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4,12,01) - 대림 제1주간 수요일

2004. 12. 1. 오전 10:5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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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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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이사야 25,6-10ㄱ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을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 주시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이다.
그날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구원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주님이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주님께서 몸소 이 산을 지켜 주신다."


복음 마태오 15,29-37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절름발이와 소경과 곰배팔이와 벙어리와 그 밖의 많은 병자를 예수의 발 앞에 데려다 놓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벙어리가 말을 하고 곰배팔이가 성해지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걷고 소경이 눈을 뜬 것을 군중이 보고 크게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에 안되었구나.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이런 외딴 곳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하자 예수께서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뿐입니다." 하니까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땅에 앉게 하시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아파트 복도에 작은 자투리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 항아리나 쓰레기통을 놓고 쓰는 그런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맨 끝집에 사는 사람이 침대 매트리스를 옮기다가 그만 잘못하여 다른 두 집의 항아리를 건드려 깨고 말았습니다. 매트리스를 옮기는데 온 신경을 쓰다 보니 항아리 뚜껑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비록 이 항아리를 깼지만, 지금 우선은 매트리스를 빨리 옮겨야 할 것 같아서 항아리 주인에게 용서를 빌지 않고 집으로 매트리스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우리 항아리 뚜껑을 깨뜨렸는지 잡히기만 하면 요절을 내겠다면서 온갖 욕설을 퍼붓는 어떤 아주머니의 소리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기세에 정말로 항아리 뚜껑을 깬 사람은 차마 “내가 그랬다”고 나서기가 무서웠습니다.

다음 날, 어제 난리를 쳤던 아주머니의 앞집 항아리 주인도 자기 집의 깨진 뚜껑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아주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아이고, 항아리 뚜껑이 깨졌네. 복도에 내놓아서 사람들 다니는데 불편했겠구나. 사람은 혹시 안 다쳤는지 모르겠네. 얼른 안으로 들여놔야겠다.”

그 소리를 먼발치서 듣고 있었던 이 항아리 뚜껑을 깬 사람은 퇴근길에 꼭 예쁜 항아리 하나 사서 갖다 주며 사과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안 좋은 일에는 이런 식으로 두 가지의 길이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화가 가득한 미움으로써 풀어버리는 방법과 사랑으로써 풀어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미움이 가득차서 화를 내고 있을 때, 무서움에 그 누가 용서를 빌겠다고 찾아오겠습니까?

‘나중에 화가 가라앉을 때 찾아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든가, 아니면 ‘차라리 나를 안 드러내는 것이 더 낫겠다.’면서 조용히 침묵을 지킬 것입니다. 결국 재물의 손해와 함께 내 마음의 상처까지 더해져서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을 간직한다면 마음의 상처를 갖지 않게 됨으로써 그래도 손해를 들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저는 이야기를 보면서, 어쩌면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자꾸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미움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또 사랑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있나요? 바쁘다는 이유로, 일이 많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말로 사랑하는 일을 외면하고 있었던 나는 아니었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그 많은 군중들에게 좋은 말씀을 전해주신 것은 물론, 아픈 병자들의 병을 낫게 해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의 배고픔. 사실 예수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많았고, 그들은 이곳에 온 목적은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사랑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입장에 서십니다. 그리고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당신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입장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 서서 줄 수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끊임없이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해야 하는 이유도 끊임없이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화를 내기 전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봅시다.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

옛날 노나라에 한 아버지와 아들이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성장해 가는 아들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하나 가르치고 있었지요.

어느 날은 땔감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산으로 가기 전에 먼저 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백 리나 떨어진 먼 산에도 땔감이 있고, 백 보밖에 떨어지지 않은 앞동산에도 땔감이 있다. 그렇다면 너는 땔감을 구하러 먼 산으로 가겠느냐, 앞동산으로 가겠느냐?"

아들은 무슨 질문이 그렇게 간단한가 하는 표정으로 얼른 대답했지요.

"앞동산이 가까우니 그곳에서 땔감을 구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가까운 앞동산의 땔감이 다 없어지면 그 다음에는 어찌할 것이냐?"

아들은 무언가 대답할 말을 찾았지만 결국은 이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먼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야겠지요."

"거 봐라. 너는 결국엔 먼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야 한다. 그러니 거리가 가깝다고 해서 쉽게 구하지 말고, 또한 거리가 멀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 마라. 가까운 곳의 땔감은 언제나 우리 집의 땔감이고, 먼 곳의 땔감은 천하의 땔감이다. 우리 집의 땔감은 다른 사람이 감히 가져가지 못할 것이니 천하의 땔감이 다 없어져도 이 땔감은 남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도구를 챙겨 먼 산을 향해 가며 아들에게 "땔감은 곧 너의 미래와 같은 것이다. 지금은 힘들지라도 먼 데를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면 먼 데로 가야 한다. 알겠느냐?" 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곧 노나라 사람들이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어려운 일은 가르치지 않고 쉬운 길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 부모가 사는 방법이 쉽고 편하고 힘이 들지 않는 일만해서 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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