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20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2007. 11. 5. 오후 1:46:21

글자
2007년 10월 20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2,8-12)


“Everyone who speaks a word

against the Son of Man will be forgiven,
but the one who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믿음은 사람을 강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믿음 때문에 관아에 끌려갈 때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답변할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의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믿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

 

☆☆☆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얘기하고 설득하는 것만이 증언은 아닙니다. 삶 자체가 예수님을 증언할 때에 그 증언은 더욱 힘이 있습니다.
굳이 말로 전하지 않더라도 ‘저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면, 그가 바로 증언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저이는 신자라지만 어딘가 미심쩍어.’ 하는 느낌을 준다면, 어찌 증언하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무심코 드러내는 말과 행동 속에 주님을 증언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믿음의 향기입니다. 그 향기는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 교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깊이와 실천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좌우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말만 신자이지 예수님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보다는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나 가까이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먼저 주님을 증언하는 말과 행동을 실천합시다. 그들에게 풍기는 예수님의 향기는 결코 그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형제님 아들이 세 살 때, 왼쪽 눈 위가 찢어져 병원으로 달려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간호사들은 아이를 침대네 눕히더니 양손을 묶었지요. 의사가 아이의 머리를 꿰맬 때 형제님은 아들의 손을 꼭 잡았지만, 아들이 소리칠 때는 거의 냉정을 잃었습니다.

“아빠, 아빠. 아저씨가 날 아프게 해. 못하게 해줘! 아빠!”

아이는 자신을 늘 지켜주던 아빠가 왜 지금은 지켜주지 않는 건지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보호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었지요. 아들이 이 아픔을 이겨내야 상처가 완전히 치유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겪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라고 의심합니다. 이렇게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곁에서 아무런 활동도 하시지 않고 지켜만 주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나요? 왜 하느님은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데도 그냥 내버려두시나 원망스러울 때가 있나요?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빠가 아이를 미워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하느님은 여러분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는 선하신 아버지이기에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무엇이든 맡기면 다 이루어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 구미에만 맞아 떨어지는 하느님을 만들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하느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을 증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구미에 맞을 때에만 받아들이겠다는 식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제대로 증언하지 못하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거부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는 삶. 분명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보다 더 의미 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면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하는 편에 서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데 쉬운 삶을 갈망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빠다킹신부

 

 

 

 

   유비무환      

-이수철 신부-


 유비무환(有備無患), ‘준비가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신앙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성령은 어떤 박해나 곤경 중에서도 거기서 벗어날 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자의 처리를 묻는 적대자들의
진퇴양난의 물음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천상적 지혜의 말씀으로 멋있게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은 지혜의 원천이시며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어두우면
떠오르지 않습니다. 고요하고 맑은 호수 위에 떠오르는 푸른 하늘의 밝은 달이듯,
성령으로 충만해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에서 떠오르는 것이 하느님 지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기도와 성경 묵상이 필수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지혜가 아니라, 평상시에
기도와 말씀 공부로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 때, 위기에도 하느님이 주시는
지혜로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날 알아?

 -안성철 신부(성바오로수도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신앙고백을 요구하신다. 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목숨의 위협까지 각오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대단한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사회 학문의 급속한 발전과 기계 문명의 발전, 무신론적 사고로 말미암아 신앙인들은 한낱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하게 안다고 증언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분 또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내어 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순교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은 그분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 놓는 선교사가 많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아직도 공공장소에서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을 창피해한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슬쩍 조그맣게 하거나 재빨리 성호를 긋는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십자 성호마저도 부끄럽게 여긴다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더니 우리가 그 꼴 아닌가?

 


 

 요즘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제주교구 고병수 신부-


 요즘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입교자가 전에 없이 감소하고, 쉬는 신자들 역시 증가일로에 있다. 이곳저곳에서 대처방안을 내놓아 보지만 문제가 쉽게 해결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답답하고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동안 우리 교회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세상을 향한 교회 본연의 사명이나 내적 성장보다는 솔직히 교회를 양적으로 키우는 데 온통 힘을 쏟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세계 교회가 깜짝 놀랄 정도의 양적 성장을 이뤄낸 반면, 공동체의 내적 기반이 흔들리면서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교회의 성장에 따른 대형화와 세속화가 부메랑이 되어 교회에 위기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지금의 위기를 냉철하게 보고, 거듭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교회를 키우는 데 몰두했던 데서 벗어나 세상의 변화나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못된 세상을 변혁시켜나가야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줄 수 있는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를 친교와 일치, 사귐과 나눔이 넘쳐흐르는 ‘공동체들의 공동체’로 탈바꿈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를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일이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요구하는 참다운 회개를 지금 여기에서 행하는 것일 게다.

 

 

-부산교구 손태성 다미아노 신부-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많은 사고들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아, 테러와 재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까? 얼마 전에는 인도 파키스탄에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보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기에 살아있는 우리들로서는 심각한 무력감에 빠집니다.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하게 됩니다. 왜 그런 일들이 생기나,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허무한 질문 앞에 우리는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액면 그대로 오늘 복음을 해석해보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될 것이다.”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는 무화과 나무의 주인의 심정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 주인은 언제든지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를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주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주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이 생명의 주인 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무화과 나무가 주인이 자신을 언제라도 베어버릴 수 있음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회개를 미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하리라, 내일 하리라 하는 것이지요. 참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결국은 못하게 되겠지요. 무화과 나무 주인이 마지막 기회를 줄 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결국 잘려버리고 말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회개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그것에 집중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짧은 인생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하게 알고 있는데도 우리는 곧잘 그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참 어이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복음 말씀을 한번 다시 듣고 소리내어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든 어떤 모습으로 죽든 그 모든 것은 주인이신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주셨고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실 주님 앞에서 내 생명의 가치를 잘 살아내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복된 날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터부와 증언

-최영균 신부 -


 

증언’이라는 말은 보통 법정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그것을 목격하거나 직접적인 체험이 있을 때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증언입니다. 일본에 가면 세 마리의 원숭이가 각각 귀를 막고,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있는 원숭이 상이 있습니다.

이 원숭이들은 인간사회의 터부(Taboo, 금기)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알고도 모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본 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서는 안 되는 장소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묵시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분명 문명사회 안에 존재하는 터부(금기)는 한 사회를 질서 있게 만드는 건강한 문화적 소인의 그러나 때론 진리를 말하는 것이 터부시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터부는 건강한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두려움과 인간 사회의 어둠으로부터 오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증언이라 함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밝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귀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요한 복음 1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진리로 간주합니다.
진리(진실)를 증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두려움과 사회적 악과의 고단한 싸움입니다.

때론 이 증언 때문에 한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터부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겐 진리 앞의 터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작은 이익과 작은 憫맒��?
또 작은 인간적 편안함을 위해 진실을 말하는 것을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이 바로 신앙이 아닌가 싶습니다.

 

 

복음 선포, 사람의 지식, 하느님의 지혜, 성령의 인도하심     

-이성우 -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은 누가 선포해야 합니까? 사제나 수도자나 일부 열성 평신도에게만 주어진 사명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를 늘 되풀이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선포할 자격과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주저합니다. ‘자격이 없어서’, ‘아는 것이 부족해서’, ‘배움이 짧아서’, ‘말을 할 줄 몰라서’ 등등, 우리가 하고 있는 핑계는 다양합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지식과 지혜는 어디서부터 옵니까? 사람이 제아무리 똑똑해도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에 비하면 사람의 지식은 바다 앞에 물 한 방울과도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사람이 몇 십 년을 애써서 축적한 지식도 단 몇 초에 훌쩍 뛰어넘습니다. 사람의 지식은 하느님의 지혜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학식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지닌 자에 비하면 어리석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느님은 지혜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은 지향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수천 배의 성령의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등에 업고 성령의 인도 하에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느님이 나의 지혜의 원천이시라는 믿음을 지녀야 가능한 일입니다.

 


 

 가장 귀한 사랑의 표현

-최명숙 목사(군산 베데스다 교회)-

 

 제가 사랑하는 이들 중에 휠체어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그 자매는 유전적으로 손발톱이 없는 형제와 결혼해 딸을 낳았는데 그 딸 역시 손톱 일부와 발톱이 없습니다. 어느날 그 자매는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딸을 마중나갔는데 그 어린 딸은 친구들과 함께 있다가 휠체어를 탄 엄마를 보는 순간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그 자매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고 했습니다. 저녁에 그 자매는 딸에게 “네가 엄마를 부끄러워하면 앞으로 엄마도 너를 부끄러워할 거야. 너도 손톱·발톱이 없잖아!”라고 했답니다. 어린 자식의 행동이지만 그 마음에 얼마나 큰상처가 되었으면 그렇게 냉정하고 모진 말까지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심한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저에게는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특별히 더 마음에 와 닿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 형제나 친척들에게 용돈이나 선물을 받는 것보다는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를 자식으로, 누나로, 언니나 동생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더 기뻤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동생이 결혼할 상대를 부모님께 인사시키기도 전에 먼저 나에게 데리고 와서 소개한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교회에 나와서 많은 봉사를 하는 이들보다는 연약한 나를 얕보거나 무시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목사로 자랑스럽게 인정해 주는 신자들에게서 감동을 받고 고마움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일’이란 그분이 보내신 이, 곧 당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는지요!(요한 6,28-­29)
지금 우리는 생각 속에서, 말과 행동에서, 어떤 것을 결정해야 할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심을, 예수님께서 내 구원자이심을 믿으며 살고 있는지요? 주님을 향한 그 귀한 사랑의 표현을 통하여 ‘그날에’ 천사들 앞에서 그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분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지요?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은은한 꽃향기 같으신 분, 성령>


‘젊은 시절, 꼭 한번 이루어야 할 것이 지리산 종주’라며 젊은 형제들을 살살 ’꼬셔’ 조금은 무리한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제 젊은 시절의 여러 추억들이 긷든 지리산 자락 이곳 저 곳을 다시 밟으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이름만 들어도 정겹고 마음이 훈훈해오는 노고단, 토끼봉, 연하천산장, 벽소령대피소, 세석평전, 장터목산장, 그리고 천왕봉.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만, 천왕봉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를 생각했어야 했는데...갑자기 왼쪽 다리에 쥐가 나는가 하면, 관절부위에 심각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내려갈 길은 까마득하고, 하산 시간은 빠듯하고, 우선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형제들을 먼저 내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심각했습니다. 깎아 지르는 절벽 길을 계속 내려 가야하는데, 통증은 점점 심해오고, 스프레이를 뿌린다, 파스를 붙인다, 마사지를 해본다, 별짓을 다했지만 완화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백 미터 내려와 보니 상황의 심각성을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하산(下山)이 전혀 진척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겁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제가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평소 부탁하는 분들에게도 ‘저는 별로 효과 없다’며 마다했던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주모경도 바치고, 성령송가도 바치고, 그리고 정성껏, 간절한 마음으로 제가 제 무릎에 안수를 했습니다. 웃기지요?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보니.


결과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제가 기대했던 대로 통증이 완화되거나 씻은 듯이 낫기는커녕 통증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안수기도 하는 동안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쥐가 나고, 통증도 심각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인데다가 마음이 몹시 불안해져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까짓 것 별 것도 아니야’ 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는 순간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만 할 게 아니라 네가 스스로 노력도 해야지!”


마음이 안정되다보니 요령도 생기더군요. 아픈 다리에 최대한 무게가 실리지 않게 뒤로 돌아서 게걸음으로 내려오니 훨씬 진도가 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쉬어가며 마사지도 해주고, 다리를 쭉 뻗는 스트레칭도 해주니 그런대로 내려올 만 했습니다. 평탄한 오솔길로 접어드니 신기하게도 그렇게 극심했던 통증도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실 협조자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박해를 받을 때, 고초를 겪을 때, 한계 앞에 부딪혔을 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끝까지 함께 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알아서 다 알려주실 것이고, 성령께서 결국 우리를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나날을 스쳐지나가는 미풍과도 같으신 분, 은은한 꽃향기 같으신 분, 가장 중요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공기, 물, 산소 같으신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께서 우리 곁에 늘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바라보시는데, 우리를 지켜주시는데, 우리는 너무 많은 걱정 속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한 작은 생명으로 빛을 본 순간에서부터 세례성사나 견진성사, 성체성사 등 다양한 성사 때마다 우리 인생 안에 현존하셨던 당신의 존재를 환기시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주지 못할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갖은 세파와 인생의 고초 앞에서도 다시금 힘을 내고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오늘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존재에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일상의 다양한 순간 안에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진리와 사랑에로,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성령께 우리의 존재 전체를 맡겨드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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