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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5일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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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룻기 2,1-3.8-11; 4,13-17
엘리멜렉의 아내 1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 가문으로 재산가였는데 이름은 보아즈였다.
2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들로 나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그래 가거라, 내 딸아.” 하고 말하였다. 3 그래서 룻은 들로 나가 수확꾼들 뒤를 따르며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 가문인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었다.
8 보아즈가 룻에게 말하였다. “내 딸아, 들어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갈 것 없다. 여기에서 멀리 가지 말고 내 여종들 곁에 있어라. 9 수확하는 밭에서 눈을 떼지 말고 있다가 여종들 뒤를 따라가거라. 내가 종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였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 있는 데로 가서 종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셔라.”
10 그러자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11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4,13 보아즈가 룻을 맞이하여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가 룻과 한자리에 드니, 주님께서 점지해 주시어 룻이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5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나오미가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된 것이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복음 마태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만약 제 나이를 ‘열여덟’이라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마 저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또한 제가 ‘신부(神父)’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성인이라면 ‘열여덟’이라는 나이를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여덟이라고 하기에는 제 얼굴이 너무나 삭은 것은 물론(20대 후반의 나이 때 이미 40대냐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거든요), 9년째 신부 생활을 하고 있는 제가 ‘열여덟’이라는 신부가 될 수 없는 나이를 가지고 있을 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어떤 꼬마 아이가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몇 살이에요?”
저는 굳이 제 나이를 솔직하게 이 꼬마 아이에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장난삼아 말했습니다. “열여덟.”
누구도 믿지 않는 숫자입니다. 하지만 이 꼬마 아이는 믿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요. “와~~ 우리 아빠, 엄마가 더 나이가 많다.”
그러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우리 신부님 나이는 열여덟이에요.”
사람들은 믿지 않으면서, “신부님이 무슨 열여덟이야?”라고 오히려 반문을 하지요. 그랬더니만 울상을 지으면서 말해요. “신부님이 직접 말했다니까요. 열여덟이라고…….”
저는 당연히 이 꼬마 아이가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장난삼아 말한 나이였는데,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장난삼아 말한 나이를 자기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틀리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실망의 표정이란…….
어떠한 순간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장난삼아 했던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상처와 아픔을 겪는 사람이 분명히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저 역시 가톨릭 신부로써, 어쩌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같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과거의 그들처럼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위선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특히 꼬마 아이에게 쉽게 말했던 장난삼아 했던 말이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볼 때, 지금 내 자리의 위치에서 더욱 더 조심하고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높은 사람이 아닌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늘 겸손한 마음을 갖고 생활할 때, 보다 더 올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혹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달리, 섬기는 자리가 아닌 높은 자리만을 탐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신을 낮추는 이가 됩시다.
둥근 원 밖의 지식을 구하라(‘행복한 동행’ 중에서)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아인슈타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제 늙었고, 물리학계에서 전후후무한 업적까지 이루어 놓았는데 아직까지 연구에 매달릴 필요가 있습니까? 이제는 편안하게 쉬어도 되잖아요?"
아인슈타인은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 위에 커다란 원과 작은 원을 그려 놓고 젊은이에게 말했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아마 내가 자네보다 좀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걸세. 자네가 알고 있는 것들이 이 작은 원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바로 커다란 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전체 물리학의 지식이란 끝없이 넓다네. 전체 물리학의 지식을 종이의 하얀 면에 비유해 보세나. 작은 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둘레가 작은 만큼 그 접촉면도 작기 때문에 자신이 모르고 있는 지식이 그다지 않지 않다고 느끼게 되네. 그러나 커다란 원은 외부와 접촉하는 둘레가 크기 때문에 자신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큼 더욱 노력하며 탐구하게 되는거지."
자아의식이 강하고 자만심에 들떠있는 사람은 실상 천박하고 무식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반면에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정한 현자로 느껴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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