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7월8일)

2014. 7. 7. 오후 8:15:49

글자

♡7월 8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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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그림발도(Grimbald)

축일 7월 8일 

성 그림발두스(Grimbaldus, 또는 그림발도)는
플랑드르(Flandre)의 생토메르(Saint-Omer) 태생으로
생베르탱(Saint-Bertin)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잉글랜드(England)의 국왕
앨프레드(Alfred)를 만났는데, 왕이 그의 높은
인격을 보고 잉글랜드로 초청하므로 885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국왕은 그를 캔터베리(Canterbury)의 주교로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끝끝내 사양하였다.
이리하여 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가 윈체스터에
뉴민스터(New Minster) 수도원을 짓고 그림발드를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매우 훌륭한 성악가였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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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라이문도(Raymund)

축일 7월 8일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난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또는 라이문도)는 그곳의
성 세르닌 성당에 봉사하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이 성당에서 합창대원으로 활약하다가
결혼하였으나, 곧 아내와 사별하였다.
그 후 그는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하고 가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참다운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실시하는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그는 이 자선행위를 유대인들에게도 베풀어 말썽을
빚기도 했으며, 가난한 성직자들을 돕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성 세르닌 성당의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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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순니바(Sunniva)

축일 7월 8일 

아일랜드 왕의 딸인 성녀 순니바는 결혼 강요를
피하기 위하여 일단의 수행원들과 함께 배를 탔으나
배의 키나 선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노르웨이 연안의 셀지 섬에 상륙한 뒤
동굴 속에서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그 일행들은 기도와 고행으로 일생을
살다가 모두 운명하였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올라프 트리그야손 왕은
수색대와 더불어 주교를 파견하여 동굴을 파헤치니,
이때까지 성녀 순니바의 시체는 썩지 않고
생전의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고 한다.
왕은 이들을 위하여 성당을 세워주고, 유해들은
베르겐(Bergen) 대성당으로 운구하여 안장하였다.
또 셀지 섬 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순니바를
공경하고 있다. 순니파(Sunnifa)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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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드리아노 3세(또는 하드리아노 adrian lll)

축일 : 7월 8일

아드리아노 3세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그가 성인으로 공경받는것 보다,
로마의 심각한 기근을 해결한 역사적인 인물로
더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884년 5월 17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포르모수스가 주도하는
로마의 귀족당에 대항하였다.
그는 챨스 황제의 승계 문제 때문에
황제의 초청으로 독일 보름스로 가던 중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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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스피치오(Auspicius)

축일 7월 8일 

성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
(Sidonius Apollinaris, 8월 21일)는
성 아우스피키우스(또는 아우스피치오)가 프랑스
툴의 주교였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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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스피치오(Auspicius)

축일 7월 8일 

성 아우스피키우스(또는 아우스피치오)는
마테르누스(Maternus) 계승하여 독일 트리어 교구의
제4대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같은 날 기념하는
프랑스 툴(Toul)의 주교 성 아우스피키우스와
동일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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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퀼라(Aquila)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

축일 7월 8일 

유대인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했던 성 아퀼라(Aquila)와
그의 아내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 거주 금지령을 내리게
됨에 따라 로마(Rome)를 떠나야 했다(사도 18,2).
그들은 코린토스(Corinthos)로 가서 그곳에는 복음을
선포하던 사도 바오로(Paulus)와 친분을 갖게 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들은 바오로를 따라 에페수스(Ephesus)까지 갔다가
그곳에 머물렀다.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자신의
제 3차 전교 여행을 하였으며, 그들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들의 집을 교회로 사용케 하고
에페수스로 갔다. 그들은 로마 순교록을 보면
소아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전설에 의하면 로마에서 장렬하게 순교하였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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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우제니오 3세(Eugene III)

축일 7월 8일 

이탈리아 피사(Pisa) 근교인 몬테마뇨(Montemagno)에서
태어난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또는 에우제니오)의
본명은 피에트로 파가넬리(Pietro Paganelli)인데,
그가 피사 대성당의 성직자가 된 후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를 만남으로써 1135년에
클레르보(Clairvaux)에서 시토회원이 되었다.
그 후 로마(Rome)의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전혀 예상하지 않던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름을 에우게니우스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출을 반대하던 브레시아(Brescia)의
아놀드(Arnold)의 농간과 로마 원로원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는 로마(Rome)를
탈출해야만 하였다.

그는 1145년 2월 18일 파르마(Parma)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축성식을 가졌다.
그 후 몇 가지 조약을 체결한 뒤에 로마로 돌아가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초청으로 그는 1147년에
그곳을 방문하였고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선포하였다.
비록 이 십자군은 성 베르나르두스의 노력이
지대하였지만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두스 2세군의
패퇴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났다.
에우게니우스는 1147년에 파리(Paris)와
트리어(Trier)에서 시노드(Synod)를 개최하고,
다음 해에는 랭스(Reims)에서 시노드를 열어
아놀드를 단죄하였다.

세상이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을 때 그는 로마로
귀향하였으나, 1150년에 재차 강제로 로마를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티볼리(Tivoli)에 거주하였고,
1153년 프레데릭 황제와 콘스탄츠(Konstanz)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교회의 권리를 보증하는데
유익한 협약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8일에 그곳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소란스런 재임 기간을 통하여 몇 가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동방 교회와 로마와의 일치를
시도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재정비하였으며,
명예스럽지 못한 성직자들을 제거하였고, 마니교의
재건을 봉쇄하였다. 그는 실로 용기가 많았고
단순하였으며 항상 성 베르나르두스의 영적 권고를
따라 생활하여 덕이 출중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72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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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1271-1336)

축일;7월 8일

축일이 원래 7월 4일이었으나,
1965년 인노첸스 12세 교황에 의하여 7월 8일로
옮겨져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엘리사벳은 흔히 한 마리 비둘기,또는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1271년 그녀가 태어났을 때,
뒷날 아라곤의 왕이 될 아버지 페드로 2세는
그 당시 군주인 자기 아버지 야고보 1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이것은 장차 일어날 일의
징조였다. 그녀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빠른 속도로 영적 감식력을 습득해 나갔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엘리사벳은 12세 때 포르투칼의 드니스 왕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매일 미사를 포함한
신앙생활뿐 아니라 자기의 도움을 받으러 찾아온,
모든 사람들, 즉 순례자, 외국인, 병자,
가난한 이들을 돕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자선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향한 사랑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생활 형태를
스스로 영위할 수 있었다.

남편에게도 변함없이 헌신적이었던
그녀에 대한 남편의 배신 행위는 왕국의 수치였다.
왕은 그녀의 평화적 노력을 몹시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위해 하느님께 용서를
간구했고, 마침내 남편은 죄많은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사생아를 더 총애한다고
생각하는 반항적인 아들 알퐁소와 남편을
화해시켰다. 그녀는 아라곤 왕인 페르디난도와
왕위를 주장하는 그이 사촌 야고보와의
싸움에서도 평화 중재인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코임브라를 떠나
가난한 클라라 수도원에서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이 되었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당시
포르투갈의 왕이 자기 아들 알퐁소와 알퐁소의 양자
캐스틸의 왕사이의 영구적 평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마침내 그 일을 성취하게
되었다.

설명 ; 평화를 도모하는 일이 결코 조용하고
침착한 노력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극이
너무 지나쳐 서로를 파괴하려는 감정을 가진
사람들 사이를 조정하는 것으로 결백한 마음,
끈기 있는 정신, 그리고 용기 있는 영혼,
즉 결백하고, 끈기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것은 일찍이 14세기 초반에 있었던 한 여인의
진실된 것 모두이다. 엘리사벳은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직 하느님과 인류에 대한
성실한 사랑과 동정심을 지녔던 것이다.

이야기 ; 엘리사벳의 건강은, 화해를 위해서
여행에 나설 만큼 좋은 상태에 있지 않았다.
숨막힐 듯한 더위는 상황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여행을
단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전쟁의 비참함과
파괴를 막기 위해 바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은
없다고 말했다. 그녀가 성공적으로 평화를
지켜 나가는 동안 그녀의 건강은 죽음이
임박할 정도로 중태에 빠졌다.
1336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유해는
코임브라 수녀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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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킬리아누스(또는 칠리아노 Chilianus)

성 콜로만누스(Colomannus)

성 토트나누스(Totnanus)

축일 7월 8일 

아일랜드 수도자이던 성 킬리아누스
(또는 또는 칠리아노)는 주교로 축성된 후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로마(Rome)로 가서 교황 코논(Conon)
으로부터 독일의 프랑코니아(Franconia,
바덴과 바이에른) 지방의 복음 선포에 관한 책임을
맡았다. 그는 능력 있고 열성적인 협조자
성 콜로만누스(Colomannus) 신부와
성 토트나누스(Totnanus) 부제와 함께 선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성 킬리아누스와 동료들은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그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
그는 킬리안(Kilian)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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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로코피오(Procopius)

축일 7월 8일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성 프로코피우스(또는 프로코피오)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스키토폴리스(Scytopolis)에서
살았으며, 교회의 지도자이자 구마자였으며 시리아어
통역사였다고 한다.
그는 매우 덕스럽고 겸손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카이사레아(Caesarea)로
이송되어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라는 요구에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 주인을 모시는 것은
옳지 못하고, 오직 한 분의 왕이신 주님만 섬겨야
합니다.” 이 말이 황제를 격노케 하여 그는
그 자리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팔레스티나(Palestina) 지방의 첫 순교자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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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하드리아노 포테스큐(Hadrian Fortescue)

축일 7월 8일 

영국 잉글랜드(England)의 펀스본(Punsborne)에서
태어난 하드리아누스 포테스큐(Hadrianus Fortescue,
또는 하드리아노)는 잉글랜드 데번셔(Devonshire)
가문 출신으로 앤불린(Anne Boleyn)과는 사촌간이다.
그는 두 번이나 결혼하였는데, 첫 번째는
앤 스토놀과 결혼하였으나 12년 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앤 레드와 재혼하였다. 그는 전처에게서
두 딸을, 후처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도미니코회 3회원이 되었고,
궁중 집회에 참석할 수 있는 바스(Bath)의 기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두 차례나 프랑스와의
전투에 참가했고, 캐서린 왕비가 칼레스로
여행할 때에는 수행원으로 그리고 앤불린의
대관식에는 귀빈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신심이 굳었던 그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을 반박하다가 다음 해 봄에 체포되어 1539년 2월
런던탑에 갇혔다. 그는 끝까지 국왕의 수장령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는 런던의 타워 힐에서
토마스 딘글리(Thomas Dinglay)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1895년 5월 13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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