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7월4일)

2014. 7. 2. 오후 6:17:36

글자

♡7월 4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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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남파니온(Namphanion)

축일 7월 4일 

성 남파니온은 카르타고(Carthago) 혈통으로
아프리카 북부 누미디아(Numidia)의
마다우라(Madaura)에서 그의 동포 몇 명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보통 아프리카의 저술가들에
의해 ‘대순교자’로서 불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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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라우리아노(Laurian)

축일 7월 4일 

성 라우리아누스(Laurianus, 또는 라우리아노)는
다소 의심스러운 그의 행전에 따르면 세계 여행가였다.
그는 헝가리에서 태어나서 이탈리아의 밀라노
(Milano)에서 부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에스파냐 세비야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부르주(Bourges)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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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Peter)

축일 7월 4일 

베드로(Petrus)는 리니의 백작 아들이나 4살 때에
양친을 잃었다. 매우 총명했던 그는 불과 10세의
나이로 파리(Paris)에서 공부했으며, 그 후
노트르담(Notre-Dame)의 성직자가 되었다.
1380년부터 1381년까지는 그의 큰 형에 대한
몸값으로 칼네스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다.
이를 통하여 베드로는 겸손과 덕행에 현저한
진보를 보였고 또 인생의 대전환기가 되었다.
그는 1384년에 메스(Metz)의 주교가 되고
또 2개월 뒤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그의 높은 성덕을 대변하는 것은 다음의 말
한마디이다. “세상을 경시하고 너 자신을 경시하라.
그때 자신의 경멸에서 기쁨을 찾아라.
그러나 다른 사람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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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베르타(Bertha)

축일 7월 4일 

성녀 베르타는 20세 때에 어느 귀족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으나, 남편과 사별한 뒤에는
자신이 블란지에 세운 수도원에서 두 딸인
제르트루다(Gertrudis)와 데오틸라(Deotila)와
함께 수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공동체의 규율이 확립되자 그녀는 데오틸라에게
원장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오로지 기도생활에만
정신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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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빌리암(William)또는 윌리엄

축일 7월 4일 

1065년에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수도자
성 프레데리쿠스(Fredericus)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독일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히르쇼
대수도원을 재건할 사명을 띠고 파견되었다.
그 후 프레데리쿠스가 물러나자 교황 레오 9세
(Leo IX)는 빌리암을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그는 원래 라티스본(Ratisbon, 오늘날의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성 엠메람(Emmeram)
수도원에서 살았던 뛰어난 수도자였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수도자들의 개혁을 위하여
헌신했으며 공동체의 규칙을 정상화시켰다.
그는 흔히 ‘히르쇼의 헌법’이라고도 불렸다.
윌리엄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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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성녀 세바스티아(Sebastia)

축일 7월 4일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와
성녀 세바스티아를 포함해서 모두 32명의 순교자들이
시르미움(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미트로비카,
Mitrovica)에서 희생되었다. 그들의 순교 연대나
이름 그리고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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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Andrew)

축일 7월 4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us) 태생인
성 안드레아(Andreas)는 불과 15세 때 예루살렘의
성 사바(Sabas)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테오도루스(Theodorus)의
명에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685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의
칙서를 받아 왔다.
그는 후일 그곳에서 고아원과 양로원의 원장으로
봉사하다가, 692년 크레타의 고르티나(Gortyna)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712년에는 그리스도 단성론자이며 황제 왕위를
찬탈하고 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을
공공연히 비난해 오던 필립피쿠스 바르다네스가
소집한 시노드(Synod)에 참석하였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Anastasius II)가 바르다네스를
공격하고 나섰고, 교황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I)가 안드레아의 해명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는 강압에 의하여 참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의 크레타’라는 별명은 안드레아가
강력한 설교자로 이름을 얻었으며, 또 많은 찬가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비잔틴 전례 속의 카논으로
알려진 창의 형식을 처음으로 시도한 분으로
믿어진다. 이분 외에도 크레타의 성 안드레아로
알려진 사람은 776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상
파괴주의자들로부터 살해되신 성인이다
(축일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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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윌리엄 앤들비(William Andleby),

성 헨리쿠스(Henricus),

성 토마스 와콥(Thomas Warcop)

성 에드워드 풀트롭(Edward Fulthrop)

축일 7월 4일 

1597년 7월 4일 영국 잉글랜드(England)의
요크(York)에서는 교구 사제인 윌리엄 앤들비
(William Andleby), 수도원장 헨리쿠스(Henricus),
토마스 와콥(Thomas Warcop)과 에드워드 풀트롭이
순교하였다.

베벌리(Beverley) 근교 이튼(Eton) 태생인
윌리엄은 프로테스탄트로 성장했고, 케임브리지의
성 요한 대학(Saint Johns College)에서 교육을
받았다. 25세 때에 그는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가서 24시간 동안 그곳의 신학교에서 기도하고
또 학장인 알렌 신부와 담화한 뒤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그곳에 계속 머물면서 사제 수업을
받고 1577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요크셔(Yorkshire)와 링컨셔(Lincolnshire)
지방에서 2년간 선교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크셔의 신사인 에드워드와 토마스 그리고
헨리 또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윌리엄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들은 1929년 교황 비오 11세
(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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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엘리사벳(Elizabeth)

축일 7월 4일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왕 페드로 3세(Pedro III)와
시칠리아(Sicilia)의 왕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Elisabeth)을 따라 같은 이름을 지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디니스 1세
(Dinis I)와 결혼하여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결혼 7년째 되던 해에 자녀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디니스 1세는 능력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칭찬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엘리사벳은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의 교육까지 담당하였으며,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병원,
고아원,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양로원 등을
설립하였다. 엘리사벳은 남편의 냉대와 불신앙을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그리고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하던 아들 아폰소 4세(Afonso IV)와
남편 디니스 1세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아 한때
알랑케(Alenquer)로 추방되기도 했던 그녀는
1324년 남편 디니스 1세가 병을 얻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다. 극진한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회심하였지만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엘리사벳은 쿠임브라(Coimbra)의
집으로 은거하였는데, 그곳에는 자신이 세운
성녀 클라라(Clara)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가 있어서
인근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펴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녀는 수녀가 되겠다는 이상을
포기하고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어 엄격한
보속생활과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1336년 7월 4일 에스트레모스(Estremoz)에서
사망하여 쿠임브라의 수도회 성당에 묻혔다.
엘리사벳은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복녀로 선언되었으며, 1626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
(Urban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1630년 로마 순교록에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
(Innocentius XII)가 7월 8일로 바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두 날을 모두 축일로 인정하면서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기념하도록 하고 있다.
그녀는 흔히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로 알려져 있다.
 
엘리사벳은 흔히 한 마리 비둘기,또는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1626년에 시성되어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포르투갈의 황후 엘리사벳은
한마디로 말하면 ’화해의 성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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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오도(Odo)

축일 7월 4일 

이스트 앵글리아의 덴마크 부모 밑에서 태어난
성 오도는 플뢰리-수르-루아르(Fleury sur Loire)에서
수도자가 되었고, 후일 램스버리(Ramsbury)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국왕이 덴마크와 스코틀랜드인
그리고 노섬브리아(Northumbria)인들을 무찌를 때
왕과 함께 있었고, 942년에는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교회 일과 똑같이 세속적인 일에도
적극성을 띄었던 까닭에 이스트 앵글리아를
독립 교구로 설정할 수 있었고,
성 둔스타누스(Dunstanus)의 수도원 개혁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그는 흔히 ‘오도 착한 사람’
(Odo the Good)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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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고르넬리오(John Cornelius)

축일 7월 4일 

요한 코르넬리우스(Joannes Cornelius, 또는
요한 고르넬리오)는 보드민(Bodmin)에서
아일랜드계의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프랑스 랭스(Reims)의 영국 대학과 로마(Rome)에서
공부한 뒤에 158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영국 선교에 임하여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나, 어느 배교자로 인하여 사제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그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도체스터(Dorchester)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다른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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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울다리코(Uldaricus)또는 울릭(Ulric)

축일 7월 4일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인 성 울다리쿠스
(또는 울다리코)는 스위스의 성 갈루스(Gallus)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삼촌인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 성 아달베오(Adalbeo)의
지도를 받았다. 울다리쿠스는 923년에 삼촌을
계승하여 고향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가 마자르인(Magyars)들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었을 때 온 주민들과 더불어
도시의 재건을 지휘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나이가 많아지자 그는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의 시성은 993년에 교황 요한 15세(Joannes XV)가
거행했는데, 이것은 교황이 시성식을 거행한
첫 번째 기록이다. 울릭(Ulric)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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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유쿤디아노(Jucundian)

축일 7월 4일 

아프리카의 성 유쿤디아누스
(Jucundianus, 또는 유쿤디아노)는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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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오도로(Theodore)

축일 7월 4일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키레네 교구의 주교였던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또는 테오도로)는 책을
필사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성서 필사본을 넘기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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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하깨(Haggai)

축일 7월 4일 

기원전 538년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첫 번째 귀향한
유태인들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다시금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우선 ‘번제의 제단’을 세웠다(에즈 3,1-6).
그리고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던
‘지방민’(사마리아인과 아시리아의 식민지 주민)의
방해로 이 첫 번째 재건축의 시도는 좌절되었으니,
이 지방민들은 옛날 아시리아 왕들이 이스라엘에
포로로 끌어온 이교도들의 후손으로, 야훼께 대한
순수한 신앙을 우상숭배로 오염시킨 자들이다
(에즈 3,7-13; 4,1-5 참조).
그래서 그 후 18년 동안 성전을 다시 짓는 공사는
중단된 채였다.

그러던 중 522년 페르시아제국의 캄비세 왕이 죽고
다리우스 1세가 등극하게 되었는데, 귀향한
예루살렘의 유태인 공동체는 이 사건을 하느님의
간섭을 예고하는 징표로 보았다(하깨 2,21-22).
이러한 징표를 느끼던 유태인들 앞에 하깨와
즈가리야는 예언자로 등장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왕국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성전을
다시 지어야 한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성 하깨는 6월의 신월제(新月祭)를 지내던 날,
정확히 말하면 기원전 520년 8월 27일에 설교를
시작하여 그 해 12월말까지, 그러니까 약 넉 달
동안 활약을 하였는데, 그의 설교는 하깨 1장 14절이
증언하듯 성공적이었고, 성전 재건축을 위한
예언활동은 즈가리야에 의해 계속되었다(에즈 5,1-2).
히브리어 ‘하깨’(Haggai)라는 말은
‘나의 축일’이란 뜻인데 이 이름은 우리가 잘
모르는 이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하나의 열쇠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예언자가 예배와 성전에 큰 관심을
쏟고 성전 주변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깨는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예언자의
후계자로 보인다
(1사무 10,9-10; 2열왕 4,38; 예레 35,4).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태인들은 매우 가난하였다.
게다가 팔레스티나에 남아있던 지방민들의 방해로
시달림을 받아 실의에 빠져 있었다.
하깨는 그들에게 시대의 징표를 해설하며 귀향한
공동체가 겪는 가난의 원인은 바로 종교적 열성이
저하되고 성전을 짓지 않는 데 있다고 지적하며
이방민족들의 왕국이 뒤흔들리는 것은(2,7-22 참조)
하느님께서 또다시 당신 백성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증거라고 하였다.
예언자들의 전통적인 설교도식에 따라 하깨는
귀향한 유대 공동체가 평화를 선물로 받고(2,9)
이방민족들의 보화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며
(2,7-9를 이사 60,5-13과 비교) 또한
즈루빠벨(2,20-23)이 다윗의 후예 메시아를 대변하고
있다고 예언하였다.

하깨의 활동기간은 아주 짧았지만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고 예배를 정화시키고 희망을 진작시켰다.
그리고 솔로몬이 지은 첫 성전보다 더 영화로운
제2 성전과 하느님의 통치를 이룩할 왕적인 메시아에
대한 그의 예언은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를 마지막
성전이자 종말의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인도한다. 비록 하깨와 즈가리야의 설교로
기원전 515년에 완공된 제2 성전은 사라졌지만
하깨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성전인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신앙의 요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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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호세아(Hosea)

축일 7월 4일 

구약성서 예언서의 하나인 호세아서는 예언자
성 호세아가 쓴 것이다.
히브리어인 호세아(hoshea)는 ‘야훼가 구하셨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호세아는 구약 소예언자 중의 첫 번째 사람으로
베리(Beeri)의 아들이다.
그는 오지아스(기원전 789-740),
요아탐(기원전 740-736), 아카즈(기원전 736-728),
에제키아스의 유다의 여러 왕 및
예로보암 2세(기원전 783-743)의 이스라엘 왕이
통치했던 시대에 예언하였다. 그의 출생지, 생애 등에
대해서는 호세아서를 통한 것 이외는 알 길이 없다.
그는 디블라임의 딸인 고멜과 결혼하여 3명의 자식을
낳았다(호세아서 1,2-9).
그렇지만 이 결혼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상징적인 것인지는 현재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어 있다.

호세아서의 주제는 사랑과 망은(忘恩)을 대조시키고
있다. 야훼는 그 백성들이 잘못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한다. 야훼의 노여움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분노이며, 전의 잘못을 뉘우친 자식들이 자기의 팔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호세아서는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에 영향을 주었으며
신약성서에서 곧잘 인용되고 있다
(마태 2,15; 9,13; 12,7 및 루가 23,30; 9,25 · 26;
1고린 15,55; 1베드 2,10; 묵시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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