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7일
연중 제 32주일(가해)
제 1 독서 : 지혜 6,12-16
제 2 독서 : 데살1 4,13-18
복 음 : 마태 25,1-13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제 32주일입니다. 이제 교회력으로 올 한 해도 2주일밖에 남겨놓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바로 전례적으로 올 한 해를 마감하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여러곳에서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늘 깨어 준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의 종말, 다시 오시는 주님, 이러한 주제는 언제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궁금해하고 미리 알고 싶어합니다.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 그 날과 그 시간은 미래의 시간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준비하는 삶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유대인들은 씨족 중심의 마을을 구성하고 살았고 그래서 결혼은 두 씨족간의 결합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혼이 행해져서 여자는 12살 반이 되면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두 젊은이의 부모는 씨족인 가정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결혼에 특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결혼할 여자는 친정에서 이미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시집에서는 그녀를 데려오는 대가로 보상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식의 지불을 모할(Mohar)이라 불렀는데 남편이 죽거나 이혼당하게 될 경우에 그녀의 몫으로 돌아갔고, 양가의 아버지들이 그러한 계약에 조인하였습니다.
결혼식은 가족 전체와 마을, 그리고 손님들과 행인들에게도 결혼 당사자 가족들이 베푸는 큰 축제였습니다. 연회, 노래, 춤이 계속해서 일주일 내내 차례로 이어졌습니다. 결혼날 아침에 신부는 머리와 드레스를 덮는 긴 면사포를 쓰고 그녀의 친구들은 띠로 그녀의 겉옷 주위를 묶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행렬은 연주자들을 선두로 해서 신랑의 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탬버린과 박수 소리의 리듬에 맞춰 남자들은 앞으로 나가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행렬은 먼저 아버지가 오고, 장인, 마을의 연장자들이 그 뒤를 따르고, 끝으로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신랑이 뒤따라 왔습니다. 결혼 계약에 관한 최종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신랑이 지체하는 경우도 가끔 발생했습니다. 최종적인 합의를 위해 시간을 오래 끄는 것이 명예에 관한 문제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집을 떠나기 전에 그녀의 가족들에게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슬퍼해야 했고, 모든 여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들러리를 서는 사람은 신부의 치장을 고쳐주었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집을 떠났습니다. 여자들이 남자들의 행렬에 합류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신랑 아버지의 집으로 갔습니다.
결혼식 행렬이 신랑 아버지 집에 도착하면 신랑의 아버지는 신부를 축복하고, 신랑과 신부는 그들의 서약을 상호 교환했습니다. 포도주 한 잔이 축성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 후, 남편이 마시고 나서 아내가 마신 후 그 잔을 내려 놓았습니다. 축제는 노래하고 춤추며 계속되고, 신부는 손님을 맞을 수 있는 별도의 방에서 친구들과 머물게 됩니다. 신랑은 밖에서 밤늦게까지 일일이 손님들에게 답례를 표하고 신부방으로 갔습니다.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의 친구들은 물러갔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열처녀의 비유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열처녀는 혼인잔치의 들러리들입니다. 그들은 신부와 함께 신랑의 행렬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집안간의 결혼계약에 대한 최종합의가 늦어져 신랑의 행렬이 늦어지자 들러리들은 지쳐서 꾸벅꾸벅 졸기도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신랑의 행렬이 도착하고 들러리들은 신부와 함께 신랑의 행렬을 맞이하러 가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관계로 몇몇 들러리들은 벌써 등잔의 기름이 떨어져갑니다. 그렇다고 기름을 나누자니 신랑 아버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의 등불이 다 꺼져버릴 지도 모르니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습니다. 결국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들러리들은 신부와 함께 신랑의 행렬에 끼어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신랑 아버지집으로 먼저 가게 됩니다. 나중에 기름을 준비해 도착한 들러리들은 이미 잔치집 문이 닫혔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맙니다.
물론 열처녀 이야기는 당대에 행해지던 혼인잔치를 이용한 비유입니다. 비유는 어떠한 진리를 보다 분명하고 쉽게 전달해 주기 위해 사용됩니다. 열처녀의 비유는 분명히 이런 점에서 마지막 결론, 바로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라'라는 말씀을 위해 사용된 익히 잘 아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미리미리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처녀의 비유는 미리미리 기름을 준비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 세상 마지막날의 신비는 불확실한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현재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종말의 신비는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슬기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미련한 사람입니까? 누구도 미련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1독서에서 지혜를 찾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혜를 찾는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원하는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지혜는 스스로를 나타내 보인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진리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혜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멀리서 지혜를 찾고자 합니다. 멀리서 구원의 진리를 찾고자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의 내 생활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현재의 충실함에서 구원의 신비가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