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6월26일)

2014. 6. 18. 오후 4:49:12

글자

♡6월 26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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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다윗(David)

축일 6월 26일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난 성 다윗은
작은 은둔처에서 은수자로서 또 영적 지도자로서
70년간을 살며 많은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유해는 1054년에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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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센시오(Maxentius)

축일 6월 26일 

프랑스 리옹만(Gulf of Lion) 아지드 태생인
성 막센티우스(또는 막센시오)는 아주토르(Adjutor)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 세베루스(Severus)의
보호 아래서 그리스도교 덕행의 모델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동료 수도자들의 질투와 찬미 때문에
마음이 더욱 혼란해진 그는 2년여 동안 잠적해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그 자신이 일약 명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구세주 또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것을 참지 못한 그는 볼크레르 계곡의 어느 공동체로
숨어 들어갔다. 여기서는 그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마음 놓고 수도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는 다른 음식물은 거의 먹지 않고 빵과 물
소량으로만 만족했으며, 허리가 굽을 정도로 엎드려
기도하였다. 특히 여기서도 그에게는 기적의 은혜가
빛나기 시작하였다. 한번은 무장한 강도들이 수도원을
급습하여 수도자들을 잡아간 일이 있는데,
그는 자기 수하 사람들을 구하려고 용감하게 달려가니,
강도 하나가 그를 죽이려고 칼을 치켜들자마자
팔이 마비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기름을 발라 그의 팔을 낫게 하고 동료들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7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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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Joannes)

성 바오로(Paul)

축일 6월 26일 

성 요한(Joannes)과 바오로(Paulus)의 이름은
로마 미사경본의 성찬기도 부분에 나올 뿐이다.
이들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때에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순교한 듯 보인다.
역사적인 기록은 모두 분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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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질리오(Vigilius)

축일 6월 26일 

이탈리아 트렌토의 주요 수호성인이
성 비길리우스(또는 비질리오)이다.
로마족인 그는 트렌토에서 태어났고, 아테네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385년에 트렌토의 주교가
되었는데, 밀라노(Milano) 대주교이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에게 보낸 그의 편지가
남아 있다. 이 편지에는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적었고,
또 순례에 관한 의견도 나온다.
또 성 시시니우스(Sisinius)와
성 마르티리우스(Martyrius) 그리고
성 알렉산데르(Alexander)의 순교록을 적었다.
그는 렌데나 계곡으로 선교하던 중 사투른 신상을
파괴하여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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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살비오(Salvius)

성 수페리오(Superius)

축일 6월 26일 

768년경 소브(Sauve)로도 불리는
성 살비우스(또는 살비오) 주교가 제자 한 명을
대동하고 발랑시엔 지방에 도착하였다.
자세한 활동은 알 수 없으나 그는 뛰어난 선교사였으며,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성당에서 행한 설교로
말미암아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와 그의 제자는 그곳 행정관의
아들 손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제자의 이름은
수페리오(Superius) 혹은 수페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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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텔모(Anthelm)

축일 6월 26일 

사부아(Savoie) 샹베리 근교 시냉 성에서 출생한
성 안텔무스(또는 안텔모)는 교구사제가 된 후
1137년에 카르투지오회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그랑드 샤르트뢰즈(Grande Chartreuse)로
파견되었다가 1139년에 제7대 원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그곳을 카르투지오회의 모원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카르투지오회의 제1차 총회를 소집하였으며,
복자 요한 스파니아드로 하여금 수도회의 회칙에
따라 살려는 여성들을 위하여 회헌을 마련토록
하였다. 1152년까지 총장직에 봉직하다가 은수자로
살았으나, 1154년부터 다시 2년 동안 포르트의
원장을 맡아야만 하였다.

그랑드 샤르트뢰즈로 돌아온 안텔무스는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후원을 받는 대립교황
빅토르 4세(Victor IV)에 대항하여 싸우던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을 위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안텔무스는 1163년에 벨리의 주교로 임명되자
교구 개혁을 광범위하게 착수하였으며, 성직자의
독신제를 강화하고 잘못한 이들을 징계하였다.
훔베르투스에 의해 투옥된 어느 사제가 살해되자
그는 훔베르투스 3세를 파문하였다.
그는 또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켓(Thomas Becket)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도록 교황청의 영국사절로
임명되었으나 불행하게도 가지 못하였다.
그는 만년에 나환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다가 1178년 6월 26일에 운명하였다.
그의 임종 때 훔베르투스가 찾아와 서로
화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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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John)

축일 6월 26일 

고트족(Goths) 사람인 성 요한(Joannes)은
동방교회 안에서 성상 파괴주의자의 강력한 반대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그는 흑해 지역 출신으로 그 당시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코프니무스가 성상 파괴를
명하는 칙서를 내리자, 그는 성상을 공경하는 이유를
들어가며 공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의 논리는 구약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지극히 타당성이 있었고 또 호응도가 높았다.
그는 787년의 니케아(Nicaea) 제2차 회의에 참석하여
성상 공경에 대한 가톨릭 교리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는 카자르인의 습격을 받고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소아시아의
아마스트리스에서 숨어 지내다가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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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페르세베란다(Perseveranda)

축일 6월 26일 

페자인(Pezaine)으로도 불리는 성녀 페르세베란다는
에스파냐의 처녀로 그녀의 자매인
마크리나(Macrina)와 콜룸바(Columba)와 함께
프랑스의 푸아티에까지 여행하고는 그곳에 수녀원을
세웠다. 성녀 페르세베란다는 수녀원에 쳐들어온
해적들로부터 도망가던 중 오늘날 성녀를 기념하여
생트페자인(Sainte-Pezaine)이라 불리는 푸아티에의
한 마을에서 기진하여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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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펠라지오(Pelagius)

축일 6월 26일 

성 펠라기우스(또는 펠라지오)는 오마이야드의 대제인
아브드-아르-라만 3세가 코르도바(Curdoba)를
통치하던 시대에 무어인들의 손에 죽었다.
그는 이때 10살의 소년이었다.
관리들은 이 소년의 신앙을 포기시키기 위하여
좋은 옷과 돈을 주고 훌륭한 말을 타게 해주었으나,
펠라기우스는 “모든 것이 다 싫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것입니다” 하며 끝까지
버티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여섯 시간 동안의 모진
고문을 견디다가 숨졌다.
그의 유해는 967년 레온(Leon)으로 모셨다가 985년에
다시 오비에도로 옮겨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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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사제

축일 : 6월 26일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JOSEMARIA ESCRIVA)
몬시뇰은 1902년 1월 9일 스페인 바르바스트로에서
출생했다. 누님 까르멘 (1899-1957)과
동생 산띠아고(1919-1994) 외에 3 여동생들이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모두 사망하였다.
그의 아버지 호세와 어머니 도로래스는
자녀들에게 깊은 그리스도인 교육을 시켰다.

1915년 그의 부친의 방직사업이 실패하자
가족을 데리고 부친의 새 일자리인 로그로뇨
(스페인 북부)로 이사하였다.
바로 이 로그로뇨에서 호세마리아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는 어느 수도자가 지나간 뒤 남겨둔 눈위의
맨발자국을 보고나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무엇인가를 원하신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사제가 되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아 로그로뇨와
사라고사에서 사제가 될 준비를 하였다.

1924년 그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 그는 가장이 되었다.
1925년 사제가 된 후 그는 사라고사 교구의
벽촌에서 사목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라고사에서 사목했다.
1927년 사라고사 대주교의 허락을 받고 시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하려고 마드리드로 옮겼다.
거기서, 1928년 10월 2일 피정 도중에 하느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를 분명히 알았다.
그는 오푸스 데이를 창설했다.
그때부터 그는 특히 환자들과 빈민들 속에서
사목을 계속하며 오푸스 데이의 발전을 위해 일하였다.
그러면서도 마드리드 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학원에서 가르쳤다.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 종교박해가 심해져
그는 여러 장소로 피난을 다녀야했다.
스페인 수도권에서 탈출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은밀히 사제직을 수행했다.
험한 피리네오산맥을 넘어 탈출하여 북부 도시
부르고스에 머물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1939년에 마드리드로 돌아가
드디어 시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후 몇 년동안 수많은 평신도와 사제와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강론 신부로 활동하였다.
1946년부터 성 호세마리아는 로마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 라테란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황청 신학학술원 명예회원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비오 12세에 의해 교황의 명예 고위성직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오푸스 데이의 발전을위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1970년에는 멕시코)순방하였다.
1974년과 1975년에도 중미와 남미를 순방하여
수많은 사람과 모임을 가졌다.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75년 6월 26일 선종했다.
전세계 주교 3분의 1이 넘는 1300명 주교들을
포함하여 세계 각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교황에게
에스크리바 몬시뇰의 시복시성심사를 청원하였다.

교회법에 따라 1981년 시복시성조사성성에서
심사가 개시되었다.
1992년 5월 17일 오푸스 데이 창설자의
시복식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그 시복식에서 교황은 이렇게 강론 하였다
"복자 호세마리아는 초자연적 시각으로 만인이
성성의 추구와 사도직에로 부름심을 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지침없이 강론하였다."

2002년 10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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