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8월 29일
연중 제 22 주일 성인 강론 (가해)
제 1 독서 : 예레 20,7-9
제 2 독서 : 로마 12,1-2
복 음 : 마태 16,21-27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연중 제 22주일로 8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어느새 무더운 여름도 막바지에 이르고 가을을 알리는 9월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무더위와 집중호우로 인해 짜증과 상처가 무성했던 여름이었습니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때가 되면 제자리를 찾아가는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자연의 이치에 비하면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요지경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지난 주 복음, 그러니까 오늘 복음의 바로 앞에서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그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던 베드로이건만 오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힘주어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는 모습은 비슷하나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는 준엄한 꾸지람을 듣는 것도 지난 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그러면 이런 극적인 반전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첫 번째 예고가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던 베드로, 그러나 이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오히려 대드는 듯한 베드로, 바로 이 두 모습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전환점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와도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고난보다는 편함을, 죽음보다는 생명을, 패배보다는 승리의 영광을 더 가치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또 실제로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보고 느꼈던 많은 일들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확신을 더욱 굳게 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불쑥 예수님께서 꺼내신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는 잔잔한 제자들의 마음에, 희망으로 들떠있던 제자들의 기대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구세주의 구원역사를 온몸으로 막는듯한 반응으로 터져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미숙함과 경솔함에 따끔한 꾸중을 하시는 한편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꿔주고자 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 바로 이 말씀안에서만 제자들의 미숙함과 예수님의 진노가 합쳐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이지만, 그 역설안에서 진정한 일치가 가능함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흔히 "내 신앙은 너무 어려"라고 표현합니다. ’어리다’, ’유치하다’, ’깊지 않다’ 등등의 표현은 어찌보면 ’자기중심적’이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바로 어린 아기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기는 차츰차츰 자라면서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사회속에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바로 이 과정이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이고, 달리 표현하면 어른스러워진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던 구원 역사를 조금 더 넓게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시각과 점점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신앙의 성숙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때로는 부담스러워서 피하고도 하고, 또 두려워서 떨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그 길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어찌하겠습니까? 오늘 제 1독서에 등장하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주님의 꾐에 넘어가 사람들로부터 놀림감이 되었다고 하소연합니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을 하지 말자고 대들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뼛속에 갇혀 있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손을 들고 맙니다. 이렇듯 예레미야는 하느님과의 대결을 통해 결국 자신의 시각을 하느님께 맞추는 것만이 해결의 실마리임을 깨달아갑니다.
십자가의 역설적인 진리는 죽음을 통한 생명의 진리인 동시에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없이는, 자기의 이기적인 마음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맞추려는 뼈를 깎는 희생이 없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신앙의 진리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해 전 네덜란드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마을은 주민 모두가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잇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사나운 폭풍이 고기잡이배 한 척을 에워쌌고, 위험에 처한 선원들은 급히 구조 신호를 타전했습니다. 구조대 대장이 경보 신호를 울리자 주민 모두가 바닷가 마을 광장에 모였고, 구조대가 노를 저어 거센 파도와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주민들은 랜턴으로 바다를 비추며 해변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 시간 뒤, 안개를 헤치고 구조 대원들의 배가 돌아왔습니다. 지친 구조 대원들은 모래사장에 쓰러지며 인원이 넘쳐 더 이상 구조선에 태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 남자를 남겨 두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는 다시 구조대가 가야하는데 이미 대원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기에, 구조대 대장은 다른 자원봉사자를 찾았습니다. 이 때 열 여섯살 먹은 한스라는 소년이 자원했습니다. 물론 그의 어머니는 극구 말렸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10년 전 폭풍으로 남편을 잃고, 또 이번 폭풍으로 며칠 전 바다에 나간 형까지 소식 두절이기에 더더욱 하나밖에 안남은 아들을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스는 모두가 자기만을 위해 나서지 않으면 어떻하냐며, 구조대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구조대원들이 탄 배가 다시 안개를 뚫고 돌아왔고, 한스는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저의 엄마에게 말씀해 주세요. 실종자가 바로 우리 형 파울이었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