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3주일 말씀 - 옮김.

2005. 12. 11. 오후 6:10:28

글자

나해 대림 3주일 요한 1, 6-8.19-28- 누구요? 당신입니다.
예전에 모 청바지 회사에서 이런 내용의 광고를 방영했었습니다.
‘난 나야, 누가 뭐래도 난 나야!’
공동체나,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의의미를 알고,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광고이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대로 살고픈.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겠다는 내용의 광고가 아닐까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자신에 대해 좀더 알려하고, 자신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 돈을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신학교 때, 조그마한 것에도 마음을 쓰고, 소심하고 짜짤한 놈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과연 어떤 모습이 진정한 나인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나인가? 아니면, 어렸을 때, 자연스럽고 장난을 치며 개구쟁이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나인가?’ 라며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는 지금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주 답답한 모습과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게 되어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은 지나친 개인주의가 만연해 버려 자신밖에 모르는 시대, 풍조가 되어버렸습니다.
‘너’, ‘우리’ 라는 말, 의미보다, 자신을 더 찾으려 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려 하고,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풍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도 교묘하고, 은근하게 스며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올바로 알려 주기 위해 올해 초부터 교구 주보에 “신흥종교와 그 문제점”을 연재하며 혼란을 피하기 위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고요한 명상에 빠져 자신의 기의 흐름으로 마음과 몸을 다스리려는 것은 좋습니다.
기공체조나, 선 명상법으로 심신의 건강과 안,. 평화를 누리고 자신에 대해 알고 찾아가려는 모습은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마음 안에...그리고 자신 안에 머물러 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머물러 버려,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잔잔한 감동과 열망에 의해 하느님을 체험했다느니... 또는 자기 최면, 헛된 자기 암시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오히려, 귀중한 체험을 했다느니... 처음으로 참된 기쁨과 평화, 행복을 맛보았다느니 라는 주장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참된 자신을 찾고 보니, 내가 세상과 우주의 중심이요, 실제 소우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에 그쳐버리는 것이 문제요, 위험입니다.

물론, 이는 타 종교를 비판하거나, 그들의 주장이, 가르침이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주장과 가르침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오늘날이기에게... 우리에게 기공체조나, 선 수련 등의 이름으로 다가오기에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세례자 요한은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요,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라며 명확하게 알려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를 찾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찾고 또 찾아, 자신이 세상과 우주의 중심이요, 주인공인양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길을 곱게 내며,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바로 나요, 우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극적이요, 수동적인 자세로 살아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자신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고 또 찾으며, 찾은 것을 드러내고 나눠주며 하느님을 증거하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곧, ‘나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을 증언하는 존재가 나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드러난다.’ 고 말하며 이를 이루기 위해, 이것만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참된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나는 절대 내가 될 수 없고, 또한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찾고, 하느님과 함께 할 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는 것이 교리요, 가르침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불교나 천도교, 등 다른 종교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대화에 뚜렷한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나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나다.’ 라는 가르침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대림 3주일을 맞이하여,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가 사랑하며 따르는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오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어떠한 자세로 맞이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진 남자가 청혼하기 위해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세요?” 집안에서 여인이 묻자, 남자가 대답합니다. “나예요”
그러나, 여인은 ‘이 방은 좁아서 둘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할 뿐,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데 왜 그럴까?’ 남자는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며칠 후 해답을 찾은 후에, 남자는 다시 사랑하는 여인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세요?’ 라고 여인이 묻자, 남자가 대답합니다. ‘당신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여인이 밖으로 나와 문을 열어 주어 함께 방으로 들어갑니다.

이러한 남자의 마음과 행동처럼, “예수님, 내 마음 안에 오세요. 당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 여기 준비된 당신의 마음 안으로 오세요.”라고 기도드리며,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했으면 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세례자 요한처럼, ‘나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그런 아무 것도 아닌 자다.’고 말하며 살아가려는 모습이요, 진정, 아무 것도 아닌 나지만, 내 안에 모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기왕에 살거면 ‘나는 나야’며 살기 보다는, ‘나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야’ 라고 말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다음까페 - 가톨릭 교리반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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