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4,10,10) - 연중 제28주일 다해

2004. 10. 10. 오전 10: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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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10일 연중 제28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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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열왕기 하권 5,14-17
그 무렵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하느니의 사람 엘리사가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러자 새살이 돋아 [문둥병에 걸린]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 몸처럼 깨끗해졋다.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이스라엘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습니다. 소인이 감사하여 드리는 이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엘리사가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결코 이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했지만 나아만은 받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도 거절하자, 나아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진정 받지 못하시겠으면, 이 한가지 청만은 들어주십시오. 이제부터 저는 주님 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나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 흙을 주십시오."

제2독서 디모테오 2서 2,8-13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오. 그분은 다윗의 후손이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내가 전한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참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거이다.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니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믿을 만한 말씀입니다.


복음 루가 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어떤 마르에 들어가시다가 나병 호나자 열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올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라미아 사람이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며칠 전, ‘빠다킹 닷 컴(http://www.bbadaking.com)’의 회원 수가 드디어 4,000명을 넘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 수가 적은 수라고 말하겠지만, ‘빠다킹’이라는 별명을 가진 신부 한 명을 보고 이렇게 많은 분들이 가입을 해주셨다는 사실은 저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지요. 더군다나 ‘빠다킹 닷 컴’을 통해서 알려진 저의 이름 때문에 여러 성당에서 강의 부탁을 받게 되었고요, 라디오 방송(PBC, KBS)에도 출현하게 되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잘 나서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실 저는 글을 너무 못써서 신학생 때는 어떤 신부님께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너처럼 글 못 쓰는 학생은 처음 본다. 글 쓰는 연습 좀 해라.”

그렇다고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처음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강론하는 모습은 ‘강론 원고 보고’, ‘신자 얼굴 보고’를 반복했고요, 또한 늘 복음 해설 중심의 강론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강론 안에 일상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혀 없는 딱딱한 강론 일색이었던 것이지요.

이러했던 제가 완전히 스타일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이곳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도 말씀 드린, 바로 어떤 형제님의 술주정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저녁 미사 때였습니다. 저는 평상시와 같이 아주 조용히 톤의 변화 없이 강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각종 해설서를 보면서 정리한 내용들을 신자들에게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어떤 형제님 한 분께서 손을 번쩍 드십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하시면서 반주 한 잔을 하셨는지 약간 꼬인 말로 이렇게 말씀하세요.

“신부님, 신부님 강론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쉽게 좀 설명해주세요.”

얼마나 당황스럽던지요. 저 구석에서는 사람들이 이 형제님 말씀에 킥킥대며 웃어대는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얼굴이 붉어질 뿐이었습니다.

미사 후, 저는 사제관에 들어가서 제 강론 원고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그냥 복음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그 분 덕분에 제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는 무조건 쉽게 강론을 하는데 주력을 했지요. 쉽게 강론을 쓰고, 각종 책을 통해서 예화들을 모으고, 내 삶 안에서 느끼는 복음과 연관된 말씀들을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도 올리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된 것이지요.

아마 모든 사람에게는 그러한 삶의 전환점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자신을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충격적인 일들이 꼭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충격적인 일들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서 자신을 발전시키느냐 아니면 퇴보시키느냐가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불치의 병이라는 나병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병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 명 중에서 아홉은 다시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죄를 범하면서 살 뿐이었습니다. 단 한 사람의 이방인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깊은 감사의 인사를 함으로써, 주님과 함께하는 자신을 발전시키는 길을 선택합니다.

우리에게는 충격적인 일들이 많이 다가옵니다. 그 일들이 고통과 시련일수도 있고, 또 반대로 기쁨과 희망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서 내 삶은 크게 바뀝니다. 비록 고통과 시련이라는 아픔을 받아도 나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반면, 기쁨과 희망이라는 큰 선물을 받고도 나를 퇴보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이제는 예수님께 돌아와 깊은 감사의 인사를 통해서 자신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킨 한 명의 이방인의 모습을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요?


감사할 일 5가지만 생각해봅시다.



변명하는 사람의 5가지의 유형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고 나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변명을 합니다. 변명하는 사람의 유형을 구분하면,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어쩔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의기소침형.

둘째, 이렇게 안 했으면,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 라고 되묻는 위세당당형.

셋째, 저 사람이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책임회피형.

넷째,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라고 말하는 결과무관(結果無關)형.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는 데요, 뭘…, 이렇게 말하는 대중 추종(大衆追從)형입니다.

변명하지 않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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