 땅에서 헤맬 일도 없고 탈북자들이 생길 일도 없다고 봐요. 탈북자들이 제나라가 싫어서 나온게 아니라 방법이 없으니까 나오는 거지. 나는 근본적으로 미국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숱한 사람들이 중국 땅에 나와 헤매고 몽땅 불법체류자로 만들어 놓은 게 미국놈들 때문이라고요.”

1999년도에 탈북한 김영선(28세, 함북청진, 가명)씨는 말끝마다 ‘미국’을 비난했다. 그녀가 탈북하게 된 동기는 배고픔 때문이 아니었다. 굶어본 일이 한번도 없다는 김씨는 탈북자들이 말하는 배고픈 고생에 대해서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국가 간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부모 몰래 장사를 시작했다. 금을 사 화교들에게 파는 일과 달러를 바꾸는 일을 했다. 하루는 청진역에서 대학교 동창생을 만나 금을 싸게 구해준다는 말을 믿고 친구를 따라 함북 무산으로 나섰다.

무산읍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청년들은 ‘금’이 있는 곳으로 가자며 그녀를 한 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준 음식을 먹고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그곳은 노부부가 살고 있는 조용한 시골마을의 농가였다. 밖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두만강 물소리였다. 그 집 할머니가 밥상을 차려주었지만 먹지 않았다. 할머니는 “여기는 중국”이라고 하면서 “단념하라”고 말했다.

“내 인생 망가뜨린 놈 받아주는 한국에는 안가겠다”

말로만 들은 중국 땅에 자신이 와 있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 소리치자, 밖에서 감시하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들어와 폭행을 했다. 집에 보내 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몸에 있던 현금은 두만강을 건너오기 전 다 털린 상태였다. 북한 사람들은 “북조선으로 보내면 자신들이 다친다고 하면서 이곳에서 죽을 건지 중국 안쪽으로 가 살건지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그녀는 북으로 가겠다고 주장하며 밥도 먹지 않고 버텼다. 기운이 빠지고 지쳐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러자 무산에서 그녀를 납치해 온 북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고집이 세다며 폭행하고 강간을 하는 바람에 그녀는 순결을 잃고 말았다. 김씨는 나와 처음 만날 때의 당당했던 표정과는 달리 눈물을 떨구며 말을 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여자는 순결해야한다고 배웠어요. 제가 그 나쁜 놈들한테 당하는 순간 나의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내 몸이 더렵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앞뒤가 보이지 않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고 말았어요. 그 놈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이틀 후 택시를 타고 조선족 두 명과 한족이 찾아왔다. 중국 군인복장이었다. 국인복장을 한 조선족이 안심하고 따라오라고 해 지프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차를 타고 연길까지 나와 결국 팔려가게 되었다. 그들은 인신매매꾼들이었다. 북한인 인신매매꾼들과 연결되어 북에서 건네준 처녀들을 군인복장으로 위장하고 데려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인민폐 5000원에 팔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북으로 되돌아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북조선 당국의 간부인 아버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때 북에 돌아가지 못한 게 아직도 후회스럽다”고 흐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팔려간 곳에서 6개월 만에 탈출해 공장일과 식당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현재 생활에 대해서는 극구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북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지만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엷 용기를 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2003년 6월, 심양 서탑가에서 자신을 성폭행한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가 한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있었다”는 게 그녀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내 인생 망가뜨린 놈들 받아주는 한국에 뭐하러 가요. 그 더러운 곳에 가서 또 당하느니 차라리 부모님이 있는 고향에 되돌아 갈랍니다.”
그녀는 헤어지면서 기자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뼈아픈 이야기였다.
“좋은 뉴스거리 만들려고 탈북자를 시켜 대사관에 뛰어드는 것을 기사거리로 삼지 말아요. 중국에 남아있는 탈북자들이 어디에 가 하소연하겠어요. 탈북자들을 웃음거리로 삼는다면 이는 탈북자들을 두 번 죽이는 겁니다”

기자가 조사한 인신매매범들은 대부분 북한인들이었다. 그들은 탈북 여성들에게 접근해 중국에 가면 일자리를 구해 주겠다거나 시집을 보내주겠다고 꾀어내 중국인들에게 팔아넘기거나, 김씨처럼 폭행 후 강제로 끌고 오는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북한이나 중국에서의 인신매매범의 형량은 매우 무겁다. 북한인 인신매매범의 경우, 대부분 처벌이 두려워 한국행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 올 경우 피해를 입은 탈북 여성들이 신고해도 처벌받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탈북여성 이순자(24세, 가명)씨는 자신을 6번이나 팔아넘긴 인신매매범에게 한국에 와서도 괴롭힘을 당해 통일부에 신고를 했지만, 통일부로부터 되돌아온 답변은 “제 3국에서 일어난 일은 한국에서 처벌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은 이들 탈북여성 피해자들에게 또 한번의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도강한 것도 죄인데 조국을 배신할 수 없습네다”

지난 해 말, 탈북생활 4년째인 장경철(32세, 함남 함흥출신, 가명)씨를 만나기 위해 연길에서 장춘으로 이동했다. 장씨는 1년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어렵사리 그에게 연락이 다시 닿은 것이다. 그는 “카메라를 가져오면 만나지 않겠다”며 “빈 몸으로 와 달라”고 요구했다.

연길 기차역의 풍경이 색달랐다. 오후 5시가 되자 연길 기차역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얼마 전 북경주재 재외공간 기획망명 사건으로 브로커들을 검거한 후, 탈북자들에 대한 검문도 심해졌다. 탈북자들이 연길에서 빠져 나가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너 명의 공안이 대합실 출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매섭게 바라보며 수상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불러 신분증 검사를 했다. 나도 검문을 받았다. 여권을 보여주자 사진과 나의 얼굴을 대조하며 함께 가는 일행이 있는가 물었다. 혼자라고 대답하자 미심쩍어 하며 여권을 돌려주었다. 기차에 올라타 장춘으로 출발했다. 장춘까지 가는 9시간 동안 검문은 서너 번이 더 있었다.

그렇게 장춘역에 도착했다. 장씨가 마중 나오기로 약속했지만 20분이 지나도 보이지 않았다. 장씨가 일하는 식당으로 전화를 했지만 전화도 받지 않았다. 한참 후 기자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장춘역 앞 춘이호텔 앞으로 걸어오라고 했다. 역에서 호텔까지 100여 미터를 걸어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장씨였다.

“빈 몸으로 오라고 했는데 가방을 메고 왔다”며 투덜거렸다. “카메라로 찍지 않겠다”고 말하자 웃어 보였다. 장씨는 내가 나오는 것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상한 사람들과 함께 오거나 내 뒤를 누군가 따라오면 만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한 행동이라며 이해해 달라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는 사우나(찜질방)로 향했다. 중국의 사우나는 한국의 웬만큼 좋은 찜질방 못지않게 시설이 좋다. 장씨와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고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씨가 일하는 식당의 로반(사장)은 한국 사람이지만 중국말을 잘하는 장씨가 북조선 사람인지 모른다고 했다. 함께 일하는 조선족 종업원들도 눈치채지 못한다고 했다. 장씨는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한지 1년이나 됐다.

명절에 다른 종업원들은 고향집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가면, 혼자 남아 식당을 지키게 되는데 그때가 가장 외롭다며 명절 때 자신을 한번 찾아오라고 부탁까지 했다. 우리는 아침부터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술기운이 오르기도 전에 장씨의 눈가에는 눈물이 흘렀다. 식당에서 매일 한국 위성 TV를 보면서 많은 갈등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식당에 찾아오는 한국 손님들을 볼 때마다 북에 있는 가족들이 더 생각난다고도 했다.

“기자 선생, 솔직히 나도 한국가자고 생각한 적 있었슴다. 내가 알고 있는 탈북자도 6개월 전에 한국 갔슴다. 그런데 그 사람 부럽지 않슴다. 우리 아버지가 굶어죽고 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워계셔서 내가 맏이라 살려보겠다고 중국 땅에까지 나왔슴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버리고 한국가서 나 혼자 잘 살 수 있겠습니까? 도강한 것도 죄인데 조국까지 배신하고 두 번 죄를 지을 수 없잖습니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장씨에게 술만 따라줄 뿐. 장씨는 내 몸에 카메라가 없기 때문에 편하다고 했다. 카메라 없이 이렇게 만나는 게 얼마나 좋냐며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카메라를 버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날 밤, 한 탈북 여성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노래방에서 일한다고 했다. 장씨처럼 북으로 가고자 하는 고향 사람이었다.

기자는 ‘북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실제로 북으로 가고자 하는 탈북자들이 많긴 하지만, 그들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들어갈 마음도 없는데다 은둔하고 있다는 특성상, 한국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생존전략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북조선, 생계형 탈북자는 관대하게 처벌”

장씨는 시계를 보면서 식당운영시간이 가까워졌다면서 오후 9시까지만 일하고 오겠다고 했다. 저녁 늦게 사우나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 9시 정각, 장씨가 사우나 앞에 다시 나타났다. 택시를 타고 10여 분 가량 갔을까. 한글로 된 네온사인 간판들이 요란하게 발광하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 중 한 노래방으로 들어섰다. 한국 손님들이 많이 오는 제법 큰 노래방이었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한국 노래 소리에 이곳이 한국인지 중국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우리는 종업원이 안내해준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한참 후 30대 중반의 여성 두 명이 들어왔다. 그 중 한명이 장씨의 고향사람이라는 탈북 여성이었다. 생김새나 외모가 깔끔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강은주(34세, 평양, 가명)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함께 온 친구는 북조선에서 한 마을에 살았던 화교 친구라고 했다. 화교들은 중국에 나오면 중국인 신분증을 받고 북조선에 들락거릴 수 있다. 그녀는 화교 친구와 함께 셋집을 얻어 생활하기 때문에 불편함이 없다고 말했다.

탈북생활 5년째인 강씨는 북조선에서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예술단 단원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1998년 중국의 친척집에 경제적 도움을 받기 위해 통행증을 받아 중국으로 왔지만 시골마을에 있는 친척집의 형편이 어려워 북에 들어가지 못하고 눌러앉게 되었다. 마을 아저씨의 소개로 연길 노래방 주방에서 청소일을 했는데, 노래부르는 것을 주인이 보고 난 뒤로 노래방 도우미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매년 인민폐 10000원씩 중국친척을 통해 북조선의 가족에게 전달한다고 했다. 2003년 8월에는 연길 셋집에서 중국공안에게 붙잡혀 강제송환된 후 1개월 만에 풀려나왔다. 그녀는 대학생인 남편이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만 중국에 나가 돈을 벌기로 했다. 그녀는 “북으로 강제송환 당해도 생계를 위해 단순 탈북했다는 사실만 증명하면 처벌이 관대하다”고 밝혔다.

“한국 사람을 만난 적은 없고 시골에 가서 밥해주고 식모살이 했다고 거짓말 했습니다. 청진 도 집결소에서 거주확인하고 다시는 중국에 가지 않겠다는 손도장을 찍고 거주지 분주소를 거쳐 집으로 보내주었습니다. 많이 변했습디다. 위에서 도강쟁이(탈북자)들 돈 빼앗지 말라는 문건이 내려와서 나도 하나도 안뺏겼습니다. 그래도 집결소에서 안전원들이 이리저리 흔들어댑디다. 어떤 사람들은 간수들 돈 주고 몰래 도망친 사람도 있고, 병보석 형식으로 나보다 빨리 나간 사람들도 있어요. 북에도 돈이 통해요. 나는 남편이 대학졸업하고 직장배치 받을 때까지만 고생하고, 우리 딸 OO 두고 어딜 갑니까. 한국 안가요. 올 겨울에 두만강 얼면 조선으로 건너갈 거예요”

강씨의 한달 수입은 인민폐 5000원이라고 했다. 그년가 일하는 노래방에 한국 손님들이 많으며, 손님에게 받는 팁은 테이블당 100에서 200원이라고 했다. 탈북 여성들이 유흥업소에 많은 이유는 돈벌기가 쉬운 면도 있지만, 일반직업을 구하자면 신분증(호구)을 요구하고 선불금(예치금)을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흥업소로 흘러들어온다고 했다. 유흥업소에서 전화가 오면 그 때마다 도우미로 손님들과 놀아주면 되기 때문에 일하기도 편하고 단속에 걸릴 일도 없다고 했다. 또한 한국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아 노래방 주인도 강씨를 잘 대우해준다고 옆에 앉은 화교친구가 말했다.

노래 한곡 부르고 이야기하자며 장씨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탈북자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연변노래 ‘타향의 밤’을 시작으로 우리는 한참동안 한국노래와 북조선 노래를 섞어가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3시간 뒤 노래방에서 나온 장씨와 나는 다시 사우나로 갔다. 거기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나는 연길로 돌아왔다.

탈북자 허씨, 두만강 건너 북조선으로 가던 날

이후 기자는 친분이 있는 한 조선족으로부터 중국생활을 하다 북으로 들어가려는 가까운 친척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연길의 한 아파트에서였다. 부인과 함께 탈북해 3년째 생활하는 허병철(57세, 함북회령, 가명)씨는 중국에서 돈을 벌면 친척을 통해 보내거나 부인이 직접 두만강을 건너 북조선의 가족에게 돈을 전달하고 다시 중국으로 나온다고 했다. 중국에서 모은 돈 3만원을 가지고 들어가 장사밑천으로 쓰겠다며 중국생활을 청산하려니 마음이 홀가분하다고 했다.

허씨는 중국 용정이 고향이지만 17세였던 66년 중국 문화대혁명 때 아버지가 반우파인 민족주의자로 찍혀 한밤중에 두만강을 건너 북으로 갔다. 중국에는 친누나가 생존해 있다. 당시 북으로 간 조선족들은 북에서 다 받아주며 집과 직장을 주었고, 허씨 같은 젊은이들은 학교에 보내주었다고 한다. 때문에 허씨는 “지금까지 김일성 수령의 은덕에 살 수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친누나가 북으로 가지 말고 중국에서 살라고 권유해오지만 허씨는 북조선에 있는 자식 때문에라도 꼭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탈북자들은 북한체제나 김일성 부자를 쉽게 비판하지 않았으며, 공통적으로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허씨는 저쪽 선(북조선)과 전화로 약속했기에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조선의 경비병과 연락이 닿으면 강에서 붙잡은 척 앞장을 세워 경비병들이 집 앞까지 바래다준다고 했다. 허씨는 짐을 꾸리고 가전제품도 사두었다. 방안 가득 가져갈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허씨는 자신이 먼저 들어간 후 짐은 조선족 친척을 통해 북조선으로 가져오기로 하고 만약을 위해 부인은 나중에 안전하게 자리를 잡은 후 부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허씨에게 두만강을 건너는 날 강가에 함께 따라가도 괜찮겠냐고 부탁하자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러나 “북조선에서 사람이 나오면 아무 말 하지 말라”는 단서를 달았다. 한국 사람인줄 알면 큰일 난다며 조선족 친척 행세를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

허씨가 떠나기로 한 날, 허씨의 친척에게 전화가 왔다. 허씨는 오전에 개산툰에 먼저 내려가 바래다 줄 사람을 접선하기로 했다며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했다. 연길에서 택시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개산툰진 OO촌에 도착했다. 허씨가 보였다. 함께 건너갈 길 안내자도 있었다. 북조선 여자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나의 눈을 외면했다.

허씨는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친척이 건네준 가방을 받아 돈을 꺼내 비닐봉지에 말았다. 두만강 물에 젖지 않기 위해서였다. 허씨는 담배를 연거푸 몰아 피웠다. 가방에 든 중국술을 꺼내 들이키며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안내인은 일없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새벽 한시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만강으로 나가 동정을 살피고 온 조선족 집주인의 신호에 우리는 두만강변으로 나섰다. 12월초 두만강의 강바람은 매우 세차게 불고 있었다. 강가의 눈은 녹지 않았고 강물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모두들 강둑 밑에 포복한 채로 건너편에서 올 불빛신호를 기다렸다. 안내인과 약속한 북한 경비병의 라이터 불이 두 번 반짝거리자 허씨와 안내인은 손을 잡고 두만강 물에 들어섰다. 허씨는 기자에게 악수를 청하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친척에게는 귓속말로 두만강을 무사히 건너면 라이터불로 세 번 반짝거리겠다고 약속했다. 허씨가 작대기를 짚고 두만강을 휘청거리며 건너기 시작했다. 10여분 후 허씨는 안전하게 건넜다는 신호로 라이터 불을 반짝거린 뒤 사라졌다. 두만강 물은 그렇게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월간말 2005년 2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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