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득솔
나해 부활 제 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 20,19)
우리 마음속에는 크고 작은 갈등과 불안이 있습니다.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 상태를 아시고도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메마르고 갈라진 우리 마음에 불어넣어 주시는 평화는,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복음 (요한 20,19-31)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제1독서 (사도 4,32-35)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제2독서 (1요한 5,1-6)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길라잡이
부활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어떤 은총을 베푸셨는가? 오늘 독서 말씀은 이처럼 부활을 믿는 신자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그 물음에 분명한 답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먼저 제 1독서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가난의 어려움을 모르고 하나된 모습으로 살아간 초대 교회 모습은 그 당시에 기적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이상이 아닌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공동 소유, 공동 분배, 한 마음, 한 뜻, 이 모든 표현들을 그들의 삶이 이상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세상과 현실 안에서 설득력 있게, 아주 구체적으로 증거하며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출발했음을 1독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믿음은 아주 구체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부활의 삶을 제 2독서는 1독서와 달리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즉 부활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에 눈을 뜨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복음에서 토마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않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진정 신앙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거듭 성찰하게 해줍니다. 신앙은 객관화시키고 논증시킬 수 있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주님이 명하신 대로 사랑과 평화의 삶에 동참하고자 할 때 마음으로부터 느끼고 확산될 수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복음은 부활의 신비를 통해 우리가 믿는 신앙이 무엇이며, 어떤 모습으로 증거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인도해줍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
1) 요한 복음은 마지막에 성서를 쓴 목적이 사람들이 “예수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를 어떤 마음으로 지금껏 보아 왔는지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봅시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2) 토마의 불신앙은 우리의 인간적?신앙적 한계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봅니다.
☞ 우리 안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인간적인 한계, 더 나아가 내 안에 있는 불신앙적인 요소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거멀못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1요한 5,4)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세례를 받고 이십여 년 동안 성삼일 전례를 모두 참석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달걀을 받기 위해서, 나이가 좀 들어서는 달걀을 팔기 위해서 부활절 날에는 열심히 성당에 나갔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별로 마음에 와닿지도 기쁘지도 않았었습니다. 사실 성당에 다니면서 제일 기쁜 날은 성대한 트리 장식과 함께 선물을 주고받는 크리스마스였지요. 전 이번 사순절도 어김없이(?) 방탕하게 보냈기 때문에 부활이 가까워지면서 이번 부활절도 별 의미 없이 다가올 것 같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제 이런 걱정에 신부님께서 부활이 기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과 함께 수난과 죽음을 체험해야 진정으로 부활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성삼일 동안 전례에 참석하고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사흘을 보내고 부활절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릴 때 어렴풋하게나마 부활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 같았고, 부활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미약하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일치하려는 노력, 이것이 우리가 사는 험난한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아닐까요? †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1요한 5,4)
이번 부활절은 어둠 속에서 보냈습니다. 종합시험에 학회 논문준비에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보낸 한 달이었습니다. 물론 창피한 이야기지만 성당과도 담쌓고 지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거의 한 달 이상을 못 갔습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못간 게 아니라 안 갔겠지요. 왠지 모를 시큰둥함으로 때마침 바쁘겠다 핑계도 좋게 냉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처럼 어둠 속에서 `빛이 싫어 빛이 싫어‘ 하며 매일 매일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 ’아! 이래서는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는 열심히 성당에 나가야지‘라는 마음이 들려고 할 때 여러 가지 일들이 몰아닥쳐서 다시 바빠지더군요. 그런데 다른 점은 내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로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성당에 나가기 싫어 할 때가 바로 엊그제였는데 지금은 못나가게 되었다고 짜증을 부리고 있지요. 나의 어둠을 깨고 나니 다른 어둠이 엄습을 하는군요. 그래도 내 안의 어둠이 사라진 이상, 지금 나를 둘러싼 어둠은 이길 수 있는 자신이 생기더군요. 주위의 어둠을 이겨내기 위해 나의 어둠과 먼저 싸우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현재의 어둠을 이겨내면 그때 조금 늦은 감이 있겠지만 부활의 기쁨을 맞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요한 5,5)
내가 생각하는 대로의 세상이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습니다. 이제 20대 중반에 접어든 제 나이 정도만 되어도 그 논리가 그다지 정의롭지도, 그다지 인간답지도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지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길들여진 우리들이지만 때로는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이래야 하는지 혹은 결과가 어떨지 등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해 놀아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머리 속이 복잡해진 적은 없는지요. 주면 받아야 하고, 남보다 잘나고 싶은 저는 하느님이 논리보다는 세속의 논리와 훨씬 친하지요.
가끔은 ‘나도 신앙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 맞아?’, ‘나도 믿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라고 저 자신에 대해서 의심해보기도 하지만 전 솔직히 이런 회의조차 할 자격이 없는 자기편리식의 게으른 신앙인입니다. 이런 저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자니 때때로 힘에 겹고 피곤합니다만…. 하느님, 저의 이런 나약하고 못난 모습도 사랑하시지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