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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쿠바 피그즈만 사건으로 본 미국의 북한 전복 음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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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동북아 평화포럼 수석집행위원 12일 오후 중국 베이징에서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 등이 열려고 한 탈북자(새터민) 관련 기자회견이 신원을 알 수 없는 중국인들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김문수 의원 등은 중국 정부의 위법 통보에 개의치 않고 기자회견을 강행했으며, 중국 공안(경찰)으로 추정되는 6~7명의 남자들에 의해 회의장 전등이 꺼지고 50여 명의 취재진들도 밖으로 밀려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회의장에 들이닥친 사람들이 중국 공안이거나 혹은 이들이 공안의 묵인 하에 난동을 벌인 것이라면, 이는 양국간의 외교적 분쟁으로 비화될만한 일이다. 더군다나, 외국의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벌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른 바 ‘기획탈북’과 관련된 이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의 시각을 동시에 가져야 하리라 본다. 중국 공안들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된 것이라면 중국 정부에게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한 가지 시각이다. 한편, 탈북과 기획탈북은 차원이 다른 것이며, 기획탈북은 미국의 대북전략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또 다른 시각이다. 탈북과 기획탈북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은, ‘탈북’은 경제적 곤경에 처한 북한 주민들의 자율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 반면, ‘기획탈북’은 탈북을 인권문제로 부각시키며 북한정권의 국제적 고립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의 개입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획탈북이 미국의 대북전략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은 문제라는 점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에서는 북한인권법이 이미 제정됐으며, 일본에서도 집권 자민당과 민주당(제1야당)에 의해 일본판 북한인권법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특히, 일본측에서는 기획탈북 단체에 대해 자금지원까지 고려하고 있는데, 역사적 선례를 볼 때 일본이 순수한 ‘마음’으로 북한 주민들을 도우려는 게 아닐 것임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으리라 본다. 미국이 탈북자들에 대해 우호적인 이유 역시, 이미 언론에서 수차 강조된 바와 같이, 북한정권을 압박 내지는 붕괴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1961년 피그즈만(The Bay of Pigs) 사건이다. 이른 바 쿠바판 ‘탈북자’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그즈만은 쿠바의 남서쪽에 있는 만(灣)이다. 그리고 피그즈만 사건이라 함은, 1961년 4월 17일 밤 미국 CIA와 마피아의 지원을 받은 쿠바판 ‘탈북자’ 1400여 명이 피그즈만을 기습 공격했다가, 이 중 100여 명은 사살되고 1200여 명은 생포된 사건을 말한다. 그럼, 사건의 배경·경과과정·결과를 살펴보기로 한다. 쿠바인들은 1902년에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미국의 경제적 착취와 독재정권의 정치적 압제가 쿠바인들을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차례 발생한 민중봉기는 미국의 비호 하에 번번이 진압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칟경제적 ‘비극’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정권의 붕괴였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이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혁명정권에 의해 진행된 사회개혁은 1960년 후반부터 사회주의혁명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쿠바는 1961년 1월 1일 미국과 단교하고 미국기업(쿠바 소재)에 대한 국유화 조치도 단행하였다. 미국에 대해 ‘강수’를 던진 셈이다. 자신들의 ‘앞마당’인 쿠바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 전개에 당황한 미국은, 1961년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쿠바를 침공할만한 뚜렷한 명분을 찾지 못한 미국은 그 대신에 한 가지 편법을 생각해냈다. 바로 쿠바 망명자들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이이제이, 以夷制夷). 여기서, 쿠바 망명자들은 쿠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쿠바를 탈출한 사람들이다. 탈북자들은 ‘경제적’ 이유에서 북한을 탈출한 것이고 쿠바 망명자들은 ‘정치적’ 이유에서 쿠바를 탈출한 것이지만, 두 경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탈북자든지 쿠바 망명자든지 간에, 이들을 대하는 미국의 목적은 똑같다는 점이다. 바로 상대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 이들을 환대한다는 것이다. 그럼, 미국이 어떤 방법으로 쿠바 망명자들을 이용하여 쿠바 전복을 꾀했는지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1961년 4월 4일 미 국무부에서는 쿠바 문제에 관한 비밀회의가 열렸다. 케네디 대통령,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마라 국방장관, 덜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 비셀 CIA 작전차장 등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자리에서, 비셀 차장은 다음과 같은 작전계획을 참석자들에게 소개했다. ①4월 15일 쿠바 망명자들이 쿠바 공군기지에 대해 제1차 폭격을 단행한다. ②4월 17일 쿠바 망명자들이 쿠바 공군기지에 대해 제2차 폭격을 단행한다. ③4월 17일 밤 쿠바 망명자들이 피그즈만에 상륙한다. ④위 ③과 동시에, 미국 뉴오올리언즈에 있는 쿠바혁명위원회에서는 망명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쿠바 국민들의 봉기를 선동한다. 작전계획을 들은 케네디 대통령은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도 한 가지 당부를 놓치지 않았다. 쿠바 망명자들만 동원하고, 어떤 경우에도 미군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미군 개입으로 인해 초래될 국제적 비난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CIA는 대통령의 지시를 무시하고 쿠바인들에게 미군 개입을 몰래 약속해주었다. 제1차 폭격 하루 전날인 4월 14일, 케네디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은 쿠바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소위 ‘연막작전’이었다. 다음 날 망명자들이 탄 R-26 비행편대가 니카라과에서 출격하여 쿠바 공군기지를 폭격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그 중 2대의 비행기가 니카라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 플로리다에 착륙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비행기 뒷날개에 쿠바 국기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미국 정부에서는 쿠바에서 탈출한 비행기들이 플로리다에 착륙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미국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쿠바 대사가 UN에 제출한 증거물 때문에 미국의 개입은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폭격을 당한 쿠바 공군기지에서 ‘USA' 마크가 찍힌 로케트탄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케네디 대통령은 제2차 폭격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피그즈만 상륙작전에 대해서는 중지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예정된 17일 밤, 쿠바 망명자들은 미군의 지원을 신뢰하고 원래의 계획대로 피그즈만 상륙을 시도했다. 하지만, 약속한 미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케네디 대통령이 CIA의 출병 건의를 묵살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결국,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100여 명 사망과 1200여 명 생포로 종결되고 말았다. 이 같은 처참한 패배는 당초 CIA가 약속한 미군 지원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1970년대 미 하원 청문회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피그즈만 사건에는 CIA 뿐만 아니라 마피아도 개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쿠바 전복 후에 쿠바에서 마약을 재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마피아가 쿠바 망명자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케네디 대통령이 CIA 및 군부를 불신하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CIA 및 군부 역시 대통령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쿠바 망명자들 역시 케네디 대통령을 못 믿을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피그즈만 상륙작전에 참여했던 쿠바판 ‘탈북자’들이 나중에는 미국 대통령(케네디) 암살사건에 관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이다. 쿠바 망명자들과 탈북자들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조국을 탈출했지만, 미국이 이들을 환대하고 활용하려는 이유는 동일하다. 바로 상대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이 쿠바 망명자들의 인권을 진정으로 염려했다면, 이들을 결코 험한 ‘사지’(死地)로 몰아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이들을 환대하고 활용하려는 것은, 인권문제가 아니라 바로 정치문제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획탈북에 관여하는 한국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들의 ‘순수’한 마음과는 달리, 이 일이 자칫하면 외세와 연합하여 동족을 죽이는 역사적 범죄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 국회의원들이 중국에 가서 ‘험한’ 대우를 받은 것은, 한국인으로서 마땅히 분개하고 책임을 추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이번 사건과 관련된 기획탈북 - 그 뒤에 숨어 있는 미국의 전략적 의도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북한인권법 배후에 숨어 있는 미국의 의도는 1961년 피그즈만 사건에서 이미 충분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1961년 쿠바 피그즈만 사건으로 본 미국의 북한 전복 음모
2005. 2. 23. 오전 10:3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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