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4,10,11) -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2004. 10. 11. 오전 10: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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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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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갈라디아 4,22-24.26-27.31-5,1
형제 여러분, 율법서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여종의 몸에서 났고 하나는 종이 아닌 본부인의 몸에서 났습니다.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인간적인 육정의 소생이었고 본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비유로 한 말인데 그 두 여자는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와서 노예가 될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하갈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인이며 우리 어머니입니다. 성서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아기 못 낳는 여인이여. 소리 높여 외쳐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인이여. 홀로 사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으리라."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몸에서 난 자녀가 아니라 자유인의 몸에서 난 자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복음 루가 11,29-32
그때에 군중이 계속 모여들자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하고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심판날이 오면 남쪽 나라의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그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고 땅 끝에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솔로몬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심판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어느 날 한 신부가 거리로 나가 보니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병약한 소녀들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었고, 갓난아기는 젖을 먹지 못해 울부짖을 힘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그는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향해서 원망을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주님, 어째서 이런 세상을 두고만 보십니까?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게 아닙니까?”

이 원망을 들은 하느님께서는 이 신부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셨어요.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라. 난 분명히 대책을 세웠으니까...”

“대책이라뇨...??”

신부가 영문을 몰라 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이으셨다고 합니다.

“이 답답한 녀석아, 내가 심심풀이로 널 만든 줄 아느냐?”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나 역시 이 신부처럼 하느님께 원망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원망하기 전에, 하느님을 탓하기 전에, 그 일을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은 왜 이제까지 하지 않았는지…….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제게 맡기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저를 창조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것도 모르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해 주시기를 바라는, 즉 깜짝 놀랄만한 기적만을 요구하는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모습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 그들 역시 깜짝 놀랄만한 기적만을 요구합니다. 그런 기적을 행해야지만 진정한 예언자이며,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더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님을 알면서, 또한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평화를 원합니다. 위로를 원합니다. 기쁨을 원합니다. 재물을 원합니다. 권력을 원합니다. 안락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졌다고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바로 가장 큰 기적은 아닐까요?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는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의 모습, 또 그런 것들을 주셔야 참된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의 희생은 거부하면서, 끊임없이 주님께 요구하는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도 함께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교묘하게 위장된 한 사람의 우상숭배자일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지 겸손된 마음을 가지고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희생이 먼저 선행된다는 것…….

우리가 오늘 하루 기억해야 할 주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싶네요.


바라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의 희생을 보이도록 합시다.



새로운 기회가 될 약점

악보없이 지휘하는 지휘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음악가 아투로 토스카니니, 1867년 이탈리아의 파르마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양복공 집안의 아들이었다. 사립학교에 다닐 돈이 없어 공교육에 의존했던 그는 음악원에서 첼로를 전공했던 첼리스트. 그러나 지휘에 대해 애정을 갖고 거의 독학으로 지휘를 익혔다.

평범한 오케스트라에 첼리스트로 입단한 그는 충실한 첼로 연주자였다. 그러나 그는 악보를 보고서는 도저히 연주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빴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의 파트를 미리 연습하면서 악보를 꼭 외워 두었다.

하지만 자기 파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 파트를 어느 때 연주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연히 다른 악의 음도 외워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문에 그는 악보를 암기하기 위해 남보다 몇십 배를 더 연습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속한 오페라단이 브라질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연주를 앞두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갑자기 일이 생겨 지휘자가 공석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급해진 오페라단에서는 부지휘자를 대신 세웠으나 청중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다. 이어 지휘봉을 잡은 합창 지휘자도 마찬가지. 이렇게 되자 평소 지휘에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난 토스카니니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토스카니니는 이때 지휘대에 올라가서 악보를 덮어 버리고는 리허설 한 번 없이 대곡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그 후로 그는 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첼리스트로서보다는 지휘자로 더 알려졌던 것이다.

사람에겐 누구나 약점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약점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오히려 그 약점 때문에 새롭게 도약하기도 한다.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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