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세상 밖에서

2007. 7. 3. 오후 2:05:17

글자

 창사 50주년을 맞은 기네스북이 가장 놀랄만한 10가지 기네스 기록을 뽑았다. 그중 5위가 35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의 벼락을 맞고도 살아난 버지니아 파크의 산림경비대원 설리번이라는 사람이다. 더욱 미묘한 것은 숱한 벼락을 맞고도 매번 기적처럼 살아난 그가 종당에 맞이한 죽음이 다름 아닌 자살이라는 것이다. 이어 4위를 차지한 유고슬라비아 여객기 승무원 베스나 불로빅은 테러리스트의 폭탄으로 비행기가 화염에 휩싸이자 낙하산도 착용하지 않은 채 3만 피트의 고공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렸다. 함께 뛰어내린 다른 승객들은 모두 현장에서 즉사 했는데 그녀는 양 다리에 골절상과 가벼운 허리 부상 정도만 입고 기적같이 생환했다.


 설리번처럼 몇 번씩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더 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죽어야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다반사다. 더욱이 그 죽음이 아직 죽어야 할 처지가 아닐 땐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과 깊은 슬픔으로 남는다.


 캐나다 주요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고 앞 다퉈 보도한 ‘백씨가족’이야기가 그러하다. 불과 4개월 전엔 ‘지하철아기’로 세간에 화재를 모았다. 병원으로 향하던 산모가 갑작스런 진통과 함께 지하철에서 아기를 출산해 위급상황에서 도움을 준 백인 간호사의 미담과 더불어 한동안 훈훈한 경사로 전해졌다. 그 기억이 어렴풋해 질 무렵 그 당시 당혹감에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지하철아기 아빠’가 얼마 전 두 차례에 걸친 폐수술에도 불구하고 ‘혈관암’으로 사망했다. 장녀가 12살인 4남매의 아버지인 그는 한 달 전에서야 통증과 함께 병명을 알았고 끝내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의식불명 상태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더구나 이제 남은 4남매를 홀로 돌보아할 아기엄마마저 임신 중 맹장암 진단을 받아 출산 후 2주 만에 수술을 하고 현재 꾸준한 항암치료가 필요한 형편이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가혹하다고 말한다. 해도 너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연중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살아생전 남에게 못할 짓 한 적도 없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는데 도대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그저 먹먹할 것이다.


 오랜 기억의 편린 하나가 날선 비늘이 되어 일어선다. 까까머리 시절이었다. 성당 주일학교 선생으로 교회 일에 발 벗고 나서 열심히 봉사하던 누이 또래의 착하고 어여쁜 자매가 있었다. 평소 홀로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녀가 있는 성당 안은 수밀도처럼 온통 달콤하고 살가웠다. 그 자매가 어느 날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었다. 그 고운 꽃망울을 채 피우기도 전에.


 그 충격으로 도통 해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토록 열심히 주님을 위해 봉사를 해 왔는데...... . 차오르는 답답함에 평소 잘 아는 나이 지긋한 신자 분께 똑같은 질문을 따지듯 해댔다. 기껏 돌아 온 대답이란 게 그토록 허망할 수가 없었다. 그 또한 주님께서 그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란다. 그 또한 주님의 사랑이라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쓰라린 가슴에 소금 한 줌을 뿌려주는 게 더 나을 뻔 했다.


 허나 분명한 것이 있다. 예고도 없이 찾아 온 불행을 처음엔 누구나 부정하려하고 분노와 원망으로 많은 날을 지새운다. 그러다가 결국 제풀에 지치고 만다. 오랜 절망감 속에 우울해 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살아야 할 목숨임을 깨닫게 되면 본능적으로 벗어나려는 의지가 꿈틀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찾아 온 불행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틈새에서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강한 삶의 의지가 마침내 거듭나기를 하며 또 다른 자기성장을 이루어내는 것이리라.


 그러다 보면 가시밭길인 줄로만 알았던 그 길이 지나놓고 보면 탄탄대로의 황금 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스포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인간승리의 인물로 꼽히는 사이클 선수인 ‘랜스 암스트롱’은 고환암 사형선고 후 투병을 하며 ‘투르 드 프랑스’ 국제 사이클 대회에서 7연승을 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어린 시절 양아버지 밑에서 숱한 구타를 당하며 자라 온 그가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희망이 바로 믿음의 씨앗이 아닐까. 고이 잠든 ‘지하철아기 아빠’의 곁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미망인은“애들 잘 키울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사랑해요 여보”라며 끝내 오열했다. 원망과 분노 속에서도 홀로 싹 틔우는 한 가닥 희망일 것이다. 그 희망이 굳은 땅을 뚫고나와 떡잎으로 나기 위해선 연약한 몸일망정 아낌없이 바쳐야한다. 그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엔 분명 그 어떤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을 향해 끊임없이 간구하는 것이다. 그만큼 고통이 크면 클수록 두 손 모아 바치는 기도 또한 더욱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고통의 끝에 다가가 있는 것이리라. 고통의 끝. 그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은 다시 살고자하는 희망일 것이다. 그 희망의 바탕에 믿음이 있다.


 믿음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 그토록 충만 된 삶을 현세에서 그 무엇으로 대신 채울 수 있을 것인가. 무릇 온전한 그 안에서 과연 무엇이 다시 고통이며 가혹이란 말인가. 이쯤에서 고통 속에서도 현존하시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되지 않을까.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나오는 말이다.

 내세에서 영원히 행복하길 원한다면 현세에서 고난을 당하라. 현세는 잠깐이고 내세는 영원하다.


                                                                                                               * 

댓글 2

  • 2007년 7월 3일 오후 10:49

    참 하느님은 어려움속에서도 "감사합니다"란 말을 만드어 내시네요

  • 2007년 7월 6일 오전 4:12

    기적이라는 말은 원망과 분노가 감사와 희망의 마음으로 바뀌는 순간이 아닐까요? 그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사랑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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