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성서공부 모임을 준비하면서 묵상했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 김연희클라라 수녀님께서 보다 명확하게 해주셨네요...^^
마르타와 마리아 두모습의 조화
봉사와 성서공부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이는
한 자매님이 제게 자신의 심경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수도성소에 대한 원의를 지녔지만
결혼을 선택했던 그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기도할 때에 가끔씩 수도성소에 대한 미련이 솟구쳐서
주님께 “왜 제게 마리아의 성소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마르타의 성소를 주셨습니까?”하고
푸념 아닌 푸념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께서
결혼 성소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고,
지금은 주어진 모든 상황 안에서도
<생활 피정>1)을 하며 삶과 기도를 통합하는
영적 수련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수도회의 연수중 나눔 시간에 한 수녀님이
“하느님께서는 제게 마리아(관상)의 몫보다
마르타(활동)의 몫을 주셨습니다.
사도직 활동에서 힘을 얻고 보람을 찾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예화를 들으시면서
마르타는 결혼 성소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마리아는 수도 성소를 대표하는 인물로 여기시겠지요.
또한 수도생활에서도
관상 수도회를 상징할 때에 ‘마리아’라고 표현하고,
활동수도회를 말할 때에 ‘마르타’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더 나아가 신앙의 두 가지 유형을 제시할 때에
마르타가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동적인 신앙유형이라면,
마리아는 겸손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정적인 신앙 형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연스럽고 쉽게 마르타와 마리아를
활동과 기도를 상징하는 극단적으로 이분화 된
성서의 인물로 여깁니다.
이런 선입견을 갖는 이유는
전통적인 성서 해석만을(루가 10,38-42) 받아들이고,
다른 성서본문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루가복음에 나타나는 마르타는
여행 중이셨던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고,
시중드는 일로 분주해지자 동생 마리아에 대해 불평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루가 10,41)하고
단호하게 마르타를 타이르셨습니다.
정성스럽게 대접해 드리고 싶었던 마르타는
조급하고 지나친 일에 마음이 빼앗겨서
실제로 그분이 소중히 여기시는 일을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주도권을 드린 마리아는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집중함으로써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고,
단순히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모든 일을
예수님의 계획에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름이 언급되는 또 하나의 성서 본문은
‘라자로의 부활 사건’과 관련된 요한 11,1-12,8입니다.
65절에 해당하는 긴 내용을 읽으면,
두 자매는 각기 다른 면모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루가복음에 나오는 모습과는 달리
주님께 애정 어린 헌신의 행동을 합니다.
두 번이나 예수의 발을 씻고 향유를 발라드립니다
(요한 11,2; 12,3 참조).
한편 마르타는 예수님을 마중 나가 그분의 말씀에 경청하고
신뢰에 찬 대화를 나누면서 소박하고도 솔직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요한 11,21-22)
마르타는 주님과 마음이 통했고(요한 11,41-42 참조)
그래서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씀드릴 만큼
그분의 사랑에 모든 희망을 맡겨 드립니다.
나중에 마리아도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같은 말을 하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요한 11,32 참조).
두 자매는 야이로의 딸과(마르 5,35 이하 참조)
나인의 과부 아들이 살아난 이야기를(루가 7,11 참조)들었을 것이고,
예수께서 가나의 고관의 아들을 죽을 병에서 살리신 것과 같이
(요한 4,46이하 참조)
예수님의 현존이 오빠를 살릴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처럼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 마르타에게,
또한 무덤에 둘러선 군중에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라자로의 죽음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이러한 죽음 앞에서도
주님께로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11,27 참조)”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요한 복음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고,
이 앎은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요한 17,3 참조).
마르타는 믿음으로써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을 봅니다
(요한 11, 25-27; 11,40.44 참조).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두 모습에서,
파스카의 체험을 통하여 사랑과 봉사로 조화를 이루는
교회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 안에서 많은 이들이 봉사의 모든 상황을,
하느님의 현존을 관상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활동 중의 관상’을 실현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매일의 봉헌과 오롯한 사랑을 청하며 기도합니다.
“예수 성심이여,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
이 마음을 받으소서.
당신께서 저희 안에 사시어 영원히 다스리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