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제29주간금요일 2006.10.27.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돈을 계산하고, 세상의 소식과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세상일을 처리하는 데는 아주 눈치가 빠릅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징조에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실상 나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바울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모른 채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뜻이야 어찌되었건 상관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도록 우리 본성의 악은 바로 곁에서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징조를 읽고 일어서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막교부 압바 푀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규율을 지키는 사람은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시적인 영적인 피정이나 강의를 통해서
결코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을 바꾸어 놓을 수 없습니다.
매일 미사 때마다 강론을 듣고, 이 외에도 수많은 영성 강좌들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좋은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이란 달리 말해서 우리 삶에 하느님을 기억시키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좋은 땅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규율을 만들고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민감하게 하느님의 징조를 읽고,
하느님의 뜻을 향하여 영혼을 돌려세우기 위해서는 이러한 좋은 습관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우리의 자유의지와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크고 소중한 선물이면서, 동시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자유의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명령이 떨어지면
로봇이나 기계처럼 움직이며 살아가는 당신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며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참으로 살아있는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의 열매를 따 먹지 않도록 미리 막아버릴 수 있으셨음에도
당신이 허락하신 자유의지 때문에 원죄까지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타락한 인간들을 당신 힘으로 쓸어버릴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느님이면서도 묵묵히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죄와 악을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처럼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가 악을 선택할 때는
하느님도 일방적으로 우리를 막아설 수 없으십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신비 가운데 가장 무서운 측면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놓아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징조, 하느님의 뜻과는 무관한 사람들이 되어버립니다.
이제 우리의 자유의지에 하느님에게서 오는 좋은 습관을 들이고
성령 안에서 그 자유의지를 잘 단련시켜 나가십시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재판관에게 가는 도중, 고소한 자와 합의를 보는 현명한 자의 선택입니다.
그 어떤 근사한 영성적 기술을 쓰더라도 단 번에 하느님의 뜻에 민감한 영혼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매일 정해진 어떤 시간에는 어김없이 성경을 읽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영성서적, 또는 영적인 양식이 되는 책들을 읽도록 작은 습관을 들입시다.
이 노력을 게을리 할 때, 다음의 말씀이 곧 우리 자신의 몫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그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멘.
복자 성당 정창주(프란치스코) 보좌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